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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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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안전지대 벗어나 거리의 흙을 신발에 묻혀야 (담아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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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홍주 [jhj5063] 쪽지 캡슐

2014-01-24 ㅣ No.133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학과 영성
교회는 안전지대 벗어나 거리의 흙을 신발에 묻혀야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40-45항 번역문
교황 프란치스코  |  editor@catholicnews.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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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24  11: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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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인간적 한계로 구체화되는 사명

40. 교회는 그 자체로 선교하는 제자입니다. 교회는 계시된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의 임무는 “교회의 판단이 성숙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른 학문도 고유한 방법으로 이 일을 돕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에 관해서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런 연구를 높이 평가하는데, 그 학문은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사항들을 이끌어내는 것을”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수많은 주제들을 연구하고 자유롭게 성찰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철학 사조, 신학 사조, 사목실천 사조들은 존중과 사랑의 정신으로 성령에 의해 조화를 이룬다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갖는 그 풍부함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도하고 아무런 해석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 단일한 교리체계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비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그 같은 다양성이야말로 소진될 수 없는 복음의 풍요로움이 갖는 다른 모습들을 드러내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합니다.

 

41. 동시에, 오늘날 빠르고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 속에서, 우리는 변치 않는 진리들을 새로움을 갖고 나타나는 언어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신앙의 보고는 하나입니다. ...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이 완전히 정통적인 언어로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과 거리가 먼 어떤 것을 취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그 언어들 사이에 말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인류에 관한 진리를 소통하려는 거룩한 의도를 갖고, 때로는 거짓 신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닌 인간적 이상을 신앙인들에게 줍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 실체를 전하는 데에는 실패하면서 어떤 공식적 표현에만 매달립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절대로 잊지 맙시다. “진리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 양식의 쇄신은 현대인에게 변치 않는 의미를 갖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됩니다.”

 

42. 이 모든 것이 복음을 가르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이 갖는 아름다움을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를 바란다면 말입니다. 물론 교회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에게 쉽게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십자가의 그 어떤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신앙은 분명히 불명료함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불명료함이 우리 신앙에 동의하는 이들이 갖는 확고함을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명료한 이성과 논증을 넘어 ‘사랑’이라 불리는 누이가 됩니다. 우리는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삶은 언행일치와 사랑과 증언으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의를 불러일으킵니다.

 

43. 교회의 지속적 식별 과정에서, 교회는 어떤 관습이 복음의 핵심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비록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적절하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 있지만, 복음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더 이상 기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주저하지 말고 재검토해야 합니다.

 

동시에 교회는 당대에 분명히 실효성이 있었지만 백성의 생활을 형성하고 지도하는데 더 이상 유용성을 갖지 않는 그런 규칙이나 규정을 갖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하느님 백성에게 주신 규정들은 “매우 적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는 후대에 교회가 연이어 내놓은 이용한 규정들은 “신자들의 삶에 짐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의 종교가 봉사의 형태가 되도록 절제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반드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수세기 전에 하신 이 경고는 오늘날 정말로 시의적절한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과 모든 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개혁을 숙고할 때 반드시 이 점이 그 기준의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44. 더구나 신앙이나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형제자매로 동행하는 목자와 교우들은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행동에 대한 인책성(引責性)과 책임은 무지, 부주의, 폭력, 공포, 습관, 무절제한 감정과 그 외에 정신적 사회적 요인들 때문에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적 이상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목자와 교우들은 인내와 자비를 갖고 인격적 성장에 동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인격적 성장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에게 저는 고해소가 고문실이 아니라, 우리가 최선을 다하도록 자극하는 주님의 자비를 만나는 곳임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인간이 갖는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만 더 나가갑시다. 그것이 겉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면서 어떤 어려움도 직면하지 않으며 지내는 일상보다 더욱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주는 매력과 위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사람 안에 신비롭게 활동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랑은 사람들의 업적과 실패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45. 우리는 복음화의 과업이 언어와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화의 과업은 구체적인 환경에서 복음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소통시키는 길을 찾습니다. 물론 언제나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복음의 진리와 선함과 빛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선교의 마음은 이 한계를 아는 것이며, 스스로 “약한 이에게 약한 사람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토 9:22)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의 마음은 결코 스스로를 가두어서도, 자기의 안전지대로 피해서도, 완고함과 방어책을 채택해서도 안 됩니다. 선교의 마음은 복음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성령의 길을 식별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래서 항상 좋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 중에 신발에 거리의 흙이 묻더라도 말입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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