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3일 (목)
(녹)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자유게시판

신자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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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송 [hsson] 쪽지 캡슐

2002-04-20 ㅣ No.32235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성소이지만, 세례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가 됐다는 것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 딸로 선택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딸을 극진히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된 사람들은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면서 세상에 모범을 보이도록, "세상의 소금과 빛"(마태 5,13-14)이 되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지 않은 이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마태 5,16) 하도록 불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것을 본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게 되면 세상과는 대조(對照)적인 삶의 모습을 지니게 되면, 사람들은 세상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고서 하느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상황에 비추어서 두 가지만 예로 들어봅니다.

 

  첫째로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는 거짓이 횡행해서 사람들 사이에 믿음과 신뢰가 점점 더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불신이 너무 깊어져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고 항상 그 이면을 살피게 됩니다. 항상 ’이 사람이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아주 피곤하고 고단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니까 뭘 사러 가서도 상점 주인이 말하는 물건값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주인이 부르는 대로 돈을 내고 나면 꼭 속은 기분이 들지요. 사회가 이렇게 되면 참으로 살기가 불편하고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불신 사회에서 예수님 말씀대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마태 5,37) 진실하게 말함으로써 가식과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사람들,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불신의 흙탕물로 혼탁해진 사회에 한 구석에서 솟아 나오는 맑은 샘물이 될 것입니다.

 

  물론 정직한 것은 좋지만, 그렇게 살다보면 손해보고 이용당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우리 선조들은 신앙을 위해서 재산, 명예,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그 후손인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작은 손해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정직하다고 반드시 손해보고 이용당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십 수 년 전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생선에다 인체에 해로운 물감을 칠해서 싱싱하게 보이게 했던 관행에 대항해서 신자 상인들이 생선을 그대로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싱싱하게 보이지 않는 생선을 사가지 않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그들의 정직성을 알게 됐고 그래서 더 장사가 잘 됐다고 합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컴퓨터 수리점의 이야기. 몇 년 전에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양심 상점을 찾아다녔듯이 그곳 방송사에서 양심 점포를 찾아 나섰습니다. 컴퓨터의 내부의 연결선을 일부러 끊어놓고 수리를 부탁했더니, 백여 개의 수리점에서는 하나같이 큰 고장이라고 많은 수리비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군데에서는 연결선을 바로 끼워주고 수리비도 받지 않았답니다. 기분좋게도 이 점포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수리점이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는 다른 한가지의 길은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에 두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경제적 이익을 우선에 두고서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으로 여기는 경제 제일 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 앞에는 인륜도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잘 살아보자고 노력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어느 정도는 해결돼야 합니다. 아직도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나라 전체를 두고 볼 때 20, 30년 전 보다는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전화, 냉장고 있는 집이 드물었지만, 이제는 집집마다 그 정도는 다 갖추고 자가용도 몇 집에 한 대 정도는 보급되었습니다.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좋은데, 돈맛을 알게 되어서 어느새 돈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대듭니다. 돈 앞에는 부모도 친척도 친구도 소용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모두들 돈만 아는 것이 문제다, 돈 앞에는 인륜도 없다고 세상 탓은 하지만 자신부터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들만이라도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에 두는 삶을 살아간다면 좋겠습니다. 돈 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는 삶은 꼭 먹고살기 넉넉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신문을 보니까 사회적으로 약자를 돌보는 사람은 절반 이상이 사회적 빈곤층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 기사를 뒷받침해주는 미담 하나를 소개하지요.

  

일 년 전 겨울, 군 입대 영장을 받고서 의기 소침해 있던 나는 매일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지냈다. 그 날도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자정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하지만 난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혼자 거리를 배회했다. 한참을 어슬렁거리다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져서 우동가게에 들어갔다. 새벽인데도 우동가게 안은 야간쇼핑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우동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지저분한 점퍼에 얼룩진 가방을 멘 어떤 아저씨가 들어왔다. 식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굶어서 그러는데 우동 국물 좀 억을 수 있을까요?" 주눅든 목소리. 옆의 한 아가씨는 들릴 정도로 짜증을 냈다. "뭐야 정말, 밥맛 떨어지게스리..." 머쓱하게 서 있던 그 아저씨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주인 아줌마였다. "이리 앉으세요. 드릴게요." 그리고 잠시 후 아저씨의 테이블에 놓은 것은 우동 국물이 아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볶음밥이었다. 그 아저씨의 숟가락이 잠시 떨리던 것을 나는 보았다. 아저씨가 식사를 다 하고 나가려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재빨리 나오더니 아저씨 손에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다. "힘네세요".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다. 아주머니는 조금 전까지 물가가 올라도 너무 오른다며 한숨을 쉬던 분이었다(장재호, 월간 <리더스 다이제스트> 2002년 7월 호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본 받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하느님 아버지께 효도하는 아들, 딸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좀더 살기 좋은 세상, 따뜻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 모두는 하느님의 불림을 받았습니다.

 

  인간으로서, 또 신자로서 자신들의 불리움에 충실할 때 비로소 교회 공동체를 위해 특별히 봉사하기 위한 사제, 수도 성소가 꽃피게 되어 훌륭한 수도자, 성직자가 많이 배출될 것입니다. 마치 좋은 밭에서 좋은 나무가 자라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는 한 인간으로서, 세례 받은 신자로서 좋은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훌륭한 밭을 일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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