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자유게시판

축하는 5년 뒤에...[도올 김용옥의 김수환 추기경님과의 대화]

스크랩 인쇄

현명환 [wax77] 쪽지 캡슐

2002-12-23 ㅣ No.45839

 

 

 

"당선축하는 5년뒤 봐서..."

 

 

 

도올기자가 만난사람 - 김수환추기경

 

 

“축하라구요? 축하는 당선자에게 할것이 아니라 5년 후 퇴임자에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젊은이들의 인기를 얻었으면 이제 젊은이들을 실망시키지는 말아야 할텐데….” 나는 20일 오후 김수환 추기경이 계신 주교관의 문을 두드렸다.

 

신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우리조상들은 예로부터 이렇게 세상이 바뀌는 것을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불렀다. 우리민족의 근대성의 횃불을 높이 치켜든 동학(東學)의 지도자들은 혁명(革命)이란 말 대신에 개벽이란 말을 즐겨썼다.

 

“개벽이 언제 오리이까?”

 

해월 최시형선생은 말씀하셨다.

 

“마찻길에 비단이 깔리고, 벗겨진 산이 다시 검어지고, 만국의 병마(兵馬)가 이땅을 짓밟고 물러난 뒤이니라.”

 

이 통찰력있는 몇마디의 상징언어는 정확히 백년전에 이미 오늘의 우리사회의 변화를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마찻길엔 비단이 깔렸는가? 비단보다 비싼 아스팔트가 분명히 깔려있다. 벗겨진 산은 다시 검어졌는가? 분명 다시 검어졌다. 그리고 한 세기동안 만국의 병마가 이땅을 짓밟았다. 우리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국토의 변화, 경제의 변화, 우리 삶의 양식의 변화, 국제환경의 변화, 이 모든 것이 오늘의 개벽을 가능케했다. 그리고 이 개벽의 주체로서 새로운 젊은 민중세력이 우뚝 섰다. ‘신유목민족’이니, ‘2030세대’니 하는 새로운 계층의 등장은 지역갈등을 넘어서 이제 새로운 세대간의 갈등으로 우리사회의 인식의 틀을 바꿔놓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는 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젊은 세대, 영파워에 대한 과대한 평가는 변하지 않는 역사의 진실들을 호도할 수가 있다. 구세대의 보수적 질서감각의 탈락을 선언할 수는 있을지언정 새세대의 허상에 아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항상 동요함이 없이 변하지 않는 역사의 핵심을 꿰뚫어봐야 한다.

 

그토록 애절하게, 그토록 노골적으로 노후보의 당선을 바라지 않았던 언론들이 이제 앞장서서 노당선자의 만세를 부르고 그에게 온갖 주문을 남발하고 있다. 정치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이란 곧 썩고마는 유기체요, 인격체다. 아무리 새로운 위대한 정책이 난무해도 한 인격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몇마디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 몇마디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 몇마디의 금언을 우리시대의 성자, 김수환 추기경의 영혼의 심금을 통해 들어 보았다. 귀를 기울이자돬 폐부를 찌르는 양심의 소리에! 울려퍼져라! 하늘의 소리여!

 

15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79∼1471)는 ‘예수 본받기(De imitatione Christi)’라는 중세문학의 걸작품을 남겼다. 여기서 ‘이미타치오네’라는 말은 ‘흉내낸다’ ‘본받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무지스러운 맹목으로부터 해방되고, 눈이 떠지려면, 그리고 진정한 빛의 광명에 노출되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동을 본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천국은 너의 마음속에 있다.” 예수는 항상 이와 같이 외쳤다.

 

예수는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그 무엇,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써 흉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우리는 신과 소통되고 합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본받을 수 있는 예수의 모습의 한 전형을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행동에서 발견해왔다. 예수는 결코 우리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김수환 추기경이야말로 나의 예수였던 것이다. 젊은 나의 심상에 종교적 진리의 구현체로서 사회적 정의의 실현체로서 등장한 이래 그는 그 도덕성을 한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새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다음, 20일 오후 4시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에서였다. 그와 더불어 격변의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이 그 얼마나 우리에게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몹시 아프다던데 괜찮아요?”

