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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7세기 초 일본교회 조선인 복자 빈센트 가운의 순교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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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1-09 ㅣ No.1754

[특별기고] 17세기 초 일본교회 조선인 복자 빈센트 가운의 순교 여정

 

 

1600년경 동아시아 가톨릭 전래 상황

 

1600년을 전후한 시기, 동아시아 3국의 가톨릭 전래 상황을 살펴보자. 먼저 일본은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후 40년이 지난 1588년 일본의 독립 교구로 분고 후나이(豊後府内)교구가 설정된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지난 1610년 루이스 세르게이라(Luis Cerqueira, 1552~1614) 주교 때에는 규슈는 물론 오사카 · 교토 · 에도 · 가나자와 · 야마가타 등 일본 각지에 약 30~40만 명의 신자와 100명이 넘는 서양 선교사, 그리고 10여 명의 방인(일본인) 사제가 활동하는 전성기를 맞았다. 한편 중국은 예수회 동인도 순찰사 발리냐노의 제자인 미셀 루지에리(Michael Ruggieri, 羅明堅, 1543~1607) 신부가 1580년에, 이어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 신부가 1582년에 중국에 도착해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루지에리 신부는 1584년 『천주실록』을, 그리고 마테오 리치 신부는 1603년 『천주실의』를 집필했는데, 이는 모두 일본과 중국 선교를 비롯한 아시아 선교의 책임자로 1586년 『일본의 카테키즈모』를 집필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范禮安, 1539~1606) 순찰사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교리서이다. 한편 조선에는 아직 가톨릭이 전래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훗날 『천주실의』 · 『칠극』 등 한역 서학서가 조선에 전해진다.

 

이 시기에 임진왜란의 전쟁포로로 잡혀 온 조선인 중에는 일본 규슈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많은 조선인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특히 나가사키에는 약 2천 명 정도의 조선인 신자가 성 로렌소 성당을 세우고 독실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이들 중에는 박해 시기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17세기 초 나가사키 조선인 신자의 생활과 신앙」, 『교회와 역사』 585호[2024년 2월호], 22~28쪽 참조). 이들 순교자 중에는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서양 선교사를 돕는 슈쿠슈(宿主, 주거 및 식복사), 도주쿠(同宿, 카테키스타 전도사), 이루만(예수회 정식회원, 수도사),1) 탁발수도회 재속 제3회원, 신심회 지도자 등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인 복자 빈센트 가운

 

이런 가운데 특히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온 빈센트 가운(1580~1626)을 주목하고자 한다. 당시 일본군 제1진으로 부산에 상륙한 그리스탄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진영의 군종으로 파견된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 신부와 일본인 수도사 한칸 레온(1538~1627)이 일본으로 돌아가던 중, 대마도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이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인이던 고니시 마리아의 집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조선인 소년 한 명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가 바로 ‘빈센트 가운’이다. 가운은 그의 성이 권(權)이나 강(姜)이라는 주장도 있고, 조선의 출신 지명이 가온(佳恩)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불분명하다. 기록에 나오는 표기도 加運. 加嘉, 賀兵衛, Caun2) 등 다양하다. 단, 세례명은 에스파냐어로 ‘빈센테’인데, 고니시의 가신으로 가운을 보호하고 돌봐준 가신 히비야 효에몽(日比屋兵右衛門)의 세례명이 빈센테다. 이 글에서는 ‘빈센트 가운’으로 표기를 통일하였다. 관련 자료를 정리해서 만든 가운의 이력은 아래의 〈표〉와 같다.

 

가운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예수회 수도자로 육성한 모레혼 신부의 서간에 의하면, 가운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3,000명의 병력을 지휘한 무관 장수의 아들로 양반 출신이었다(「조선인 신자들의 은인, 베드로 모레혼 신부를 아시나요?」 1~3, 『교회와 역사』 567~569[2022년 8~10월호] 참조). 가운은 일본군이 한양성을 점령했을 때 12세에 포로로 잡혀 와 규슈 시키(志岐, 현 구마모토 아마쿠사)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운은 영특하고 언어와 문장에 탁월하여 아마쿠사의 예수회 신학교(세미나리오)에서 공부했고, 모레혼 신부의 지도 아래 성장하였다. 성신앙의 요강(要綱)을 숙지하고 선교사나 이루만(수도사)을 대신해서 같은 조선인 신자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 도주쿠(同宿)로 생활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신학교 입학은 자식을 일생 교회에 봉헌하겠다고 부모가 서약한 무사 집안[武家]의 15세 이상 자제에 한한다는 규정에 비추어 보면, 전쟁포로인 가운의 경우는 대단히 이례적이다.

