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춘천 가리산 '천자묘'] 중국 '漢天子' 전설 서린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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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우 세자요한 신부 [john1004] 쪽지 캡슐

1999-03-09 ㅣ No.24

 

[춘천 가리산 '천자묘'] 중국 '漢天子' 전설 서린 명당

 

춘천의 가리산 중턱에는 ‘천자묘’라 불려오는 무덤이 있다. 소양호변에 자리한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는 한때 매우 번성했던 마을이었다. 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에는 400호 안팎의 가구가 모여 살던 면소재지로 춘천에서 양구, 인제로 들어가던 길목이었다. 이제는 아홉가구만 사는 쓸쓸한 산골마을로 쇠락한 이 마을에서 천자묘 이야기는 비롯된다.

 

옛날에 한(漢)씨 성을 가진 머슴이 이 마을에 살았다. 하루는 두명의 스님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주인은 “방이 없으니 머슴방이라도 괜찮으면 자고 가라”고 했다. 방에 들어간 스님들은 머슴에게 계란을 구해달라고 했다. 머슴은 스님들이 고기를 못먹으니 달걀이라도 먹으려는 줄 알고 계란을 삶아다 줬다.

 

그날 밤 머슴은 잠결에 스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그들은 가리산에 있다는 명당터를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가리산에 있는 묘터에 계란을 파묻고 축시(丑時)에 부화해 닭이 울면 천자가, 인시(寅時)에 울면 역적이 날 자리라고 했다. 엿듣는 처지라 머슴은 차마 삶은 계란이라는 말을 못했다.

 

이튿날 머슴은 그들을 몰래 뒤따라 갔다. 소양강을 건너 물로리로 들어가더니 산세가 좋은 곳에 이르러 계란을 파묻었다. 그들은 밤을 지새며 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축시는커녕 인시가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님들은 “역적도 천자도 아니 나겠다. 닭이 축시에 울어도 금으로 관을 쓰고 황소 100마리를 잡아 제를 지내야 하니 웬만한 사람은 묘를 쓸 수도 없을 것”이라며 산을 내려갔다.

 

집에 돌아온 머슴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그곳에 묻기로 했다. 천자가 되든 역적이 되든 종놈의 신세보다는 낫겠다 싶어서였다. 그는 꾀를 내어 금관(金棺) 대신 노란 귀리 짚으로 시신을 싸서 묻었다. 하지만 제 몸보다도 귀한 황소를 잡는 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그런데 무덤을 다 쓰고 쉬고 있자니 몸이 가려웠다. 머슴은 옷을 걷고 이를 잡기 시작했다. 토실토실한 이를 100마리도 넘게 잡았다. 황소 대신 ‘황소만한’ 이로 제를 지낸 셈이었다.

 

며칠이 지나 밤중에 뇌성벽력이 치는데, 어디선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을 싸서 빨리 집을 떠나라”는 소리였다. 머슴은 처자를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갔다. 얼마후 폭우에 내평강이 마을을 치고 나가 새로운 강을 만들었다. 목숨을 구한 머슴은 북으로 발길을 재촉한 끝에 중국에 닿았다.

 

그때 중국에서는 천자가 죽고 후대가 없어 새 천자를 구하고 있었다. 관리들이 짚으로 된 북을 매달아놓고 오가는 이들에게 쳐보라고 했다. 천자만이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머슴이 북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관리는 머슴의 어린 아들더러 “너도 사내니 한번 쳐보라”고 했다. 아들이 북을 치자 ‘쿵’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결국 머슴의 아들은 천자에 올랐다.

