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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3일 (토)연중 제33주간 토요일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초중고(학생부)
어떻게 가르칠까요?를 보고서...

957 이영주 [20joolid] 2002-04-11

  +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순교자 현양회 소속 서울 성지안내 봉사자입니다.

 한국 천주 교회사를 배웠고,항상 공부하고 있기에 써보겠습니다.

 

1번에대하여: 이 사건은 1868년에 독일 상인"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 당하자,

            5월 9일에 아산만을 통하여 10일 충청도 덕산의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가

           묘가 견고하기 때문에 실패한 사건입니다.  

             길을 안내한 페롱 신부는 1866년의 병인 박해시에 살아서 피신했던 분이고,

            이 사건 이후에 다시 조선 땅에 들어 올 수 없었던 것이 우리 교회의 입장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일어 나게 된 배경이 있으므로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번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시작된 직후부터 크고 작은 박해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1801년에 "황사영의 백서"에 -대박청래-가 쓰여집니다.

             신유 박해가 일어 나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의 배론에서 교우촌 토굴에 몸을    

            숨기고,조선 교회의 박해 상황과 그에 대한 대책을 비단에 써서 북경 교회에

            보내려고 합니다.     비단에 쓴 편지이므로 "백서"라고 합니다.

             이 백서는 북경 교회로 보내기 전에 압수됩니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

            서양의 큰 배를 보내어 우리 조정과 얘기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게 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 때의 신앙 선조들의 생각으로는 박해를 받아

            와해되는 교회가 안타까워서 서양의 큰 힘을 빌고 싶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사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나게된 배경이 있으므로

            이 사건들도 당시의 극심한 박해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초기 신앙 선조들은 1801년의 박해 후에도 꾸준히 교회 재건 운동을 합니다.

            1811년에는 교황께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간청합

            니다

 

             절두산의 박물관에 가면 "황사영의 백서"사본과 1811년의 편지를 비롯한

            유물을 볼 수 있습니다.

 

             더 상세한 기록은 한국 천주 교회사에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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