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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프랑스 파리 뤼뒤박(1830년) (3-4) 뤼뒤박에서 발현한 무염시태 성모님과 레지오 마리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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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프랑스 파리 뤼뒤박(1830년) (3) 뤼뒤박에서 발현한 무염시태 성모님과 레지오 마리애 (1)
– (좌로부터) 로마 스페인 광장의 무염시태 성모상(1857년), 스페인 세비아 대성당 광장의 무염시태 성모상(1918년), 스페인 팜플로나 산 로렌조 성당 광장의 무염시태 성모상(1954년)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본인이 ‘원죄 없는 잉태(무염시태)’라고 하시며, 당신의 발현 모습을 새긴 메달을 몸에 지니면 은총을 받을 것이라 하셨다. 이후 무염시태로 불렸던 메달을 통해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이 메달은 기적의 메달로 불리게 되었다. 기적의 메달을 처음에는 목에 걸었지만 곧이어 패로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기적의 패(레지오 마리애 교본 부록 6)가 되었다. 또한 집이나 각종 모임, 성당 공동체에서도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성모상을 모시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런 와중에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성모님에 대한 3번째 교리인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하자 전 세계 주요한 성지마다 무염시태 성모상에 세워졌으며 신자들은 더 열광적으로 무염시태 성모상을 모셨다.
이런 배경하에 레지오 마리애(이하 레지오라 한다) 주회합의 제대에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무염시태 성모상을 모시게 된 과정, 벡실리움에 기적의 패가 포함된 내용, 까떼나에 뤼뒤박 성모님이 알려주신 무염시태 기도문이 들어간 내용, 레지오 마리애는 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지휘 아래 설립된 군대인가(제1장 명칭과 기원) 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레지오 주회합의 제대에 모신 뤼뒤박의 무염시태 성모상
이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레지오의 첫 주회합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교본 제1장 명칭과 기원에서는 첫 주회합이 저절로, 우연히 이루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첫 주회합 이전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프랭크 더프(이하 프랭크라 한다)에 대한 책자 등을 확인해 보면 첫 주회합이 있기 전까지 무려 8년이라는 준비 기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준비 기간을 통하여 레지오라는 새로운 단체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사전에 갖춰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프랭크에게는 평신도 단체를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영성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럼 첫 주회합까지 8년 동안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겠다.
– 마이러 하우스 2층에 있는 레지오 주회합실, 레지오의 전용 회합실이므로 항상 제대가 마련되어 있다.(좌) 프란치스코 거리에 있는 현재의 마이러 하우스의 외관(우)
1) 첫 주회합 D-8년(1913년)
프랭크는 24세 때, 1913년 10월 빈첸시오회에 가입하였다. 빈첸시오회는 1833년 4월 프랑스의 프레드릭 오자남이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정신과 활동을 계승하여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하여 만든 평신도 사도직 단체이다. 빈첸시오회는 아일랜드에도 전파되어 창설되었는데 그 당시 아일랜드의 빈첸시오회는 남성만으로 구성되어 봉사하는 단체였다.
2) 첫 주회합 D-7~5년(1914~1916년)
1914년 초 프랭크가 빈첸시오회에서 받았던 첫 임무는 영국인들이 운영하는 조반센터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조반센터란 가난한 사람들이 영국 성공회의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아침 식사를 제공받던 곳이었다. 프랭크는 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조 가벳를 만났는데 그는 조반센터에 대항하여 반 조반센터의 운영을 시도하였다. 조 가벳은 큰 마구간을 빌려 2층에 식사를 제공하는 공간을 만들었으며, 가장 큰 방에는 제대를 설치하고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무염시태 성모상을 구입하여 그 제대의 중앙에 배치하였다. 프랭크는 주말 저녁에 음식을 준비하고 주일에 음식을 제공하는 반 조반센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반 조반센터는 생각 이상으로 운영이 잘 되었지만 1916년 4월 부활절에 반란이 일어나자 군인 출신인 조 가벳이 다시 영국군으로 돌아가면서 폐쇄되었다. 이때 조 가벳은 무염시태 성모상을 프랭크 더프에게 주었고, 프랭크는 이 성모상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1916년 프랭크 더프는 ‘우리는 성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책을 집필하여 출간하였다.