 

가운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긴 지란 로드리게스(Girão Rodrigues, 1558~1628) 신부의 서간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확인된다. 가운은 12살에 포로로 잡혀 와 13살에 아마쿠사 시키(天草志岐)에서 세례를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도주쿠로 활동하였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가운은 양반 자제로서 조선에서 이미 천자문은 물론 사서삼경을 공부했을 것이고, 서양 선교사들이 악마의 문자라고까지 기피한 한자와 일본어를 완전하게 습득한 그의 신통방통한 총명함에 놀랐을 것이다. 또한 서간에 의하면 가운은 1612년 예수회의 파견으로 조선 선교를 준비하

 

기 위해 7년간이나 중국에 체재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왔고, 1619년에는 다시 마카오로 파견되었다. 필자가 일본교회 역사 속에서 많은 조선인 순교자 중 유독 가운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본격적으로 예수회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지도·육성되었고, 예수회 방침에 따라 중국 대륙과 마카오로 파견되고 나가사키를 오가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예수회의 조선 선교를 준비하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어린 나이에 전쟁포로로 잡혀 와 부모 형제, 고향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고, 끝내는 순교로 삶의 여정을 마감한 가운의 삶을 되새겨 보게 된다.

 

모레혼 신부의 서간에 의하면, 1619년 가운의 마카오 파견은 이루만으로 예수회 정식 입회를 위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사제 교육을 받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카오에 체재하던 중 일본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일본 국내의 많은 선교사와 이루만이 순교하게 되자, 1620년 예수회에서는 가운을 다시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이렇듯 가운은 1612년 예수회와 선교사의 방침과 지시에 따라 중국으로 파견되어 장기간 체재하면서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배웠고, 조선 선교를 위해 조선 입국을 준비하면서 예수회 사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북경, 마카오, 나가사키를 오가다가 1620년 이후에는 시마바라(島原) 아리마(有馬) 지역에서 바티스타 졸라(Giovanni Battista Zola, 1575~1626) 신부 등 선교사를 도와 포교 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1625년 12월 신자의 밀고로 시마바라 구치노즈(口之津)에서 체포되어, 1626년 졸라 신부와 프란치스코 파체고(Francisco Pacheco, 1565~1626) 신부 등 다른 8명과 함께 나가사키 니시자카(西坂)에서 화형으로 순교3)하였다. 그리고 1624년 순교한 조선인 신자 카이요(1572~1624)와 함께 일본교회 205인 순교 복자에 포함되어 1867년 5월 7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 시기 가운과 카이요에 관한 예수회 신부의 기록은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1792~1835) 주교의 서간에도 인용되고 있다.4)

 

 

예수회의 중국 선교 활동과 빈센트 가운

 

