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자유게시판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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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02-08-26 ㅣ No.37721

 

 어제 주일 미사를 봉헌하는데 군인 형제들이 많이 왔습니다. 미사 후에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주는데 이등병 형제가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물을 주면서 "언제 제대합니까!"라고 물으니, "끝이 안보입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이제 막 입대한 이등병 형제에게 제대란 어쩌면 너무도 멀고먼 이야기처럼 들리겠지요. 저 역시도 이등병시절이 있었고,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 어제는 미사 후에 전방에 있는 대대엘 찾아갔습니다. 철책 근무를 하는 군인들을 위해 비디오 테이프를 전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대대장님이 교우시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야길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대대장님이 철책 근무 100일을 맞이하면서 병사들이 적은  소감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소감문을 읽으면서 이 젊은이들이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옆에 있는 동료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 도시의 복잡하고 화려한 삶이었다면 그런 소감문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일 철책 경계 근무를 서고, 잠을 자는 일상이 100일이 지나면서 어쩌면 이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로운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 단순해질 때, 어쩌면 더욱 깊은 것을 느끼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기도 하는가 봅니다.

 

 매일 실탄을 몸에 지니고, 수류탄을 몇 개씩 가지고 다니는 그 긴박한 순간 순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 동료에 대한 사랑도 필요하지만 엄격한 지휘체계와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라 생각합니다.

 

 북방 한계선을 바라보면서 철책 근무를 하는 한 병사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이곳이 세계적인 환경 보존지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이 국제적인 관광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날이 올 때까지는 이렇게 총을 들고 지키렵니다."

 

 문득 신앙생활을 생각해봅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해서는 철책경계를 하기 힘들지 모릅니다. 가능하다면 철책 경계에서 빠지고 싶고, 더 가능하다면 군대에 가지 않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100일간 철책 경계근무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느끼고 알았듯이 우리의 신앙 생활도 어쩌면 단순하고 솔직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는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제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도 이런저런 계산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렇게 작은 꽃잎을 피우는 저 들꽃이 삶의 또 다른 가치를 보여 줍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던 그 친구가 아무런 사고 없이 군 생활 잘 마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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