3) 첫 주회합 D-4년(1917년)
프랭크가 소속되어 있던 성 니콜라오 빈첸시오 협의회의 회원 수가 증가하자 새로이 성 패트릭 빈첸시오 협의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으로 프랭크를 선임하였다. 프랭크는 빈첸시오회의 활동을 조정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한 달에 한 번 월례 회의를 갖는 관리 기관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어떤 부인이 낡은 건물을 기부하자 프랭크와 빈첸시오회 회원들은 이 건물을 잘 수리하여 새로운 빈첸시오회의 회관으로 사용하면서 ‘마이러 하우스’라고 불렀다. 프랭크는 월례 회의와 빈첸시오회와 관련한 모든 모임을 마이러 하우스에서 진행하였으며, 조 가벳에게 받은 무염시태 성모상을 ‘마이러 하우스’에 옮겨 놓았다.
4) 첫 주회합 D-2년(1919년)
프랭크는 봉사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여성 회원을 아일랜드 빈첸시오회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빈첸시오회의 회원은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그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 새로 입회한 여성 회원은 소수에 그쳤다. 그러나 이 소수의 여성들이 레지오 마리애의 첫 주회합을 주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연장자인 엘리자벳 커윈(첫 주회합 진행자)은 가입과 동시에 관리 기관의 월례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 지역 보좌신부인 토허 신부님(첫 주회합의 훈화 진행)도 참여하였다.
– 원래 마이러 하우스의 건물터(현재 마이러 하우스의 뒤쪽에 위치한다). 현재의 마이러 하우스는 1971년에 새로이 건립된 건물이고, 원래의 마이러 하우스는 노후화가 심하여 철거되고 지금은 건물터만 남아있다.(좌) 건물터에 남아있는 명판에는 “레지오 마리애가 1921년 9월 7일에 시작된 장소”라고 적혀있다.(우)
5) 첫 주회합 D-17일(1921년 8월 21일, 주일)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가 저술한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이 주는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모임이 있어야 한다는 회원 다수의 의견에 따라 프랭크 더프는 첫 번째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모임을 진행하고 토론하였으며, 참석한 회원들은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6) 첫 주회합 D-10일(1921년 8월 28일, 주일)
8월 월례 회의(오후 4시 30분에 시작)에서 매트 머레이가 더블린 유니언 병원의 부인 암 병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아주 인상적으로 보고하였고, 참석한 회원들은 모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병원 방문 봉사는 모두 남성 회원이 맡고 있었기에 여성 환자에 대한 봉사와 지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월례 회의 후에는 항상 다과 시간(레지오의 2차 주회)이 있었는데 두 명의 여성 회원이 프랭크와 토허 신부님에게 여성 회원들이 여성 환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고, 프랭크는 이에 찬성하며 좀 더 많은 여성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그러자 두 여성은 바로 다과에 참석한 여성 회원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모두 여섯 명의 여성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프랭크는 마이러 하우스에 모임이 없는 그다음 주 수요일 저녁 8시에 병원 봉사 출정식과 비슷한 첫 모임을 갖기로 결정하였으며, 토허 신부님과 엘리사벳 커윈도 참석하기로 하였다.
7) 첫 주회합 D-7일(1921년 8월 31일, 수요일)
첫 모임 일주일 전에 예비모임이 열렸으며, 이 자리에 참석한 여성 회원은 병원 봉사에 관심이 있는 여성을 추가로 모집하기로 하였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첫 모임의 진행과 준비에 대한 사항도 협의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예비모임은 2011년에 피놀라 케네디가 출간 한 책 ‘프랭크 더프’에서 언급되었다.