그러면 가운이 중국과 마카오를 오간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과의 접점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먼저 1600년대 루이스 세르게이라 주교인데, 그는 1600년 전후 임명된 4명의 주교 중 실질적으로 일본에 착좌한 주교로서, 1598년부터 15년 이상 15만 299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일본의 교세 확장을 위해 진력했다. 재임 기간 중 신학생 육성에 힘쓰고 8명의 일본인 방인 사제를 서품했으며, 순교자의 조사 기록을 남기도록 하고, 매년 장엄한 성체행렬을 실시하는 등 실질적인 일본 선교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는 그리스탄 영주와 가신들에게 포로 및 노예로 잡혀 온 조선인 신자의 신분 해방을 권유하고, 조선인 세례를 권장하는 등 조선인 신자들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다. 실제로 노예 매매를 자행하는 포르투갈 상인을 파문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영주 고니시(小西)와 휘하 가신단의 그리스탄 장수들이 주교의 조선인 노예해방 권고에 따름으로써, 해방된 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나가사키에 모여 정착해서 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회에서 육성한 가운은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빈센트 가운이 중국과 마카오에 체재한 1612~1919년 사이의 일본과 마카오 사정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즉 세르게이라 주교 사후 일본교회는 에도 막부의 박해와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주교 부재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발렌테 주교는 일본 내 박해의 격화, 일본과의 무역 관계를 심려해서 에도 막부를 자극하는 것을 원치 않는 마카오 당국의 만류, 수도회 간의 대립 등을 배경으로 마카오에 도착해서도 수년간 일본으로 도항하지 못하고 착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교회 내부에서는 7인의 일본인 사제의 선거로 예수회 디에고 갈바리요(Diego de Calvalho, 1578~1624) 신부를 주교를 대신하는 총대리로 선출했는데, 이에 대해 도미니코회와 아우구스티노회가 비합법 선언으로 반대하고, 도미니코회 모랄레스(J.B. Morales, 黎玉范, 1597~1664) 신부를 총대리로 선출해서 수도회 간의 분열과 대립이 심해졌다. 예수회는 새로운 방인 사제의 서품을 불허하는 결정을 하고, 예수회 소속 신학생과 도주쿠 중 일부는 예수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탈퇴5)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1614년 일본 국내 금교령이 내려지고 가톨릭 탄압 박해가 본격화하면서, 많은 서양 선교사와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 1552~1615) 등이 마카오와 필리핀으로 강제 추방되는 시기와도 겹친다. 이러한 긴박한 시기에 빈센트 가운이 중국 선교를 지원하면서 조선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북경 · 마카오 · 나가사키를 오간 것은, 결코 독단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사안이며, 궁극적으로 예수회의 내부 사정과 방침에 따른 파견과 활동이었던 것이다.

 

또 주목하고 싶은 인물로는 빈센트 가운이 중국 대륙에 체류한 1612~1618년의 7년간, 북경에서 가운과 중국에 사신으로 오간 허균(許筠, 1569~1618)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과의 접점을 지적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간 반역아, 이단으로 처형된 허균은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수도 연경(燕京, 북경)을 다섯 차례(1608년, 1610년, 1612년, 1614년, 1615년)나 왕래했고, 체류 기간 중 많은 학자와 시문으로 교류하면서 진귀한 서적과 유불 경전을 입수하여 조선으로 보냈다. 이 중에는 서양 지도와 천주교 성가, 기도서 등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중국 대륙이 명청 교체기로 혼란한 시기에 가운과 허균은 마테오 리치가 세운 북경 남당(南堂)을 방문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북경에서 허균이 천주교를 접하게 되고,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중국에 온 수도사 빈센트 가운을 만났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또한 북경을 오간 허균과 사절 수행원들에게 일찌감치 중국의 천주교 서적(한역 서학서)을 전하고 조선에 소개하고 반입하면서, 조선 선교를 도모한 가운과의 접점은 없었을까? 이 과정에는 예수회 회계 책임자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1610년 일본에서 추방된 후 마카오와 중국을 왕래한 일본통 요한 로드리게스6) 신부가, 특히 1613~1615년 중국 대륙에 들어가 중국 각지를 시찰하고 선교 활동을 전개했는데, 가운은 로드리게스 신부와 동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세르게이라, 로드리게스, 가운, 허균의 접점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갈바리요 신부의 경우도, 1598년 마카오에 도착한 후 다년간 마카오의 콜레지오 원장을 지내다가 1613년 일본 예수회 관구장으로 입국하지만, 1614년 세르게이라 주교의 선종과 선교사 추방령으로 다시 마카오에 체재하면서 1615년부터 중국으로 들어가 활동한다. 이 시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운의 중국 체재 시기와 중복되는 시기로, 가운은 이렇듯 로드리게스 신부, 갈바리요 신부 등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일본에서 순교로 생을 마쳐 궁극적인 조선 선교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빈센트 가운의 나가사키 · 마카오 · 중국에서의 활동과 삶, 순교의 여정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더 갖고 관련 자료의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17세기초 일본, 중국, 조선을 동아시아 3국의 큰 틀에서 상호 연관된 구도 안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 글과 관련한 더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인터넷 카페(https://cafe.naver.com/nagasakidiary) 글을 참조 바란다.

