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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어떤, 교회: 순교자들 위에 세워진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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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회] 순교자들 위에 세워진 교회
9월입니다. 순교자 성월이죠. 한국교회는 무수히 많은 순교자의 피와 땀 위에서 세워졌기에 이번 한 달간 순교자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우리도 일상에서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자 다짐합니다. 순교라 하면 단순히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걸로 생각합니다. 살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인데 어떻게 당당하고 용감하게 죽을 수 있었는지 감탄하며 우리는 순교자들을 ‘영웅’처럼 생각하게 되죠.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은 그리스도교의 대속교리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고, 대속은 속죄와 얽힙니다.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신적 섭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존귀한 죽음이라는 것을 새기며 순교자들 역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속과 십자가 죽음 사이에는 거대한 균열이 있죠.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냐고 울부짖었던 신(神)입니다. 이런 신의 무력함과 자기 제한, 틈과 균열이 그리스도교 신론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텅 비어 있고 틈과 균열을 포함하고 있는 신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화려한 포장지가 벗겨진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죠.
믿음과 순교 사이에도 어떠한 균열과 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수많은 체험을 하고 특별한 체험은 보존하고 다시 이야기로 그려냅니다. 그 체험의 기억은 사람들의 가치 판단이 개입되고 그렇게 하나의 역사가 되는 것이죠. 우리 교회의 순교 역사는 폭력과 함께합니다.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권력의 가학과 피학의 굴레 안에서 순교는 벌어졌고 그것이 무의미가 아니라 그분의 섭리 안에 있기에 우리는 역사 너머의 신앙을 봅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에 폭력이 어떻게 작용했고, 순교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폭력을 피해 살아가려고 했는지, 결국 끝내 어떻게 견뎌 내면서 목숨을 바쳤는지 성찰이 없다면 순교는 모르는 사이 미화되어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행복에 대해 쉽게 말하고 그 삶을 본받자 말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구의 유명한 한티순교성지가 있죠. 그곳은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입니다. 교우들은 살아남기 위해 산골짜기로 피신해 살다가 그곳까지 쫓아온 포졸과 살수들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36기의 무덤이 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유입니다. 성지를 조사하며 무덤을 열었을 때 주검에선 군졸들의 병장기에 의한 상흔이 발견되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신체 뒤(등이나 뒤통수)에서 발견됐다고 하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치다 (죽는 순간 천주님께 자신을 맡기며) 죽었고, 도망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아와 죽은 사람들을 보고 (천상행복을 기리며) 묻어 주었을 겁니다.
우리는 한티라는 곳에서, 또는 여러 순교자들의 숨결 앞에서 많은 부분을 생략한 채 그분들이 죽음을 의연히 받았고, 용감히 목숨을 바쳤다고만 기억합니다. 그분들의 아픔과 고민은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았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천주님을 모시며 엄혹한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고, 몸부림쳤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우리는 순교의 영성을 살자며 순교자를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을 순교자들처럼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말로 결론을 맺게 될 때, 어쩌면 이 땅의 폭력과 고통이 가려지고 모든 불화와 차이와 거리를 일방적으로 믿음과 신앙으로 수용하자라는 결과로 귀결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오늘의 순교 영성은 여러 폭력과 고통 앞에서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묻고 찾습니다. 순교는 결국 폭력을 거부한 것이고 탓을 묻지 않는 것이니, 지금의 교회는 순교자의 행복을 이야기하기보다 폭력의 굴레를 끊어 버리고, 폭력을 예방하는 방향으로 재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순교와 믿음 사이에 있는 수많은 균열과 틈 안에서 이 시대의 어떠한 폭력이 우리의 삶을 억압하고 앗아가려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게 우리 교회의 순교 영성이길 희망해 봅니다.
[월간 빛, 2024년 9월호, 박태훈 마르티노 신부(성김대건성당 보좌)] 0 5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