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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4년 11월 22일 (금)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계동 메아리
"땅에 떨아져 죽는 밀알이 되라"--[하계동 메아리 704호]

30 고창록 [peterkauh] 2006-04-09

 

 

 

[사순 제5주일]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라”

요한 12,20-33 / 예레 31,31-34 / 히브 5,7-9

돌판에 새겨졌던 옛 계약은 무효가 되고 새 계약이 세워졌습니다. 율법이 존재했지만 백성들이 스스로 파계했으며 그 벌로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참혹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때 새 계약을 전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 영원히 존속될 위대한 계약의 결과를 말해 줍니다. 그 새 계약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활을 마무리하시면서 군중을 상대로 하신 마지막 말씀의 일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죽어서 열매를 맺을 하나의 밀알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밀알처럼 죄악과 파멸로부터의 인류 구원이라는 풍부한 결실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죽음입니다. 또한 ‘현재의 목숨을 위해 의를 버리는 자, ‘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의 대조를 보여주십니다. 자기를 죽임으로써 결실을 맺는 삶.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영예로 보상 받는 삶입니다.

그래도 수난을 피하고 싶었던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의 죽음을 원하고 계신 성부께 순명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일치의 정의를 배웁니다. 그것만이 부활을 가져옵니다. 하느님의 위업과 그 영광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순명과 일치.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28)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사명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전례와 교리]

부활로 이어진 사건들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들의 대하여는 성서마다 설명들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핵심적인 사건들에 있어서는 일치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일요일)

최후의 만찬 2-3일 전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십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찬미 받으소서”(요한-12:13)


성전 정화 (월요일)

최초의 세 가지 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상거래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쫓아내셨습니다.

    나에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 져야 한다(마태 21:13). 그 날 이후 줄곧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성 목요일)

저녁에 예수께서는 12제자들과 만찬을 함께하셨습니다. 그는 빵과 술을 축복하신 다음 그것이 자신      의 몸이요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계약으로서 만인을 위하여 흘릴 나의 피다.”(마      르 14:22-24) 그와 함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리브 산에서 괴로워하심 (성 목요일)

최후에 만찬 후 그들은 모두 올리브 산기슭의 공(정)원으로 나아갔다. 제자들이 잠들어있는 동안 예     수께서는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을 거두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마       테 26:39)


체포되심 (성 목요일)

유다에 의하여 배반당하신 예수께서는 체포되시어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에게 끌려 가셨다. 그리      고 재판과 모욕을 당하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 (성 금요일)

병사들이 예수를 고문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그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갈바리(골고타)산으로 끌고 갔      다. 그곳에서 두 명의 다른 죄수들 사이에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형을 집      행하는 군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 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      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루가 23:34)



     [독자 투고]


사순절 묵상


베드로의 눈물

“이제 곧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마르14:27)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나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마태오 26:31,32)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르14;29) 하늘에 맹세코 진심이었다. 입술 끝으로 나불거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분은 나의 진심을 아랑곳도 아니 하시는 듯, 내 얼굴을 똑 바로 들여다보시면서 말씀하셨다.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르14:30)

기가 막혔다. 마음을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그렇지 않음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다만 더욱 힘주어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14:31) 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자 다른 형제들도 모두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분이 체포당하시자 우리는 모두 달아났고 그날 새벽에 나는 대사제 관저에서 말씀 하신 그대로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 두 번째 우는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을 차렸으나 이미 일은 저질러진 다음이었다. 고개를 쳐드니 주님은 “몸을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셨다”(루가 22:61).

나는 땅에 슬어져 슬피 울었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얼마나 슬개 빠진 허수아비인지, 또 얼마나 교활한 들짐승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것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지난 2년 동안, 그분은 나를 한번도 외면하지 않으셨건만, 나는 그분이 외로운 처지에 빠졌을 때 외면하였던 것이다.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눈물은 마음을 맑게 해 주는 무슨 묘약인 것 같다. 실컷 울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갈아 앉은 것 같았다. 우리는 그분의 인자한 눈동자 앞에서, 다만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따름이다.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누가 또 다시 다가와 “예수와 한 무리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참으로 두려웠다. 나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아아, 그분은 이렇게 우리 모두가 도망 친 가운데 홀로 그 험한 골고타 길을 걸으셨고 그 삭막한 해골산 꼭대기에서 마른 나무 위에 달려 숨을 거두셨다!

내 입이 만 개가 있다한들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주님, 당신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시몬은 말문이 닫힙니다. 그 깜깜하고 삭막한 가시밭길을 당신 홀로 걸어가시게 하다니요! 시몬은 이미 그때 죽었습니다. 허둥지둥 당신의 십자가를 등지고 도시의 뒷골목 다락방으로 숨어들었을 때. 당신의 손발에 박히는 못 소리를 외면하고 눈을 감았을 때, 이미 시몬의 생명은 불꽃을 잃은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있는 나에게 당신은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날 밤 게쎄마니 동산에서 잠자고 있는 나를 부르시고 깨우시던 주님, 떨고 있는 다락방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주님, 참으로 시몬은 할 말이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르시고 깨우시는 주님, 언제나 이놈을 곁에 두고 싶어 하시고 용서하시고 꾸짖으시고 바라보시는 주님, 이제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나의 장담이 되지 말게 하시고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당신의 말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죽음, 그 외롭고 아프고 억울하고 수치스런 죽음을 이 몸으로 죽을 수 있게 하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제발 배신만은 않게 하소서. 아멘.



하계동 김 아오스딩





[영적 먹거리]
        

        

             ❍ 오늘의 묵상 ❍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 요한 12,20-33에서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느끼면서도, 어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죄 없이 맞아야 하는 억울함 앞에서…. 수난을 관통하는 영광, 당신과 아버지의 영광을 신뢰하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네 좁은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게쎄마니에서 드리신 기도가 들려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 기도가 이토록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당신을 왜곡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세상,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는 이들, 자신을 내치는 세상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어도, 그분의 뜻이라면,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깊은 고뇌와 사랑이 아스라이 다가옵니다.

거기엔 사랑하기에 나 먼저 떠나노라 하는 장엄함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대한 순명과 우리는 다 이해하기 힘든 사랑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겸허한 순종이 사랑임을, 자유임을 아프게 아프게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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