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trich Buxtehude 1637∼1707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독일 올데슬로에서 1637년 출생 1707년 5월 9일에 사망. 1648년 교회음악회 [저녁음악]을 크리스마스 전 다섯번째 일요일에 집중시켜 명성을 높임. 1668년 뤼베크의 성 마리아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사망할 때 까지 머뭄
독일 바로크시대 작곡가·오르가니스트. 홀슈타인지방 올데슬로 출생. 북독일 오르간악파를 대표하는 거장(巨匠)으로서 J.S. 바흐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헬싱보르크와 헬싱괴르의 오르가니스트를 거쳐, 1668년 뤼베크의 성 마리아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전임자 F. 툰더가 1648년에 시작한 교회 음악회 <저녁음악>을, 크리스마스전 다섯 번째 일요일에 집중시켜 그 명성을 높였다. 오르간곡은, 발 건반을 호쾌하게 사용한 환상곡에 특징이 있다. 《트리오소나타집(함부르크, 1696)》 등의 실내악곡도 남아 있다.
북스테후데는 당대 최고로 영향력을 떨치던 존경받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 출 생 장소가 확실하지 않고 유년시절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지만, 음악교육은 헬싱보르(1638경~1641)와 헬싱괴르(엘시노르, 1642경~1671)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아버지에게 처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688년 뤼베크에 정착해서 장크트마리아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고, 그곳에서 작곡가로 명성을 얻어 이 도시를 북부 독일 음악가들의 활동중심지로 만들었다. 1703 년 젊은 헨델이 그를 방문했고 1705년 그를 보기 위해 젊은 바흐가 320㎞가 넘는 길을 걸어왔다. 젊은 헨델과 바흐는 모두 뤼베크에 있는 이 대가의 자리를 계승하려 했지만, 딸 중 하나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자리를 포기했다. 교회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의무에는 공개축제와 이 도시의 대상인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위해 작곡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상당한 성악곡과 기악곡들을 작곡했는데 이들 중 많은 곡이 20세기에 와서야 재발견되었고, 잃어버린 곡들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단순하고 유쾌한 그의 기악곡은 구성력이 좋았지만 기술적 경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가 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은 오르간 작품들인데, 이중에는 토카타·전주곡·푸가·샤콘·코랄과 J.S. 바흐의 <파사칼리아 C단조〉의 기초가 된 파사칼리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전주곡은 대개 짤막한 길이로 되어 있고, 1곡을 제외하고는 바흐 전주곡과는 달리 이어지는 푸가와 주제적 연관이 없었다. 하프시코드 곡 대다수가 소실되었다. 성악곡은 주로 다양한 형태의 교회 칸타타들이 많고, 그중 100여 곡 이상이 남아 있다. 가사는 예배 의전에서 가져온 것은 거의 없고, 대개 성서 구절이나 찬미가집, 당시의 종교 시들에서 가져왔다. 한결같이 신앙심이 넘치면서도 단순하여 바흐 계승자들의 장식적 음악과 대조를 이룬다. 그의 성악곡 중 일부는 크리스마스 5주 전 일요일마다 늦은 오후에 성마리아 교회에서 열린 성악·기악 연주회인 유명한 '아벤트무지크'를 위해 작곡한 것이었다. 이 연주는 1673년 북스테후데가 이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을 처음으로 제도화한 것으로 뤼베크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19세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북스테후데와 바흐와 관련된 결혼에 관한 에피소드
1705년의 10월에 20세가 된 요한 세바츠챤 바흐는 당시 취직하고 있던 아른쉬타트의 성직회의로부터 1개월의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370킬로쯤 떨어진 북부 독일의 마을 뤼벡까지 도보로 여행을 했다. 여기의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는 북스테후데의 예술에 반한 그는 1개월의 체재의 예정을 4개월이나 연기해 버렸다.
뤼벡에서 바흐가 북스테후데의 개인적인 지도를 받고 있는 동안에 북스테후데는 바흐의 터질듯이 풍족한 음악성에 완전히 반해(?) 자신의 후계자를 삼으려고 마음을 정했다. 북스테후데는 이미 69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흐의 뛰어난 연주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 후계자가 되어주면 좋겠으나, 그러나 뭐라고 해도 그 율법 때문에 말이야'하고 수군대는 것이었다.
그 '율법'이란? 그것은 이곳의 오르가니스트의 후계자는 현 오르가니스트의 아들이나 혹은 그 장녀의 남편에 한한다고 하는 것인데, 실제로 북스테후데 자신도 1667년에 전임자 프란츠 튠다의 장녀와 결혼함으로써 이 지위를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북스테후데는 바흐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유명한 성 마리아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는 것외에 또한 오래오래 거장 북스테후데를 장인으로 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정말로 만족스런 얘기인 것이다.
북스테후데에게는 딸이 여섯 있었다. 장녀라는 것은 엄마 대신으로 여러 모로 가정을 돌보고 있던 탓도 있겠지만, 이미 살림에 쪼들리기 시작했고, 게다가 다부진 표정의 처녀로서 안나 마르가레타라는 이미 30세가 되어 있었다. 바흐보다 열살 연상이 된다.
북스테후데의 설득방법이 오르간만큼은 솜씨가 좋지못했던지, 그렇지 않으면 아른쉬타트에 남기고 온 사랑하는 마리아 바바라의 마음이 통했는지, 어쨌든 바흐는 생각다 못한 끝에 이 대 오르가니스트와 정든 사람들과 헤어져 이 지방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날 북스테후데는 유달리 비통한 음률을 오르간에 실어서 바흐를 배웅했다고 한다.
이 마리아 바바라는 바흐의 최초의 부인이 되는 사람으로, 또 사촌의 관계에 있고, 세바스챤보다 한살 아래로 어릴 때부터 서로 마음이 맞고 있었던 것이다. 대작곡가로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만약 바흐가 북스후프데의 장녀와 결혼했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북 스후프데의 장녀가 반드시 악처가 된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바흐가 여기에서 이 의사표시를 받기 꼭 2년 전에 그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이 함부르그에서 이 퀴벡에 왔다. 역시 북스테후데에게 오르간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도 또한 북스테후데의 눈에 들었다. 후계자가 되어달라고 간원했으나 거절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장녀의 얘기 외에는 거절할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헨델은 바흐와 같은 나이로 약 1개월 일찍 태어났을 뿐이다. 어쨌든 젊은 날의 두 사람의 악성이 두려워 한 처녀였던 것이다. 악처가 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공처는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어쨌든 바흐는 음악가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