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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기도하기』 - 성경으로 되새기는 기도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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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기도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기도하기 http://www.biblelife.co.kr/goods/content.asp?guid=17622 풀리지 않는 기도, 성경 속에서 답을 찾다! 매일 열심히 기도하는데 나는 왜 그대로일까? 기도, 삶 그리고 성경 속 인물들의 기도 기도하는데 왜 바뀌지 않을까? 기도하는데도 신자로서 미성숙한 모습은 변함이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던져봤을 기도와 삶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구약 성경 속 인물들의 기도에서 그 해법을 찾는다. 이 책이 쓰인 출발점과 독자들이 이 책을 집어 드는 출발점은 기도에 대한 궁금증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신자들이 바라보아야 할 지점은 하느님과 일치되는 삶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기 위해 신자들이 거쳐가야 할 과정이다.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 자아의 이미지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교정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의 저자가 성경 속 의인들의 기도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한 궁극적인 신앙의 지표일 것이다. 책속에서 이 책은 기도와 관련된 모든 물음을 다루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기도와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고 그 질문들에 응답하기 위하여 구약 성경이 기도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어떤 지혜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생의 절반 이상을 수도생활을 하며 보내온 필자가 늘 기도에 대해 품어온 질문 하나는, 왜 열심한 기도 생활이 반드시 우리를 훌륭한 삶이나 빼어난 성덕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신심 단체에도 성실히 참여하지만 작은 불편 하나도 견디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게 되는 것은 왜일까? 기도 생활과 삶은 왜 이토록 분리된 것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서문 왜 기도 신학인가?’ 중에서, p.8~9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구약 성경은 현대의 기도 생활을 향해 들려줄 수 있는 지혜의 소리를 담고 있다고 확신하기에 그 소리를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신학자로서 의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수도자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기도하는 자가 기도에 관하여 성찰하고 탐구한 것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을 ‘기도로 신학하기, 신학으로 기도하기’라고 정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기도와 삶의 분리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자가 자신이 기도를 바치는 대상인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어떤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고 있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하느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자신은 누구이기에 기도를 바칠 수 있는지, 하느님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수십 년간 기도를 바쳐 왔지만 기도를 바치는 대상이신 하느님에 대한 앎이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기도를 바치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성장하지 못하였다면, 그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질 또한 아무런 변화가 없을것이다. ‘서문 왜 기도 신학인가?’ 중에서, p.1 기도하는 자는 과연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자일까? 스스로의 자율성을 믿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기를 바라는자일까? 인간의 자율성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과연 스스로 충만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인간이 홀로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제아무리 자율성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일상 안에서 체험되는 인간적인 한계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과연 인간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이 이 모든 한계들을 홀로 떠맡고 그 무게감을 씩씩한 척 견디어 내는 것일까? ‘서문 왜 기도 신학인가?’ 중에서, p.14 하느님의 호칭은 주로 기도문 도입부에 나타난다. 기도자는 기도에 임할 때 하느님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하느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각 기도문마다 하느님의 호칭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한 기도문에서도 하느님의 호칭이 다양하게 사용될 수도 있다. 하느님의 호칭은 특정 기도문에서 기도자가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때문에 기도문에 나타나는 하느님의호칭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01 기도로 신학하기,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p.32 기도문의 내용뿐만 아니라 기도자의 자세 또한 기도자가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기도자의 자세는 기도문의 문체나 기도문에서 묘사되는 기도자의 신체적 자세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공식적이고 정중한 언어로 잘 다듬어진 기도문은 생각나는 대로 바치는 기도문과는 다른 하느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다. 두 번째 신학적 주제는 기도문들에 나타나는 ‘인간의 이미지’, 곧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각 기도문의 저자들이 인간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 마찬가지로 그들이 지닌 인간에 대한 이미지가 오늘 우리의 기도 생활에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이다. ‘01 기도로 신학하기,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p.36 이스라엘의 성조들에게 주신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절히 청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입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진정한 참회와 기도, 하느님을 향한 충실성이 계약 위반에 따라오는 저주를 풀고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된다고 믿는다. ‘01 기도로 신학하기, 신명기계 역사가와의 대화’, p.102~103 역대기 저자는 인간을 찰나적이고 무력하며 악으로 기울 수 있는 존재로 그린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서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흠숭을 드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역대기 저자는 하느님의 힘과 영광을 인식하고, 하느님께 의존하며, 언제나 그분을 찾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기도란 일회적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근본 자세를 의미한다.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이 곧 기도이므로 역대기 저자에겐 신앙과 분리된 삶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만약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에 정서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정서적인 반응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경의 본문을 되풀이하여 읽고 묵상해 보는 것이 좋다. 인간의 무의식은 거의 자동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자신이 경험한 아버지를 연관 짓는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성경의 본문들은 하느님 아버지가 자신이 경험한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도가 가납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삶이 하느님께서 주신 가르침과 모순된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의인이 되지 않는 한 기도할 수 없는 것일까? 죄 중에 있는 이들이 바치는 모든 기도는 무효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예 또한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동생을 죽인 카인이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하느님께 호소하였을 때(창세 4,13-14),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카인이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이미 충분히 겸손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0 3,46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