 

이 이야기는 물로리의 박치관씨(65)가 구술한 것이다. 그 뒤 한씨 머슴이 살던 마을은 ‘한터’가 되고, 그 묏자리는 ‘한천자(漢天子)묘’가 됐다. 그러나 내평리 한터마을은 수몰됐고, 지금은 한터라는 지명만 지도 위에 겨우 남아 있다. 중국에서 그 묘를 단장하려고 왔지만 산이 깊어 묘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천자묘는 물로리의 양지말에서 고깔바위 앞을 지나 연국사에 닿은 뒤 가리산 정상쪽으로 10분쯤 더 올라가자 길가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치 우물 안에 들어온 것처럼 산들이 주변을 에워쌌는데, 묘 앞쪽으로 산 자락이 열려 있다. 묘는 뱀꼬리처럼 능선 자락이 끝나는 곳에 앉아 있었다. 무덤 안에는 넓다란 바위가 신기하게도 누워있는 사람 형상으로 파여 있어 자연스레 석곽 구실을 한다. 동네사람들은 날이 가물고 마을에 흉한 일이 있을 때 몇 차례 묘를 파본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시신들이 발견됐다. 묏자리 덕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래 묻어둔 시신들이었다.

 

천자묘 전설은 삼척에 있는 준경묘 전설과 비슷하다. 준경묘는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그의 부친을 모신 곳. 이안사는 왕손을 얻게 될 명당터라는 스님의 말을 엿듣고 금관 대신에 보리짚을 쓰고, 100마리 황소 대신에 흰소(白牛)를 제물로 썼다.

 

천자묘는 아직도 신성하게 여겨져 개고기나 비린 고기를 먹고 이곳에 오면 화를 당한다는 속설이 있다. 지금도 해마다 천자묘를 가장 먼저 벌초한 사람은 산삼을 캔다는 얘기가 있어 심마니들이 성지로 여긴다. 그 때문에 천자묘는 떼가 자랄 날이 없다.

 

천자묘 아래쪽에는 부서진 옥개석(屋蓋石)과 탑신을 돌탑처럼 쌓아둔, 옛 영화를 알 길이 없는 절이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연국사인데, 시멘트 벽돌건물의 처마 밑에 대웅전 현판을 목걸이처럼 걸고 있다. 연국사 아래에 있는 고깔바위는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이름난 곳. 잘 단련된 근육질 몸매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바위 앞에 어른 키만한 바위가 벗어놓은 고깔처럼 놓여 있다. 고깔바위 위쪽에는 여근(女根)바위도 눈에 띈다. 바위 틈에서 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흐르고, 군데군데 구멍이 파져 있어 70명쯤이 온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로리는 가리산 등반의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소양댐에서 아침 배를 타고 물로리로 들어와 연국사와 천자묘를 거쳐 가리산을 오른다. 산을 내려올 때는 홍천군 두촌면 천현리 계곡으로 넘어가면 차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루 산행을 마칠 수 있다. A자유기고가

 

 

경춘선 절경 즐기며 김유정 고향 가보세

 

 

경춘선을 타고 강촌유원지를 지나면 신남역이 나온다. 이곳이 춘천시 신동면 실네마을. 불꽃처럼 타오르다 사라진 작가 김유정(1908∼37)의 고향이다. 김유정은 ‘나의 고향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이다’고 했지만, 실네마을은 병풍 형상의 금병산 아래 제법 넓게 펼쳐져 있다. 강원도에서는 드물게 탁 트인 논밭을 거느렸는데, 유정의 집안은 그곳에서 천석이 넘게 농사짓던 부호였다. 그러나 유정은 열살이 못되어 부모를 잃고, 방탕한 형이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힘든 성장기를 거쳤다.

 

김유정 또한 명창 박녹주를 연모하다 거절당하고 한때 방종한 생활을 했는데, 이 마을로 돌아와 건실한 새 출발을 했다. 야학당을 열고, 간이학교 금병의숙도 세워 생활개혁운동을 벌인 것. 25세 때의 일이었다. 유정은 이즈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28세 때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함께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폐결핵으로 2년 뒤 요절할 때까지 단편 28편과 미완성 장편소설 1편을 남겼다. 올해 춘천시는 실네마을의 김유정 생가를 복원할 계획이다.

 

허정구 / 자유기고가  뉴스플러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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