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일)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부활, 놀라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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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2-05 ㅣ No.904

[레지오 영성] 부활, 놀라운 시작!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의 뒤를 이어서 이 세상에서 배척을 받고 고난을 겪게 될 제자들이 당신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얻도록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고하신 대로 수난을 당하셨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수난의 신비는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삶과 죽음에 새롭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 주었고, 당신의 부활은 바로 그 고난의 결실, 십자가의 영광으로서 우리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꺾이지 않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와 고통과 죽음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훨씬 강하고 위대하며, 그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는 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는 이제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위대한 표징이요 모범이며, 생생하게 살아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여, 이웃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의지를 우리 안에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활은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시며 하느님을 온전히 믿으셨던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에게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건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들도 일찍이 세 차례나 분명하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한 예고 말씀을 들었지만, 부활에 대한 지각은 아예 없었던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수난에 대해서는 거부반응도 보였고, 슬프고 두려운 분위기에 잠기기도 하였지만, 부활에 대해서는 차후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의심과 불신의 모습을 여실히 담고 있으며, 이러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꾸짖기도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해 제자들을 교육시켜

 

성경에 기록된 부활사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많은 경우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그들이 알아볼 수 없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그고서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발현하실 때에는 그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공생활의 그 예수님 모습으로 나타나신 듯합니다. 제자들은 당신의 손과 발, 옆구리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유령을 보는 것만 같아서 기쁨과 두려움이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완고한 불신에 사로잡힌 토마스에게 발현하실 때에도 상처 입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발현사화에서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신 듯합니다.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했고 십자가 아래에까지 그분을 가깝게 따랐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분의 빈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막달레나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였고, “마리아야!” 하고 따뜻하게 불러주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과는 뭔가 다른 모습으로 막달레나에게 발현하신 듯하며, 단지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그분의 정다운 목소리가 부활하신 그분의 현존에 대한 인식을 막달레나에게 일깨워준 것 같습니다.

 

안타까움과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발현하신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고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접근하시고 대화를 나누시면서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께서 식탁에서 빵을 쪼개어 이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에 비로소 이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오천 명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던 인자하신 그분의 모습을 다시 만나기까지 그분께서는 이들의 눈을 가리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16,1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분의 어떤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헛수고에 지친 일곱 제자에게 발현하신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며 인사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그들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이르신 대로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서야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뭍에 내려서 보니 그분은 숯불 위에 고기를 굽고 계셨는데, 제자들 가운데 아무도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요한 21,12 참조) 제자들이 그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뭔가 달라진 그분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 각자에게 그분을 알아보게끔 하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하시면서 계속 제자들을 교육하시고 믿음을 깊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께서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시대와 민족과 언어와 나라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의 주님이 되시고,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메시지는 나와 너, 우리와 너희를 갈라놓는 여러 가지 장벽들, 숱한 편견과 차별을 한 분이신 주님 안에서 허물어 내리는 해방과 자유의 메시지입니다.

 

 

레지오 단원들에게 부활은 행복한 종결이 아니라 놀라운 시작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무엇보다도 위로자이신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결코 당신 부활의 권능을 과시하시거나 당신 적대자들을 위협하시지 않고, 오로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당신의 사명을 계속하시며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시며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과연 “하느님의 전능은 자신을 지우는 전능”입니다. 자기 과시나 지배의 힘이 아니라 자신을 지우고 비우고 죽이기까지 하시는 겸손, 영원한 사랑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이렇게 불러주시고 또 파견하십니다. 의심과 불신의 제자들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도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하고 파견하시며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주님의 마지막 유언을 받들고자 투신하는 레지오 단원들에게 부활은 행복한 종결(Happy Ending)이 아니라 놀라운 시작(Amazing Start)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2월호, 안정호 이시도르 신부(이주노동자지원센터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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