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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자) 2025년 3월 13일 (목)사순 제1주간 목요일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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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가브리엘 포센티 (Gabriel Possenti)
    같은이름 가별 , 뽀센띠 , 델라돌로라타 , 아돌로라타
    축일 2월 27일
    신분 수사 , 신학생
    활동연도 1838-1862년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1838년 3월 1일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아시시(Assisi)에서 법률가인 산테 포센티(Sante Possenti)와 아녜스 프리쇼티(Agnes Frisciotti)의 13남매 중 11번째 아들로 태어나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정에서 성장한 프란체스코 포센티(Francesco Possenti)는 4살 때 어머니가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난 후 큰누나 밑에서 자랐다. 게다가 아시시의 행정관이었던 아버지가 스폴레토(Spoleto)의 세액 사정관으로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 그곳으로 가서 살았다. 그는 1856년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기까지 스폴레토의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잘 생기고 재치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과 연극 그리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리고 ‘일 다메리노’(il damerino, 여자에게 상냥한 남자)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러면서 그는 매우 지성적이며 문학과 예술에서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깊은 신앙심과 성모님에 대한 신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높은 애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회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기 전에 중병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만약 병이 나으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결심했으나 회복된 후에 약속을 이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13명의 형제 중에서 7명을 어린 나이에 떠나보내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런데 1855년 프란체스코 포센티는 또다시 중병에 걸리면서 회복되면 수도회에 들어가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큰누나가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로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아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결국 그는 스스로 한 약속을 실천하고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856년 9월 6일 마체라타(Macerata) 근처 모로발레(Morovalle)에 있는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9월 21일 수도복을 입고 수련을 시작하면서 ‘통고의 성모의 가브리엘’(Gabriele dell’Addolorata, Gabriel of Our Lady of Sorrows)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857년 9월 22일 첫 서원을 한 그는 이때부터 사소한 일에서도 완덕을 얻으려는 특별한 노력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의 밝은 성품, 기도 정신,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규칙 엄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으려는 열망이 그의 모든 생활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짧은 수도 생활에도 불구하고 높은 완덕을 닦을 수 있었다.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1859년 사제직 준비를 위한 신학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 남부 아브루초(Abruzzo) 지방 산간지대에 있는 테라모(Teramo)의 이솔라 델 그란 사소(Isola del Gran Sasso)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의 위험과 교황령의 해체 등으로 정치적 불안이 고조되었고, 수도회는 젊은 수도자들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보내 교육하고자 했었다.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1860년 결핵에 걸려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학업을 마치고 1861년 소품(수문품, 강경품, 구마품, 시종품)을 받았다. 그리고 대품(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을 받을 준비를 계속했으나 6년 동안의 수도 생활로 체력이 소진되어 1862년 2월 27일 이솔라 델 그란 사소에서 결핵으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의 유해는 수도회가 이솔라 델 그란 사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 성당에 안치되었고, 지금까지 그곳에 남아 있다. 평소 철저히 규칙을 지키며 수도자로 생활했던 평범한 신학생이었지만, 사후에 그의 무덤에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성 가브리엘 포센티의 시복 절차가 1891년 테르니(Terni)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수 고난회는 그가 선종하고 4년 후인 1866년 이솔라 델 그란 사소 수도원을 폐쇄했고, 그가 묻힌 성당 또한 30년 가까이 방치하였다. 시복 절차를 위한 발굴을 위해 수도회에서 그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마을 주민들은 그의 유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수도회도 그의 유해를 그대로 두고 2년 후 이솔라 델 그란 사소 수도원 문을 다시 열고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성소(聖所)를 꾸몄다.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 성소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젊은이들의 순례지로 환영받았고, 그의 중재로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 중에는 성녀 젬마 갈가니(Gemma Galgani, 4월 11일)도 있었다. 그는 1908년 5월 31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13년 시성식을 거행할 예정이었으나 정치적 혼란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연기되었다가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0월 16일)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특별히 성 가브리엘 포센티를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가톨릭 청소년, 특히 수련자와 사제직을 준비하는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가톨릭 운동”(Actio Catholica, Catholic Action)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1959년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아브루초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이탈리아 테라모에 있는 그의 무덤 성소는 매년 수백만 명의 젊은이와 학생들이 방문하는 대표적인 순례지가 되었다. 1932년 교황 비오 11세는 그가 선종한 2월 27일에 축일을 기념하도록 로마 보편 전례력에 포함했으나 1969년 전례력 개정을 하면서 보편 전례력에서 빠지고 지역 교회 안에서 기념하도록 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27일 목록에 성 가브리엘 포센티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세상의 허영심을 모두 버리고 청소년 때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여 짧은 인생을 마감한 통고의 성모의 성 가브리엘 수사를 아브루초의 이솔라 델 그란 사소에서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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