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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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벅찬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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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연 [communion] 쪽지 캡슐

2002-05-31 ㅣ No.34397

제가 아는 분 중에..

이제 사제 서품을 얼마 안 남겨두신 부제님이 계십니다.

에전에 제가...

’뭘 알아야 면장을 해먹지.’라는 당돌한 생각으로 가톨릭 교리신학원 통신교리 과정에 등록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 통신교리는 2년 과정이었는데...

그 부제님께서는 1학년 때 1년 동안 제 답안지를 채점해주시던 분이셨답니다. (당시는 학사님이셨죠.)

 

그 통신교리는..

한 달에 한번씩 주어진 과제물을 풀어서 답안지를 신학원으로 보내면..

채점을 해서 다시 반송해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근데 그 답안지 맨 마지막 장을 보면..

’영원으로의 여정’이라는 빈 페이지가 있었습니다..

이 곳에 채점하시는 평가자 분께 질문이나 공부하다가 느낀 이런 저런 감상을 보내드리면..

그 평가자 분께서 ’교무사항’이라는 여백에 답장을 해주시는 거였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학사님과 메일을 주고 받게 됐는데..

알고 보니 이 학사님께선 저와 같은 학번 동기셨습니다..

근데 전 제 동기들보다 한 살이 어립니다.

전 당연히 그 학사님께 이 사실을 숨기고 마음껏 일년 내내 맞먹었답니다.(그 사실이 밝혀진 것은 최근입니다.)

 

게으르고 열등한데다가 버르장머리까지 고약한 제자 덕분에..

학사님께선 고생 꽤나 하셨습니다.

원칙대로라면 한 달에 한번씩 꼬박꼬박 답안을 제출했어야 했는데..

제 평소 생활 태도가 늘 이런 식입니다.

매는 나중에 맞는 게 덜 아프다. 늦게 일어나는 벌레가 안 잡아먹힌다..

그래서 전 제멋대로 시간날 때마다 풀어서 제출하곤 했습니다..

모른 척 하고 엄청나게 밀린 답안지를 몰아서 보내드리곤 했죠.

 

그러다 보니 가끔 학사님께선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내주셨답니다.

동기님..(저를 동기님 혹은 제자님이라고 부르셨거든요.) 이번 달 답안지가 오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럼 전 줄곧 딴전 피우기, 대답 회피하기 작전으로 은근슬쩍 넘어갔습니다.

답메일을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내용으로 채워서 보내드리곤 했죠..

공부하다가 궁금한 것이나 신앙에 관한 내용들은 쏙 빼놓은 채로요.(예를 들면 제가 이곳, 게시판에 도배하는 글과 같은.. 그런 글들이지요.)

그리고는..

우하하.. 학사님.. 재미있으시죠? 웃으세요.. ’소문만복래’란 말도 있잖습니까...

이렇게 너스레를 떨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슬쩍 넘어갔더랬습니다.

 

이런 일이 수 차례 거듭되니..

나중엔 경고의 메일이 날아들더군요.

제목은.. ’학업에 소홀히 하는 제자에게 보내는 사부의 따끔한 일침’..이었나.. 하여튼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메일을 받았음에도 전 아랑곳하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적반하장, 큰소리 땅땅 치기 작전으로 나갔죠.

사부님..(전 학사님을 사부님이라고 불러드렸답니다.) 이렇게 빚쟁이마냥 독촉하시면 제가 너무 부담스러워집니다... 저라고 비지니스가 없겠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통신교리 확~~ 때려치는 수가 있습니다..

또는..

이런 제자를 두신 것이 사부님 팔자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게 속 편하실 겁니다...

이런 당돌발칙한 답을 해드렸었답니다. ^^

 

전 그렇게 줄기차게 버티다가 학기가 끝날 무렵에야 황급히 답안지를 몰아보내드리곤 했었습니다..

한번은 무려 4개월인가.. 그 정도의 분량을 한꺼번에 보내드리기도 했었죠.

그 때 그 답안지를 받아보시고 학사님께서 보내셨던 메일이 생각나는군요.

동기님. 전 어제 동기님의 답안지를 채점하느라 밤 늦게까지 책상에 붙어있었답니다. 답안지를 다 채점하고 나니 뒷목이 뻣뻣해지더군요..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인내와 아량과 관용으로 저를 봐주셨던 사부님께..

전 일년을 마칠 즈음 보내드린 ’영원으로의 여정’에 이런 글로 사부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정말 이런 커리큘럼인지 알았다면 절대로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XX학, XX론.. 대체 교재만 펼치면 잠이 솔솔 쏟아집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하느님의 은총이 도리어 ’해석불가’가 되지 뭡니까..

제가 무슨 배짱으로 이런 난해한 학문에 도전했는지 저도 저를 모르겠다니까요..

그리고 배운 것을 써먹을 자신도 없습니다.

책 덮으면 바로 깡그리 잊어버리는 놀랍고도 기묘한 두뇌구조 덕분이죠.. 등등..

 

하지만 속 썩이는 제자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말이 있듯이...

기묘하게도 학사님과 메일 왕래는 끊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년이 학사님께서 부제 서품을 받으시는 해였죠.  

 

전 부제서품식이 있다는 주보의 공고를 보고...

