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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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통노조,청소하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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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starkid67] 쪽지 캡슐

2000-12-22 ㅣ No.15943

 지금 시간은 12월 22일 오전 8시 38분.

 제가 있는 이곳은 명동성당 건너편 YWCA 옆 서울은행 건물 5층입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국통신 노조원들은 지금 청소하고 있습니다.

 

 새벽 2시경, 농성을 풀겠다는 집행부의 발표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더군요.

 끝까지 싸우겠다는 구호를 계속 외치더군요.

 저 사람들은 언제까지 모여 있을 것인가? 이미 그 정도를 지난 것 같은데...

 그러기를 1시간 여, 노조원들의 구호와 노래소리를 들으며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사무실 의자 세 개를 붙여놓은 위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집에 가자~"라는 고함소리도 들리고,

 눈을 떠보니 6시경이었습니다.

 어둑어둑한 창밖을 내려다보니 성당 오르막길에 개미떼처럼 누워있던

 사람들은 많이 없어졌고, 명동거리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아침 7시 30분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노조원 서로들에게 수고했다며 인사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조심해가라고... 수고하라고...

 

 한쪽에서는 지난 사나흘 동안 보온제 역할을 한 스치로폴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뜯지도 않은 채 버려진 반찬박스가 놓여있고, 그 옆에는 얇은 이불 몇 채를

 등에 짐어지고 앉아 담배를 피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7시 30분 미사는 이요섭 신부님이셨습니다.

 제가 교리공부하러 6개월 동안 명동성당을 오가면서

 오늘처럼 이 신부님의 얼굴이 저토록 부어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마치 ’부풀다가 만 찐빵 같다’라고 하면 상상이 가시겠습니까?

 밤새 한숨도 못주무신 모양이었습니다.

 

 하긴 분식점 의자 두 개만 붙여놔도 쿨쿨~ 잘 자는 저도

 지난 사나흘 동안 한국통신 노조의 밤낮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스피커 공격에 이제 환청까지 들릴 정도인데 오죽하시겠습니까.

 

 제가 왜 이 사무실에서 밤을 지새웠는지 다들 궁금해 하실 겁니다.

 저는 프리랜서입니다. 일명 백수라고도 합니다.

 저 역시 13년 근무하던 S그룹에서 명예퇴직을 당하고,

 2년 계약직으로 있다가 지난 9월 30일 퇴직한 사람입니다.

 퇴직 후 처음으로 들어온 일감(어쩌면 이 일을 앞으로 제게 생업이 될 지 모릅니다)을

 열심히 해보겠다고 일념으로, 아는 분 사무실을 빌려 지난 주부터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명동성당이 마주 보이는 이곳입니다.

 

 이대로 퇴직을 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2년 동안 수 많은 갈등과 고민으로 만신창이가 된 저를 일으켜준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작년 12월초, 요즘처럼 차가운 날씨가 몰아치던 날 명동성당 12월 교리반에 등록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 18일 영세를 받았습니다. 세례명은 마리아입니다.   

 저는 오늘 오후 3시까지 제가 작업한 일감을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제 작업은 정신을 집중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명동성당 앞에서 보낸 지난 사나흘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데모하는 분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내 신앙만을 고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한국통신 노조의 주장이 얼마나 옳고 설득력이 있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통신 노조의 주장을 찬찬히 읽기 전에 제가 겪은 지난 사나흘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노조 이탈자를 막기 위해 성당입구를 바리케이트로 치고

 미사 참석하는 사람에게 위압적인 목소리로 어디가냐고 물으며

 위 아래로 훑어내리고,

 본당까지의 길을 마지못해 내주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하고,

 춥다는 날씨 명분으로 성당 전체를 소주로 물들이며

 구유 앞까지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비닐하우스를 어지럽게 설치하고,

 적어도 미사시간에는 스피커를 끄거나 줄이는 아량(?)를 배풀 수도 있으련만

 전혀 상관하지 않고 꽝꽝~ 틀어대고,

 새벽녁까지 어느 여자 가수분 나와서 쩌렁쩌렁 노래해서

 경기 일으킬 정도로 뇌파를 요동치게 만들고, 그나마 민중가요 테이프를 틀어주면

 살 것 같았습니다. (한국통신 노조의 스피커 성능, 정말 좋습니다)

 

 그래도 어제는 조금 나아졌습니다.

 굿뉴스에 올라온 많은 분들의 의견과

 판공성사 및 미사에 참석한 ’어머니(=아줌마)들’의 직설화법에 의한 꾸중 덕분인지,

 

 바리케이트는 없어지고,

 신자들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어느 정도 확보해주고,

 본당 앞에는 ’신자분들 미사 가신다’며 안내하는 분도 있고,

 본당 앞 낮은 계단에 걸려 넘어진 제게 다치지 않았냐며 묻는 분도 계시고.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한통 노조 스피커에 맞불작전하듯 잡음 가득한 행진곡풍을 서곡으로 삼은

 성당안내방송도 없었을 것 입니다.

 (정말 성당 스피커는 후졌나봅니다.

  저는 처음 성당안내방송이 휴전선 대북방송인줄 알았습니다)

 

 이제 한국통신 노조가 있던 자리에 어떤 집회가 열릴까요?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은행 노조도 농성을 해야하는 데

 한국통신이 저러고 있으면 어디가서 하나? 함께 하나?

 은행 노조가 다시 명동성당을 차지(?)하게 되나요?

 

 만약, 대규모의 힘이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집회의 자유’를 찾는다면,

 저는 ’나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신앙의 자유’를 지키겠다고 말하겠습니다.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복면의 사나이들의 의심에 찬 눈길을 받고,

 비닐하우스를 껑충껑충 뛰어다니기 싫습니다.

 

 명동성당 앞에서 집회를 꿈꾸시는 분들,

 기본을 지켜주십시요. 단지 FOR가 아니라 WITH입니다.

 

 글을 쓰는 동안 1시간이 지났습니다.

 창 밖을 보고 오겠습니다.

 

 햇볕을 받은 비닐하우스 잔해들이 흰 눈처럼 보입니다.

 아직도 계단 앞에는 많은 분들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가끔 북소리도 둥둥~ 들려옵니다.

  (한통노조 북소리가 아니고 코리아극장쪽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립니다.

   무슨 집회가 또 있나봅니다...사랑은 아무나하나..데모는 아무나하나..)

 

 성당 오르막 길에 놓여진 7개의 이동식화장실만이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습니다.

 (화장실아, 고생했다)

 

 저는 이제 일을 하겠습니다.

 환청소리가 아직도 들립니다.

 눈 앞에 불나방도 몇 마리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제 본당 앞에서 넘어진 무릎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습니다.

 이 멍이 빨리 사라지길 기도합니다.

 

 창 밖에 보이는 명동성당은 오늘따라 환한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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