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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밤미사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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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베네딕또 16세
바티칸 대성전 미사 중계 http://www.kto.fr/videos/noel2005_1.ram 강론http://www.radiovaticana.org/audio/ra/00042329.RM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시편 제2편의 이 말씀과 함께 교회는 크리스마스 밤 미사를 시작하며 베들레헴 구유에 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합니다. 이 시편은 유다 왕들의 대관식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뽑혀 특별히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 졌습니다. 왕이 백성의 인격화 였던 것처럼 그의 왕위는 하느님의 장엄한 선택으로 체험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왕은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 올려졌고, 베들레헴의 밤에 이 말씀은 현재의 현실보다 더욱 희망 가득한 표현이 되었고 새롭고 기대할 수 없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는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고독이 아니시고 사랑과 상호 증여의 관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시고, 아들이시고, 성령이십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느님 자신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에게 성부는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느님의 영원이 세상의 잠시 속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나가는 오늘을 하느님의 영원한 오늘 속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은 크신 분이셔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느님은 강하신 분이셔서 당신을 약하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아무런 방어를 할 수 없는 아기처럼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방어없는 아기로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좋은 분이셔서 자신의 거룩한 빛을 버리시고 외양간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있고 또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를 접하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의 선하심은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를 통해 계속 행하십니다. 이것이 성탄입니다. :<<너는 내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있고 그분과 닮을 수 있게 하려고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구유의 아기를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런 모습으로 우리는 그분을 알아뵙게 됩니다. 모든 어린이 위에 오늘의 빛과 비슷한 어떤 것, 우리가 사랑해야하고 우리를 맡겨야 하는 하느님과의 가까움이 빛납니다. 모든 어린이들 위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이들 위에도.
성야 전례의 제 1 독서는 이사야서의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9,1)는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빛>>이라는 단어는 오늘 전례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디도서에서 빛은 다시 언급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2,11). ‘나타나다’(ephiphanie)는 표현은 이런 맥락에서는 희랍어, 히브리어 모두 어둠과 풀리지 않는 문제로 가득한 이 세상 안에 거룩한 빛이 터져 나옴을 뜻합니다. 또한 복음은 하느님의 영광이 목동들에게 나타나고 그들을 빛으로 감쌌다>>(루가 2,9)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거기에서 하느님 영광의 빛이 세상 안에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빛입니다.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습니다.>>(요한 1서 1,5). 빛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또한 빛은 특별히 거짓과 무지의 어둠에 반대되어 인식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빛은 우리를 살게하고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줍니다. 빛은 우리에게 따뜻함을 주고 사랑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고 빛이 세상에 나타납니다. 증오가 있는 세상은 어둡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 마굿간에 세상이 기다리던 큰 빛이 나타났습니다. 마굿간에 자고 있는 이 아기 안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 사랑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시고, 사랑의 길로 우리를 이끄시려고 당신의 위대하심을 버리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세기를 이어 그 빛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빛은 그들을 휘감았습니다.>>. 이 아기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곳에 사랑도 또한 솟아납니다. - 타인을 위한 선, 약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 용서- 베들레헴에서 나온 빛, 사랑, 진리는 세기를 넘어 이어집니다. 성인들을 바라보면 - 바오로와 아우구스띠노로부터 프란치스코와 도미니꼬까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아빌라 데레사에서부터 켈커다의 마더 데레사까지 우리는 이 선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이 빛의 길은 어린이가 되신 하느님의 신비인 베들레헴의 신비에서 불붙습니다. 이 어린이 안에서 하느님은 이 세상의 폭력에 선으로 맞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아기를 따르라고 요청하십니다.
성탄 나무와 함께 오스트리아 형제들은 베들레헴에서 붙인 작은 등불을 가져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성탄의 참된 신비는 이 아기에게서 나오는 내면의 빛입니다. 이 내면의 빛이 우리에게 전해지도록합시다. 우리의 맘속에 하느님 선하심의 작은 불꽃이 우리 맘속에도 붙도록 합시다; 우리의 사랑으로 빛을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합시다! 이 빛이 우리 시대의 찬 바람을로 꺼지지 않도록 합시다. 이 빛을 잘 지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합시다. 이 밤 우리는 베들레헴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우리 구세주께서 태어나신 곳과 거기 사는 이들과 거기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지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자 합니다: 주님 당신의 고향인 이 지역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잘 아십니까? 당신의 빛이 그곳에서 빛나게 하십시오. 평화가 그곳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평화>>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이 거룩한 밤의 전례안에 담긴 세 번째 의미에 다가갑니다. 이사야는 그 아기를 “평화의 왕자”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분의 다스림을 사람들은 ;<<평화가 끝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 목동들은 <<하늘 높은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땅위에는 평화>>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뒤에 이어서 <<...선한 의지를 가진이에게>>라고 할 때도 있었고 새로운 번역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라고 합니다.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한 의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까? 질문을 더 잘 던져 봅시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분은 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까? 하느님 그분은 편애하십니까? 그분은 단지 정해놓은 이들만 사랑하시고 다른 이들은 버리십니까? 복음은 하느님께 사랑받은 몇 사람을 제시하면서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 마리아, 요셉, 엘리사벳, 자카리아, 시메온, 안나 그리고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오늘밤은 목동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 당시에 목동들은 무시당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이들로 여겨졌고, 법정의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분명 큰 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성인이라는 말로 우리가 영웅적인 덕성을 갖춘 사람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은 앞으로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한가지 특징을 비추어 줍니다: 그들은 깨어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의미에서도 가치 있습니다: 밤에 그들은 양들 곁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의미에서도 이것은 가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 자신에 닫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열려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깨어있음은 준비되어있음 이었습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고, 그것은 길을 밝혀줄 빛에 대한 기다림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관심 가지시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두는 당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이는 자신의 영혼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그들곁에 어떤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원치 않습니다. 다른 한편, 도덕적으로 가난하고 죄지은 이들, 적어도 그래서 고통받는 이들, 그들은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그들은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분의 선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기다림에 열려있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빛은 평화와 함께 들어갑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평화를 갖고, 그것을 전할 사람을 찾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마음이 닫혀진 것을 보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우리시대에 당신 평화의 생생한 전달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평화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은 성체성사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습니다. 성체성사 거행을 통해 세상 곳곳으로 평화의 그물이 퍼져 갑니다.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들은 온 세상 만큼 넓은 평화의 나라를 건설합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우리는 베들레헴, 빵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평화와 함께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평화의 빛을 우리 한가운데 간직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평화의 예술가가 되고, 그렇게해서 세상의 평화에 기여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 주소서. 불목하는 곳에 평화를 주시고, 분노가 지배하는 곳에 사랑이 넘치게하시고, 어둠이 지배하는 곳에 빛이 솟게 하시고 우리가 평화의 전달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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