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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24년 11월 23일 (토)연중 제33주간 토요일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골룸바노 (Columban)
    같은이름 골롬바노 , 골롬바누스 , 골롬반 , 골룸바누스 , 골룸반 , 콜롬바노 , 콜롬반 , 콜룸바노 , 콜룸바누스 , 콜룸반
    축일 11월 23일
    신분 설립자 , 수도원장 , 선교사
    활동지역 보비오(Bobbio)
    활동연도 543?-615년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또는 골룸바노)는 543년경 켈트족이 살던 아일랜드의 렌스터(Leinster)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수도 생활을 결심하고 북아일랜드 서쪽 언(Erne) 호수에 있는 수백 개의 섬 중 하나인 클루아인(Cluain) 섬에서 시넬(Sinell)이란 수도원장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시편을 주석할 정도로 똑똑했던 그는 북아일랜드 동쪽에 성 콤갈(Comgall, 5월 10일)이 설립한 뱅거(Bangor)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당대에 가장 유명한 뱅거 수도원에서 사제품을 받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40대까지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실천했다. 그 후 그는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고 12명의 동료 수도자와 함께 유럽 대륙으로 ‘거룩한 순례’, 곧 선교 여정에 올랐다.

       585년경 영국 해협을 건너 오늘날 프랑스에 속한 갈리아(Gallia) 북서쪽 브르타뉴(Bretagne) 지방 생말로(Saint-Malo)에 도착한 성 골룸바노 일행은 대륙을 가로질러 590년경 갈리아 동쪽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애덕 실천은 물론 당시 느슨해진 성직자들의 생활과 왕족과 귀족들의 부도덕한 생활을 보속하기 위한 엄격한 금욕 생활은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젊은이들이 수도 생활에 큰 매력을 느끼도록 했다.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출신이며 과거 부르군트 왕국 지역을 다스렸던 군트크람누스(Guntchramnus)의 환대로 성 골룸바노 일행은 안느그레(Annegray)의 폐허가 된 로마 요새에 집을 짓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너무 좁아 인근 뤽세이유(Luxeuil)에 수도원을 지었고, 그곳마저 좁아져서 퐁텐(Fontaine)에 세 번째 수도원을 세웠다. 당시 수도원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였기에 얼마 뒤에 성 골룸바노를 따르는 이들이 유럽 전역으로 나가 선교하면서 프랑스,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 50여 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성 골룸바노는 약 20년여 동안 많은 사람에게 엄격한 수도 생활을 가르쳤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성 골룸바노가 로마 전례 대신 켈트 전례를 따르면서 프랑크족 주교들의 반발을 사서 시노드 출석을 요구받았다. 그는 시노드에 출석하지 않고 편지로 대신했는데, 그 안에서 전례 문제보다 더 시급한 것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왕족에 대해 궁중을 방문하는 주교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결국 610년경 부르고뉴의 국왕인 테오도리쿠스 2세의 부도덕한 결혼을 반대하면서 확대된 논쟁은 성 골룸바노와 아일랜드 출신 수도자 모두를 추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일랜드로 압송당하기 직전 폭풍을 만나 고생하다가 낭트(Nantes)에서 겨우 탈출한 성 골룸바노 일행은 또 다른 게르만족의 복음화를 위해 오늘날 프랑스 북동부 메스(Metz)와 독일 남서부 마인츠(Mainz)를 거쳐 라인강(Rhein R.)을 따라 남쪽으로 선교 여행을 시도했다. 그리고 알프스 산맥을 넘은 성 골룸바노 일행은 612년경 이탈리아 북부의 랑고바르드(Langobard) 왕국에 도착해 아길룰프(Agilulf) 왕의 환대를 받고 밀라노(Milano)와 제네바(Genova) 사이의 작은 마을인 보비오(Bobbio)에 정착해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했다.

       성 골룸바노와 동료 수도자들은 이탈리아 선교에 착수해 보비오 뿐만 아니라 밀라노와 제노바 등지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이들 수도원은 당시 학문과 문화 그리고 영성의 중심지로서 크게 이바지했다. 비록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성 골룸바노는 열정적인 켈트족 종교 심성으로 죽을 때까지 정통 교리와 엄격한 영성 생활을 실천해 다소 느슨한 신앙생활을 하던 프랑크족 그리스도인을 자극하였다. 성 골룸바노는 자신의 수도회를 위한 “수도 규칙”(Regula Monachorum), 보속 규정인 “속죄집”(De Poenitentianum), 강론집과 시(詩), 아리우스(Arius) 이단 반박문 등 수많은 글을 남겼다. 권력자에게는 무서운 대상이지만 공동체에서는 인정 많은 아버지였던 그는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또한 늑대와 곰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다람쥐들이 어깨에서 뛰놀았다고 한다.

       성 골룸바노는 615년 11월 23일 자신이 발견해서 성모님께 봉헌한 보비오 수도원 근처의 동굴에서 생활하다가 평화로이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보비오에 있는 성 골룸바노 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21일 목록에서 그에 대해 기록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성 골룸바노가 선종한 날로 알려진 11월 23일로 옮겨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아일랜드 출신 대수도원장인 성 골룸바노가 프랑스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순례자가 되었고, 뤽세이유 수도원을 설립해 다른 많은 수도원의 모범이 되도록 했고, 강제로 추방된 후에는 알프스를 넘어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 지방에 엄격한 규칙과 학문 연구로 유명한 보비오 수도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지내다가 평화롭게 선종했다고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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