 

“제가 아프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는 내가 쓴 기사를 꼬박꼬박 다 읽고 있다고 했다.

 

“요즈음 김선생의 글처럼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 별로 없어요. 게다가 문화일보는 유일한 석간이니까 꼬박 읽게 되지요.”

 

나는 추기경의 격려에 경의를 표했다. 때마침 평화신문의 기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기자가 온다는데 또 기자가 오는 것은 난생 처음 봐요. 아 글쎄, 나보다 김기자님이 더 큰 관심이라니깐.”

 

유머는 성자의 미덕이다. 성자는 우리의 영혼에 항상 기쁨을 준다.

 

―오늘 오랜만에 그냥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공교롭게도 새 대통령이 뽑힌 다음날이 되었군요.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씀이라도?

 

“대통령당선자에게는 축하할 말이 없어요. 당선이란 축하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누구나 당선되는 사람들은 축하받을 말만 해왔는데 여태까지 아무도 그 축하를 받을 만한 짓을 해온 사람이 없거든요. 축하는 당선자에게 할 것이 아니라 퇴임자에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축하는 들어서는 자의 것이 아니라, 물러서는 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이오.”

 

추기경 당신께서는 축하를 5년간 보류하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비치셨다.

 

“5년 후에 노무현씨가 대통령직을 떠날 때에 국민 모두가 더 좀 그 자리에 계셨으면 오죽이나 좋겠냐고 아쉬워하고 섭섭해했으면 좋겠어요.”

 

―추기경님께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노무현씨를 불안하게 생각했어요. 북핵문제도 그렇고 대미문제도 그렇고 노후보얘기가 뭔가 해석의 여운은 남기는데 석연치가 않아요. 시세에 어두워서 그런지 몰라도 난 그냥 늙은이의 심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같은 늙은이들의 걱정은 사실 알고 보면 모두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노후보가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고는 하나 결국 나같이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온 국민의 절반이나 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해요. 이런 사람들의 불안을 말로 씻을 수는 없어요. 행동과 실천으로 씻어주어야겠지요. 그래야 진정 국민화합의 대통령이 되겠지요.”

 

너무도 진솔한 자기 심경의 토로였다. 나는 북핵이나 대미문제는 오히려 사소한 문제라고 설명드렸다. 단지 주체적 대응의 자세를 밝힌 것일 뿐이며 본질적인 노선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드렸다. 노당선자의 커먼센스를 믿어도 좋을 것이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러나 세계를 인식하는 틀에 이미 세대간에 격차가 드러난 것은 확실하다고 말씀드렸다.

 

“노후보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사랑을 받고, 또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 그 사실을 나는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내 맘 한구석에 큰 걱정이 있습니다. 만약 몇 년 후에 이 땅의 젊은이들이 실망한다면 어떡하나? 알고 보니 그 말들이 환심사기 위한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다든가, 노당선자의 언행에서 신심을 발견치 못한다면, 우리 늙은이들을 실망시키는 것보다는 더욱 암담한 무기력한 미래가 이 땅에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강의 현란함이 아니라 정치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정치를 불신하는 것이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정치가들의 언행이 믿음을 상실한 것이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그것만이라도 회복시켜줄 수 있다 한다면….”

 

나는 순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라 한 자하(子夏)의 말을 생각했다. 여기서 ‘신(信)’이란 믿음(belief)의 뜻이 아니다. 그것은 신험(信驗)의 뜻으로 증명된다(verification)는 뜻이다. 인간의 언어는 말로서 그칠 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반드시 실생활 속에서 증명되어야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학문이란 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요, 말의 신험됨을 배우는 것이다. 학력의 고하와 말의 신험은 관계가 없다. 그리고 계속 말한다. 현현역색(賢賢易色)! 어진 이를 어진 이로서 대하기를 아리따운 여인을 좋아하듯 해라! 노당선자는 과연 현현역색할 수 있겠는가?