8) 첫 주회합 D-0일(1921년 9월 7일, 수요일)
본 내용은 다음 11월 호에 이어집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0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성모님 발현과 레지오] 프랑스 파리 뤼뒤박(1830년) (4) 뤼뒤박에서 발현한 무염시태 성모님과 레지오 마리애 (2)
– 빈첸시오회 회합의 제대에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성상이 모셔져 있다.
8) 첫 주회합 D-0일(1921년 9월 7일, 수요일)
프랭크와 토허 신부님, 그리고 13명의 여성이 오후 8시 마이러하우스에서 열린 병원 봉사를 위한 첫 회합에 참석하였다. 프랭크와 토허 신부님, 여성 참석자 중 엘리사벳 커윈과 5명의 여성은 이미 벤첸시오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여성 7명은 빈첸시오회 회원이 아니었고, 여성만으로 회합을 진행하고 봉사를 한다는 것은 아일랜드 빈첸시오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므로 빈첸시오회의 이름으로 회합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프랭크와 참석자 모두가 이런 특별한 상황을 인지하였고 이에 대한 어떤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회합에서 우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제대를 어떻게 꾸미고, 회의의 진행을 어떻게 할 것 인가였다. 빈첸시오회에서는 회합 때마다 제대를 차렸을 뿐만 아니라 당시 가톨릭 내 모임에서도 제대를 만들어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다만 그 제대를 어떻게 꾸미느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빈첸시오회에서는 제대에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성상을 가운데에 모시고 양쪽에 촛대를 설치하였다. 총 참석자 15명 중 8명은 이러한 제대에 익숙해 있었지만 빈첸시오회의 회합이 아니므로 빈첸시오의 성상 말고 다른 성상이 필요했다.
– 첫 회합 때의 제대가 아일랜드 꼰칠리움에 보관되어 있다. 벡실리움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며 장기간 보관을 위하여 조화가 설치되어 있다.
이때 프랭크가 조 가벳에게서 선물로 받아 4년 전 마이러하우스에 모셨던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무염시태 성모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참석자들은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워낙 강했던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이라 무염시태 성모상을 새로운 회합의 제대에 모시는 것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첫 회합의 참석자들이 간절하게 필요로 할 때 성모님은 무려 4년 동안 그 자리에서 오늘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당시 제대를 꾸몄던 알리스 키오프는 첫 회합을 축하하기 위하여 꽃을 준비해와 2개의 화병에 나누어 꽂고 제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로써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무염시태 성모상과 2개의 촛대, 그리고 2개의 화병까지 완벽한 제대가 완성되었다.
첫 회합의 진행은 기존 빈첸시오회의 월례회의 진행과 거의 유사했지만 시작기도 후에 묵주기도를 포함시킨 것이 달랐다. 4년 전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나는 묵주기도의 성모님”이라고 하시며, 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성모님 발현 1년 후에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경우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따라서 첫 회합에서 묵주기도를 드리게 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제대에 모신 성모상과도 일치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 아일랜드 꼰칠리움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 멀리 보이는 붉은색 벽돌 건물이 꼰칠리움이며 그 앞에도 무염시태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좌) 꼰칠리움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보이는 창문이 주회합실 겸 사무실의 창문이다.(우)
참석자들은 묵주기도를 드린 후 영적 독서를 하고, 무염시태 성모상으로 나타나 계신 성모님의 주관 아래,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토허 신부님의 훈화와 강복으로 회합을 마무리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레지오 주회합의 원형이 될 수 있었다.