 

 

[참고문헌]

 

가타오카 야키치(片岡弥吉), 『일본그리스탄

순교사』, 토모(智)서방, 2010.J.G. 루이스 메디나, 『遥かなる高麗(머나먼 고려)』, 곤도(近藤)출판, 1988.

사쿠마 타다시(佐久間正), 『남만인(南蠻人)이 본 일본』, 토모서방, 1978.

가와사키 모모타(川崎桃太), 『프로이스가 본 전국시대 일본』, 중앙공론신서, 2006.

안노 마사키(安野真幸), 『교회령 나가사키』, 고단샤(講談社) 선서, 2014.

다마키 유즈루(玉木譲), 『아마쿠사 가와치우라 그리스탄史』, 신인물왕래사, 2013.

에비사와 아리미치(海老沢有道), 『일본 그리스탄史』, 하나와(塙)서방, 1966.

고노이 타카시(五野井隆史), 『그리스탄의 문화』, 요시카와 고분칸(吉川弘文館), 2012.

기타노 노리오(北野典夫), 『아마쿠사 그리스탄史』, 요시(葦)서방, 1987.

세노 세이치로(瀬野精一郎), 『나가사키현의 역사』, 야마가와 출판사, 1972.

나가사키 문헌사 편, 『여행하는 나가사키학-그리스탄 문화 1, 2, 3, 4, 별책』, 2006.

나가사키 교회군 정보센터 편, 『탐방(探訪) 나가사키의 교회군(群) 시리즈』 5, NCIC, 2018.

나가모리 미츠노부(長森美信), 「임진 · 정유란의 조선 포로(被擄人)」, 『천리학보』 7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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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주쿠는 수도회 정식 회원이 되기 전의 전도사이고, 이루만은 정식으로 순명·청빈·정결 서원을 하고 수도회에 입회한 성직자로서 평수사 내지는 조력 사제(平修士, 助修士)에 해당한다. 예수회 이루만은 포르투갈어로 형제를 의미하는데, 사제 파드레(padre, 伴天連)를 보좌하는 수도사를 이루만이라 칭한다. 통상 이루만은 2년이 지나면 파드레로 서품되는 서열 위계가 일반적이었다.

 

2) 예수회 신부 서간에는 Kwan, Quon이 아니라 Caun으로 표기되어 있다.

 

3) 2012년 3월 8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 100회, 「임란 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당했나?」.

 

4) 안정원, 「19세기 파리 외국선교회의 조선 정보」, 『아오야마 경영 논집』, 2021. 12.

 

5) 마카오에는 1614년 금교령 이후 추방된 일본인 도주쿠와 이루만이 50명 이상 체류했는데, 이들의 사제 교육 · 육성 · 서품을 두고 예수회 내부에서는 심한 대립과 이견이 있었고, 실제로 더 이상의 일본인 사제 육성과 서품에 반대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이루만은 예수회 거점인 마카오를 탈출하여 필리핀 마닐라로 가서 탁발수도회에 입회하거나, 아니면 직접 로마로 가서 교구 사제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특히 기베(岐部) 가스이는 인도 고아를 거처 페르시아를 건너 도보로 일본인 최초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로마로 갔으며, 또 다른 두 명은 인도 고아에서 배를 타고 희망봉을 돌아 로마로 갔다. 이들 세 명은 각각 1621, 1622, 1623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중 한 명인 고니시(小西) 만쇼는 임진왜란의 그리스탄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마리아)과 쓰시마 영주 소 요시토시(宗義智)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로, 마지막으로 순교한 사제다.

 

6) 요한 로드리게스(João Rodrigues, 陸若漢, 1561~1633) 신부는 33년간 일본 생활을 하고 정치적 이유로 1610년 일본에서 추방되었고, 마카오로 건너가 중국 대륙을 오가며 23년간 중국 선교를 하였다. 1630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 조선의 사신단 정두원(鄭斗源, 1581~?)과의 만남을 통해 서양 천문, 화포, 마테오 리치의 서책, 지도 및 『직방외기(職方外紀)』 등을 조선 국왕 인조에게 선물했다고 전한다.

 

[교회와 역사, 2024년 6월호, 글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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