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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성당과 박은종 신부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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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포 [490817] 쪽지 캡슐

2000-03-12 ㅣ No.9157

 

아래 내용은 2000년 2월 7일 박 은종 신부 영결미사 강론의 원문입니다.  

      (강론자는 박신부님의 동기 신부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우리는 우리 곁을 떠난 사제 박 은종 (사도요한)의 장례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들 사제를 가슴에 묻어며  비통에 젖어있는 어머님, 아버님과 형제, 유가족 여러분께 마음으로 위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시간, 지난 15년 세월, 박 신부와의 만남 속에 저의 각인된 바를 몇 말씀 드리며 강론을 대신 할까 합니다.

 

1985년 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낙산 언덕에서 처음 만난 박 신부. 왜소한 체구, 소박한 용모, 검은 색 두툼한 안경테 사이로 비춰진 작고 빛나는 눈동자는 진리와 정의를 갈망하는 젊은 구도인의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데, 그의 맑고 투명한 눈빛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이었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양심으로 표징적 의미를 더했습니다.

 

부끄러운 듯 수줍어하는 모습에서 상대의 세밀한 마음 구석까지 헤아려 주는 섬세함과 잔잔함을 지닌 박 신부, 그 섬세함이 풍진 세상의 가운데에 우뚝 서려했던 박 신부의 마음을 더욱 쓰리고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의 별명은 실버벨이라 불렀습니다. 금종 보단 화려하지 않은 은종으로, 세상 어둠과 탐욕과 이기의 복판에 종을  울리는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불렀던 별명입니다. 그래서 그런 건지 그는 제 삶의 밑바닥을 뒤흔들어놓는 실버벨이 돼서 이렇게 누워 있는가 봅니다.

 

저의 안일과 위선, 거짓과 불충실의 삶의 중심에 종을 울린 결과가 되었습니다.

밖으론 부드러운 듯, 속으론 강한 냉정함을 소유한 박 신부는 강자 앞에 굴복하지 않았고 약자 앞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난히 삶의 시련이 컷고 보이지 않는 마음 고생을 많이 했는가 봅니다.

 

신학생 시절, 산악반을 결성하고 설악산을 등반하는데 있었던 일입니다.

등산을 하는 당일 아침, 식량과 장비를 배낭에 꾸려 산을 오르는데, 정상을 앞두고 이 친구가 탈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몸이 약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무거운 짐을 떠맡기고 싶은 마음의 분위기를 알고는 자신의 배낭에 식량과 장비를 가득 담고 산을 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론 바보스러울 만큼 고집 세고 타협할 줄 몰랐던 그의 성격의 한 단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의 산 정상을 향해 출발한 한 젊은 사제가, 우리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무관심과 안일함과 이기로 인해 그의 생의 배낭에 넣어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눌려 탈진되고 싸늘히 굳어버린 시신 앞에 서 있습니다.

 

박 신부의 신학교 생활은 잡초와 같이, 뽑아버리려면 더욱 강하게 뿌리를 내렸고. 밟으면 더욱 강한 줄기로 자라는 모습이었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으로 살았고, 가난한 사제로 살다가 생의 말년이 되어. 깡통 들고 동냥 신부가 되겠다던 친구야 !

너의 꿈은 어디 갔니?

 

괴팍한 너의 야심을 난 그렇게 존경의 마음으로 대했던걸 넌 알지? 내가 자동차 두 번 바꿀 동안 폐차 직전의 작은 차를 붕붕거리며 활짝 웃던 넌. 내가 좋아하는 친구였고

존경하는 사제였는데 이게 뭐니?

 

언젠가 네가 나에게 고해성사를 받으며 흘렸던 눈물을 난 기억한다. 별 대단한 잘못도 아닌걸 가지고 흘렸던 양심의 눈물!  너의 고백이 나의 위선의 삶의 껍질을 벗겨냈고 네 눈물의 순수함이 나의 탁한 마을을 씻어주었던 그 사건을 친구는 아는가 !

 

최근, 박 신부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넌 인간과 사물을 대할 때 장점을 잘 보지만 난 인간과 사물을 대할 때 단점을 잘 보지,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 ]라고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전 현실에 타협과 안주에 능한 사람이었고 박 신부는 노예처럼 현실에 끌려가는 사람이길 싫어했습니다.

 

그의 맑은 눈에는 그렇게 세상과 교회의 단점이 더욱 선명히 드러났던가 봅니다. 길들여지지 않고 홀로 서기를 고집스럽게 표명했던 그는, 그렇게 시리도록 아픈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굳어진 몸으로 우리 앞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무언의 언어로 친구는 제게 말합니다.

 

위선과 이중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사제로서 너 자신에 정직하라고. 그리고, 네가 누리는 안락함은 세상 그 누구의 고뇌와 피땀의 결실이고. 지금 네가 누리는 호의와 찬사는 세상 그 누구의 궁핍과 수고의 결과라는 것을 알라고 말합니다.

 

은종아 !

 

삶의 무거운 배낭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안에 편히 쉬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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