 

―우리사회의 도덕성의 회복이란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대통령이 처먹지만 않아도 우선 국민에게 버림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주변의 친인척 모두 처먹지 말아야 하며 그를 당선시키는 데 기여한 모든 자들이 처먹지 말아야 합니다. 노사모와 같은 조직도 모두 해체되어야 합니다.

 

“역대 대통령은 모두 청와대에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부자가 되어 나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들어갈 때 그 모습대로 부인이랑 달랑 단촐하게 걸어나왔으면 좋겠어요.”

 

―1948년 세 발의 총성이 마하트마 간디의 가슴을 관통했을 때, 그의 몸무게는 100파운드였고, 그의 전재산은 100루피였습니다. 100루피는 미화 2불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지도자가 있을 수 없는지, 이와 같이 선진적인 정치의식을 가진 국민에게 왜 그러한 지도자가 있을 수 없는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난 간디를 잘 모르지만 그가 한 말 중에, 진리에 반해서 독립을 투쟁해야 한다면 차라리 독립을 포기하고 진리를 택하겠다고 한 말이 기억납니다. 우리 도산 안창호선생도 항상 말씀하셨어요. 진리는 언제고 밝혀지게 마련이고 정의는 언제고 구현되게 마련이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우리 지도자들은 너무 거짓말을 쉽게 해왔어요. 정치란 정도(正道)를 걷는 것입니다. 위기상황이 몰아닥칠수록 마음을 열고 정직하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자꾸만 위장하려 하면, 거짓은 거짓을 낳을 뿐입니다.”

 

―해방 후 혼탁한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추기경 어른께서는 이 사회의 진리와 정의를 구현해오셨습니다. 그 도덕성의 물줄기가 우리사회의 가치판단을 바로잡는 데 크나큰 기준이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정치인이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삼성전자 천만 개보다도 더 강한 국력이 될 것입니다.

 

“저는 정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저는 종교인으로서조차도 자기 할 일을 다 못했습니다.”

 

추기경은 곤요로운 듯이 “정말입니다” “진심입니다”라고 탄식을 발하시며 말씀을 이었다.

 

“저는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고, 참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하느님께 갈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만….”

 

우리의 대화는 ‘촛불시위’로 옮아갔다. 추기경은 미국에 대한 요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국인에게 깔보일래야 깔보일 수 없도록 자신의 실력을 키워오지 못한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설득하신다. 일본인들은 남들이 인정 안할래야 안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놓고 확실하게 요구하는 데 반하여, 한국인들은 그러한 실력을 쌓기도 전에 우선 알아달라고 목소리만 높게 외친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국제사회에서 신뢰감을 구축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경고하신다.

 

“중국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중국인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뭉쳐 사는 데 익숙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너 죽고 나 죽자는 데 익숙합니다. 미국 이민 간 한국인들이 유대인들에게서 가발업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가발업으로 5대를 먹고 살았는데 한국인들은 10년도 못가서 망했습니다. 서로 경쟁하고 뜯어먹느라고 말이죠. 앞으로 동북아의 패자는 중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에게는 시대를 앞서 보는 형안이 있다. 우리 민족에게 끊임없이 자성을 요구하시는 겸손한 성자! 그는 갑자기 당신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열쇠고리를 건네주신다.

 

“나도 노당선자처럼 입후보를 하려고 이런 걸 만들었어요.”

 

“엣?” 난 교황입후보라도 하시려나보다 하고 의아스러운 얼굴을 짓는데,

 

“난 천당에 입후보했어요.”

 

순간 나는 한시로 화답했다.

 

吾人耶蘇在心中

 

開天闢地永遠輝

 

우리의 예수,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라.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릴 때

 

그 한 빛줄기 영원히 빛나리.

 

 

2002/12/23  

 

 

김용옥 기자/doholk@munhwa.co.kr

 

 

 

 



1,070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