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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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신앙] - 생활성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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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성 [rubycat] 쪽지 캡슐

2014-07-01 ㅣ No.176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책 보러가기 : http://www.biblelife.co.kr/goods/content.asp?guid=11235&cate=15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쉽게 흔들리는 이유와 그 답을 제시한 책!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는 있지만 교회의 가르침이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적용되는 메시지로 느껴질 뿐 세상 삶과는 별개로 느껴질 때가 많다.


이 책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확실한 신앙관이 정립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는 신자, 교회의 가르침을 이성과 과학적 사고로 이해하려 하지만 비합리적으로만 생각되어 의문을 품고 지내온 신자, 그리스도인의 의무만을 다한 채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며 기쁨 없이 살아가고 있는 신자 모두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본질을 제시하고 신앙의 기쁨을 절실히 깨닫게 해줄 것이다.

 

이 책은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의 강연 원고 및 미간행 수고들을 모아 그의 사후에 출간한 을 번역한 것으로 풍부한 학식을 지닌 저자의 신학적, 철학적, 인간학적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다양한 각도로 이해하게 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신앙의 눈을 뜨게 한다.

[ 책 속에서 ]


어째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존재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인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면서 온전히 인간인 인간이 있다. 복음서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시라고 거듭 말한다. “죄만 빼고”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바로 죄인이 아니기에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신 것이다.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하느님이신 인간 종족의 한 사람, 인간 족속의 한 구성원이 있다면, 우리가 모든 인간 속에 하느님인 그 존재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은 당연하다. 한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것은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신비, 인간의 의미, 인간적 삶의 의미는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처럼 될 수 있는 본질적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있다. -33쪽


하느님에게는 사랑의 힘 이외에 다른 힘이 없으시다. 그래서 하느님이 어떤 존재신지 우리에게 계시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는 것에 동의하심으로써 사랑의 전능함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다. 올리브 동산에서 체포되셨을 때 예수님은 친히 천상 군대를 불러 병사들의 손에서 당신을 구해 내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랬더라면, 우리에게 가짜 하느님을 보여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죽음까지 감수하시는 참된 하느님 대신 전능한 하느님을 보여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 보여 준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짓이기고 지배하는 전능함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저 위의 영원 속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할 때의,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런 힘이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분은 사랑이실 뿐이지만, 그 사랑은 전능하다. -41쪽


하느님은 전능하시나, 그 전능은 사랑의 전능이다. 아무 힘이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실 수 있다. 하느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다. 하느님은 파괴하실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믿는다. 나를 창조하신 분은 나를 파괴하지 않으실 것이다. -267쪽


모든 죄의 특성은 파열波列을 불러일으켜 인간관계를 흔든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살면,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릇된 관계가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음행만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예쁜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는 쾌락의 대상으로만 보일 것이고,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고, 형제애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죄 중 가장 작은 것도, 타인의 양심을 들쑤시어 악을 선동한다.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나는 다른 이에게 나와 똑같이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된다. 내가 쾌락을 추구할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행동하라고 자극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죄짓고자 하는 경향이 인간의 양심 속으로 스며드는 통로가 된다. -305쪽


영적인 몸이란 자유에 도달한 인간을 표현한 말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닌 모든 것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죽음과 대면할 수 있을 때-모든 종류의 이기주의의 죽음에 맞설 수 있을 때-자유롭다. 고요, 안락, 특권의 소유, 세상의 뻔뻔스러운 불평등에 대한 속 편한 동의 등이 이기주의의 형태들이다. 인간은 이 모든 것에서 능동적으로 죽을 때, 즉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일할 때 자유롭다. -341쪽


너희가 내 제자이고 싶다면, 너희는 괴로워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고문당하고 살해된 사람들을 아스팔트 위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끝까지, 인간이 겪는 가난과 불의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오늘날 길 위에서 상처 입은 유다인이 누구인가? 그는 어디에 있나? 강도들은 어디에 있나? 강도들이 강도짓을 하지 못하도록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진정한 질문이다. 이것은 현실적 문제 자체다.


그리스도인은 상처 입었거나 병든 가난한 이의 불행을 동정하는 데서 그칠 수 없다. 그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강도를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은행에서, 법무부 중앙 행정처에서, 거대한 상업적 관계 안에서 등등.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 깊이 성찰해 보고, 자신의 편견 그리고 자기가 누리는 특권을 지키려는 배려마저 비판에 부쳐 보는 데 동의해야 한다. 400-401쪽


인간은 사랑함으로써만 자유롭다. 사랑 안이 아닌 다른 곳에는 어디나, 인간을 억압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인간일 수 없게 만드는 지배의 힘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1요한 4,8), “우리를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신다.”(갈라 5,13) 사랑과 자유가 하나라는 사실, 또는 이 둘 사이의 내적 친밀성을 이해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신앙의 본질을 이해한 것이다. -415쪽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길 원한다면, 결국 하느님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에서 출발해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실리를 끌어들이면,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든 사랑을 죽게 하고,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죽게 한다. -432쪽


하느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보고 싶은 당신의 소원, 우리가 가장 높은 경지의 실존, 존재의 가장 순수한 질에 이르는 것을 보고 싶다는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신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의식하지 못한 채 형편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너의 형편없음에서 벗어나라, 망가지지 마라, 가장 높은 인간적 차원에 도달하라!’ 이것이 그분의 소원이고, 복음의 전부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우리는 그분에게, 그분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고 우리 자신의 성화가 그분의 영광이요 기쁨이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표현한다. -437쪽


하느님의 속내 이야기에, 인간은 자기 존재의 깊은 곳을 털어놓음으로써 답한다. 기도는 단지 기도문의 암송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느님과 흉금을 털어놓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에게 희망과 난관과 불안과 기쁨으로 가득 찬 우리 삶에 대해 말씀드린다. 하느님의 자녀가 지녀야 할 참된 태도는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태도다.---말 없는 사랑이란 없다. 세속에서 속내 이야기가 사랑의 표현이듯, 기도는 사랑의 표현이다. 만일 여러분이 내게 반론을 펴기를, 연인들은 아무 말 없이도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 경우의 침묵은 가장 양질의 언어라고 말할 것이다. 표현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표현되지 않는 것은 퇴화하여, 마침내는 사라져 버리게 된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441쪽


로댕의 조각 ‘입맞춤’은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다. 이 작품에서 여자는 남자를 향한 움직임일 뿐이며, 남자는 여자를 향한 움직임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지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축성된 빵 조각은 인간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선물(즉 봉헌)이며,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즉 성사)이다. 그 모든 것의 끝에, 내가 고집스럽게 우리의 궁극적 신화神化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우리 희망의 대상이 있다. 기쁨 안에서 누리는 완전하고 충만한 자유 말이다. -507쪽






《 2012년 5월 12일자 천주교 <서울 주보>에서 김태희 베르다┃배우 》

하느님의 훈육 방법

종교나 믿음 같은 문제는 누가 말로써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이 쓰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읽으면서 선교 활동에 대해 내가 가졌던 회의적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책에 의하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교회에 속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하느님의 목소리인 ‘양심’에 따라 도덕적, 인격적으로 사는 그들의 행위 안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리러 가는 길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주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정말 사랑한다면 좋은 것을 서로 나누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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