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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11월 21일 (목)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사순 제 1 주일

108 류달현 [dalbong6] 2002-02-18

오늘은 2002년도 사순 시기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시기는 지난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묵상하며, 그 동안 잘못 살아온 삶과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하며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편안함과 안락함을 멀리하고 절제의 생활을 하도록 단식과 금욕을 실천할 것을 권합니다. 이러한 사순절을 쉽게 표현하면, "40일 동안의 피정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지내신 것처럼, 우리도 비록 몸은 보통 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에 종사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피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피정은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며, 주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새롭게 태어남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 40일 동안, 우리가 준비와 예비를 잘 하면, 진정 기쁨의 부활을 맞이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다면 부활대축일은 하나의 연중 행사로서 밖에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광야에서 유혹 받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세기의 것과는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탐스럽고 자기 스스로 영리해 지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탐하는 재물을 주는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되는 기술을 가르쳐서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이지, 하느님이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기 위해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기적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인들이 잘 받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도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16)는 구약성서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활 무대로 이 세상을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과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자기도 선하고 자비롭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의 세 번째 유혹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도 한 마디로 거절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섬긴다(4,10 참조)"는 말씀으로 하느님만이 당신 삶의 보람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 생활은 하느님 덕분으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고 그런 것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하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유혹들입니다. 재물이 소중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고, 모든 이가 부러워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라는 것입니다. 빵을 주고 기적을 주고 부귀영화를 주는 초능력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와 같이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자신 안에 두고 자기에게 탐스럽고 자기가 영리하게 보일 수 있는 선택을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아니 아주 자주 유혹에 직면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아이들의 교육으로 치자면 둘째라면 서러울 민족이 우리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만큼이나 아이들의 교육에 헌신적인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유태인입니다. 그런데 유태인 부모들과 우리 부모님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태인의 자녀들은 학교를 가기전 집을 나서면서 부모님들게 "어머니, 학교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면 부모님들이 "그래, 학교가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오너라"하고 인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학교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하면 뭐라고 답하십니까? 십중 팔구는 공부 열심히 하고 오너라하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보다는 공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에 방해가 되는 주일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학원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친구도 공부 잘 하고 부자집 자녀를 사귀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입니다. 주일학교에 보내기 보다는 학원에 보내고 싶은 것, 행동이 조금 비뚤어져도 공부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넘어가는 것, 내 자식이 다른 집 아이들 보다 더 잘 났으면 하는 마음 등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세상에는 공부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자녀분들을 주일학교에 등록하지 않으신 부모님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인 주일학교에 반드시 등록시켜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복음서가 유혹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갖다 놓는 것은 이 이야기를 거울 삼아 재물, 기적,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을 복음서 안에서 찾지 말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재물, 비상한 능력, 부귀영화, 이런 것을 탐하지 않고,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있을 때 열리는 자유스런 경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시고 자비로우셔서 그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맛보는 자유스런 경지입니다. 이 경지를 위해 우리도 광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비울 수 밖에 없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겪을 수 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신병,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이런 것이 모두 우리가 광야에 내던져진 순간들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너지고 사라진 순간들입니다. 40일 단식한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때 편법을 동원하여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베푸심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결정적으로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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