이날 첫 회합에서 결정된 주요한 사항은 첫째, 새로운 봉사에 대한 정보 교환이 매우 중요하므로 매주 회합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주회합이 확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둘째, 여성 병동의 봉사를 위한 모임이므로 프랭크 외에는 남성을 입단시키지 않기로 하였으며 남성 위주의 빈첸시오회의 활동과 겹치는 활동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셋째, 회합의 명칭을 ‘자비의 모후’로 결정하였다. 자비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병동을 방문하여 봉사하기에 이런 이름을 지었지만 향후 만들어지는 모든 모임이 성모님과 관련한 이름으로 짓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넷째, 향후 제대의 구성과 회합의 진행을 첫 번째 회합과 똑같이 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2. 주회합에 무염시태 기도문이 포함되게 된 과정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다음과 같은 무염시태 기도문을 직접 가르쳐 주셨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매달리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 기도문은 기적의 패 앞면 가장자리에 표시되어 있으며, 현재 레지오의 기도문인 까떼나에도 포함되어 있다. 까떼나는 사슬, 고리라는 뜻으로 단원과 성모님과의 연결고리가 되는 기도라는 의미로 단원이라면 누구나 날마다 바쳐야 한다. 그리고 기도문의 내용이 성모님께 전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가톨릭 신자들은 언제든지 화살기도 하듯이 이 무염시태 기도문을 바쳤다. 당시에 이렇게 일반화된 기도문이다 보니 이 무염시태 기도문이 첫 회합에서도 바쳐진 것이다.(교본 317쪽)
– 벡실리움의 앞면과 뒷면. 벡실리움 뒷면의 기적의 패에서 성모님을 상징하는 M자와 예수 성심, 성모 성심을 볼 수 있다.
첫 회합에서 누구에 의하여 어느 시점에 기도문을 바쳤는지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너무나도 일상화된 기도문이라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제대에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무염시태 성모상이 모셔진 데 이어 발현하신 성모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 첫 회합 때 바쳐져서 까떼나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신비스러운 일이다.
3. 레지오 벡실리움(군기)에 뤼뒤박 기적의 패가 포함되게 된 과정
프랭크는 모임 초기에 전혀 알지 못했지만 회합에 참여한 모든 단원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희생과 헌신을 하는 모습을 보고 몽포르의 루도비코 마리아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에서 예언한 성모님의 군대가 바로 이들에게 한 예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1925년 11월 15일 프랭크는 군대 조직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충성심이 높은 로마 군단을 성모님 군대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여 드디어 ‘레지오 마리애’라는 명칭이 탄생하였다.
모든 군대에는 군대의 단결을 상징하는 군기를 보유하고 있다. 프랭크는 모임을 총괄하는 이름을 로마 군단에서 따왔으므로 레지오에서 사용할 군기도 로마의 군기를 변형하여 만들었다. 우선 로마 군기의 맨 상단에 위치한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 대신에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를 배치하였다. 그다음 독수리 아래에 있던 황제의 초상 위치에는 무엇이 좋을지 여러 대상을 구상하던 중 당시 신자들이 몸에 지니고 신앙생활을 하였던 기적의 패를 선택하여 레지오 마리애라고 적힌 표찰과 함께 기적의 패를 배치하였다.
– 꼰칠리움 내 상설 주회합 장소 겸 사무실. 제대 뒤쪽에 첫 회합 때의 제대가 유리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4. 무염시태 성모님의 지휘를 받는 레지오 마리애
무염시태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원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되었음을 의미하는 단어로 무염시태 대신에 원죄 없으신 잉태 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으로 풀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무염시태는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고 초대 교회부터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이어져 내려왔으며, 이에 관련된 의견이 너무 다양하게 제기되다 보니 한때 교황은 무염시태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1830년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나는 원죄 없는 잉태”라고 말씀하시자 다시 무염시태를 교리로 정하자는 의견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드디어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무염시태를 교의로 선포하였으며 이날은 무염시태 성모 대축일이 되었다.
뤼뒤박에서 발현하신 무염시태 성모님이 제대 중앙에 자리 잡고 계시며, 성모님 바로 옆 레지오 군기에는 뤼뒤박 기적의 패가 들어가고, 주회합에서는 뤼뒤박의 무염시태 기도를 바치니 뤼뒤박에서 발현한 성모님이 레지오 주회합을 완전히 지배하여 이끌어 가시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본 제1장의 ‘레지오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님의 강력한 지휘 아래, 세속과 그 악의 세력과 맞서는 교회의 싸움에 참가하기 위하여 설립된 군대이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합당한 설명이라고 할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1월호, 최하경 대건안드레아(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 1 14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