그 동안 속 썩여드린 것을 단번에 만회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부제서품식에 가서 ’제가 그 지진아, 열등생 아무개예요..’ 라고 말씀드리면서 꽃다발이라도 안겨드리면 그 동안 고생하셨던 것이 봄눈 녹듯이 녹아버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봉사하고 있는 본당에 서품을 받으시는 부제님이 계시지 뭡니까...

본당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 서품식에 간다는 하길래..

주저하지 않고 냅다 신청을 했습니다..

사실 전 본당의 부제님은 잘 알지 못하거든요.

하지만 뭐.. 1000원 내면 김밥도 준다는데.. 여하튼 모로 가나 서울로만 가면 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차를 타고 가서 본당의 부제님이 아닌 엄한(?) 부제님을 만나 뵈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제가 생각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서품식을 며칠 앞두고.. 전 서품 대상 부제님들의 명단을 보게 됐습니다.

근데.. 근데..

분명히 계셔야 할 저의 사부님 존함이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앗! 이럴 수가.. 사부님께서 혹시 나한테 뻥을 치신 건가.. 아니면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안다고 혹시 유급당하셨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신학생 사칭 신종 사기단에 걸려든 건가..

 

정말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미 신청을 한 뒤였고.. 게다가 제가 부제 서품식에 간다는 소문이 좌악~~ 퍼져있었을 때였기 때문에..(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 채로..)

전 울며 겨자먹기로 서품식에 가야만 했습니다.

잔머리의 끝은 독박이라는 것을 또 한번 절감했죠.

 

그리고 전 사부님께 항의 메일을 보내드렸습니다.

사부님.. 대체 어찌 되신 일입니까..

결국.. 알고 보니.. 저의 사부님께선 서울 교구에 계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전 교리신학원이 서울에 있으니 당연히 서울에 계신 학사님일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뭡니까.. 뭡니까..를 외치는 제게..

사부님께선 무척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고소하다는 듯한 답메일을 주셨지요.

 

그리고 그 해 겨울..

사부님께선 드디어 부제님이 되셨답니다.

전 정작 그 부제서품식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부님의 사회적 위치가 있으신 터라...

함부로 맞먹어서는 안될 신분(?)이 되셨지만..

전 또 다른 괘씸한 생각을 합니다..

이제 곧 신부님이 되실테니.. 지금 실컷 맞먹어 둬야지..

그래서 전 지금도 매번 사부님을 골탕먹이는 메일을 보내지요.

 

예를 들면 이런 메일입니다..

사부님.. 얼굴 한 번 못 뵌 분이시지만.. 사부님을 생각하면 정말 예전부터 알았던 분 같아요..

아마 전생에 각별한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아!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런 인연이 아니었을까요?

굳이 비유하자면..

.

.

.

.

.

’톰과 제리’..같은.. (물론 사부님께서 톰이시죠.) 푸하하..

 

 

 

 

..................

 

 

제가 저희 사부님 덕에 하는 수 없이(?) 쫓아간 부제 서품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주교님께서 부제님들 한분 한분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이렇게 안수를 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그 일들이 다 이루어지길 빕니다.’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의 토씨까지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은 이런 말씀이셨거든요.

 

그리고 부제 서품식에 모이신 그 많은 신자분들께서..

한 목소리로 서품식 전에 묵주기도를 바치셨는데..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아.. 이것이야말로 신자와 사제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로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전...

분명히 그 곳에서 성품성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Charisma’ 란 단어..

사전을 찾아보면 ’성령의 은사’ 라는 뜻이 있다죠.

그 ’Charisma’를 분명 체험할 수 있었죠.

 

저 개인적으로도..

부제서품식은.. 참으로 가슴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제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왜 사제여야 하는가’...

이 질문을 더 할 나위 없이 명쾌하게 풀어준, 저로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로 전..

미사를 집전하시거나 성무를 집행하시는 사제를..

마음을 다해 존중하고 존경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서품식이라는 ’예식’이 장엄하고 웅장해서..

그 ’예식’의 경건함에 큰 감동을 받아..

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보여지는 ’예식’은 인간의 손으로 준비된 것이었지만..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전...

저희 사부님께서 사제 서품을 받으시는 날..

꼭 꽃다발을 들고 찾아 뵐 겁니다.

지금부터 단단히 작심하고 있죠.

뭐.. 얻어 타고 갈 관광버스가 없더라도요..

 

그 서품식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가득 차오름을 느낍니다.

제 가슴에, 제 머리에 하느님께서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것 같아..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전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곤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전 사제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게는 주님을 향한 크나큰 신앙고백인 셈입니다.

이제까지 주님께 해드리지 못했던.. 신앙고백이죠.

 

간혹..

사제에 관한 글들이 게시판을 채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할 저만의 생각일지 몰라도..

전 그 무언가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앞으로 훌륭한 사제가 되실 것이 뻔한(?) 저희 사부님을 위해..

전 앞으로 꾸준히 기도할 겁니다.

아직 얼굴 한번 뵙지 못한 분이시지만..

영육간에 늘 건강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p/s

전 결국.. 기어이.. 그 통신교리 과정 수료 못 했습니다.

제게는 너무... 어려운 과정이었답니다...

그래서 한 학기 남겨두고.. 잠시 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 그 부제님.. 이런 글 쓴다고 좋아하시지만은 않으실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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