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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11월 21일 (목)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연중 제 5 주일

121 김인권 [93kik] 2003-02-12

연중 제 5 주일 (마르1,29-39)

 

안녕하세요?

오늘은 연중 제5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스럽고 허망한 현실에 대해 슬프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본래 재산도 많았고 자녀들도 많았지만,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다 잃고는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에 까지 걸려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욥은 희망도 없고,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형벌로 생각하여 포기하여 하느님을 저버리는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고통과 괴로움들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비단 예를 들어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만 봐도 그렇습니다. 가정안에서 부부간의 불화, 자녀들의 진로와 생활 모습들에 대한 불만과 고민, 고부간의 갈등, 또한 가정의 살림을 하루하루 꾸려나가는 어려움, 이웃들과의 반목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수는 많습니다.

그 많큼 우리는 고통과 괴로움속에 묻혀지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고, 어찌보면 고통과 괴로움은 인간의 운명이요, 인간 실존의 한 속성이며, 삶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숨을 거두는 인생의 긴 여정에서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함이 어찌보면 당연한가 봅니다.

그런 고통과 괴로움들의 이유와 의미라도 명확히 알면 좋으련만, 어떤 것이 하느님의 섭리가인지를 우리의 머리로 헤아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삶은 그 자체로 사는 것이지 말로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보다 먼저 태어나셔서 인생의 연륜이 높으신 분들도 당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조언을 해 줄수 있을 뿐이지,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저 또한 이 자리에서 사제로서 고통의 의미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우리의 부서지고, 상처로 얼룩진 마음을 씻겨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아픈 마음과 시린 가슴을 낫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수난과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체험하셨고,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의 길을 몸소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떤 백인이 노예시장에서 흑인 노예를 샀는데 이 노예는 하느님을 믿는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흑인 노예는 열심히 일했고, 성실하여서 꾀를 부릴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특히 이 흑인 노예를 좋아했고, 사냥을 나갈 때면 데려가곤 했습니다.

한번은 주인이 흑인 노예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을 때 말을 타고 가던 주인이 헉헉거리며 쫓아오는 흑인 노예를 보고 질문을 했습니다.

’얘야, 네가 믿는 신은 어떤 신이냐?’ 그러자 노예는

’예, 나으리! 제가 믿는 신은 사랑이 많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그토록 열심히 너의 신을 믿건만 너는 어찌하여 늘 고통만 당하고 있으며, 너의 신이 너를 흑인으로 태어나게 했는데 원망스럽지 않느냐?’

’제가 고통스럽기는 합니다만 이것이 바로 저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고통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다시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하자 흑인 노예는 예를 들어 말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이 사냥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새가 두마리 날아가는데, 주인님께서 총으로 두발을 쏘아서 한 마리는 정통으로 맞아 땅에 떨어 졌고, 한 마리는 날개만 맞아 도망치고 있다면 주인님은 어떤 새를 찾아가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날개만 맞은 살아 있는 새을 쫓아갈 것이 아니냐, 죽은 새는 언제라도 찾아서 가져갈 수 있으니..’ 라고 주인이 말하자 흑인 노예는 주인에게

’주인님, 육신을 괴롭히는 악신과 악의 유혹들도 이미 죽어버린 영혼에게는 포기하고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영혼에게는 찾아가서 유혹하고 괴롭히기도 합니다. 제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표시요, 희망이 있다는 표시이며 하느님이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 괴로움, 고난이라는 것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사에서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인간들을 일깨워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재정립시켜주는 도와 주는 그런 도구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내치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일어서게 도와 주시는 분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고통은 결코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것도, 나나 나의 가족만이 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도, 그 풍성한 사랑도, 시몬의 장모나 유대인들에게만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병자들에게, 고통을 받는 모든 인간들에게 베풀어진 것임을 복음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에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뿐 아니라 당신을 찾아온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또한 마귀들린 사람들을 모두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고, 가르침을 주실 때에도 항상 외딴 곳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시고,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요, 인간 조건임을 깊이 마음에 새기시며 하느님의 뜻을 전파하셨습니다.

우리가 부서진 마음을 치유 받고 인생고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형제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쉼없이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고통이 하느님의 뜻이요, 인간이 겪어내야 할 것이라면 피할 수도 대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로 나누며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자비 지극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고통중에, 괴로움 중에 있는 서로를 위해 조금씩 나누어 그 아픔을 줄여 줄 수있는 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행해야 할 사명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라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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