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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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중산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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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bukhansan] 쪽지 캡슐

2010-09-07 ㅣ No.161767

 

대형 마트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상품마다에 일일이 붙여 있는 가격표에는 그 물건의 값이 먹여져 있습니다. 본당 신자도 얼마짜리라고 찍혀있습니다.

교무금 신립 현황, 성전개보수 공사비 봉헌 명세를 구역·반별 세대별로 가가호호 이름 본명 금액을 또렷하게 나열하여 주보에 끼워 돌리고 본당지에까지 편집해서 구·반장을 통해 배포합니다.

교회의 잔인무도한 죄악상, 오늘날의 마녀사냥입니다. 가난해서, 찌들어서 어려운 신자들이 쪽팔리고 서러워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시실새실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물론, 시장경제사회에서 교회운영에도 돈이 필요합니다. 교무금 신립세대가 본당교적 세대수의 ·· %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신립세대 중 절반의 신립금액이 겨우 ··원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하느님 앞에 죄송하고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의 문제요 사목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문을 닫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재정이 고갈되어서가 아니라 신자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사업을 하기 위하여 가난한 교우를 내쫓는 일이 생긴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가 날로 중산층 화되고 있습니다. 끔직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집이 중류이상 상류층의 집단이라면 이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 사교장으로 전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가난해야 합니다. 가난의 개념은 청빈을 뜻합니다. 풍요 속에서도 늘 곡간은 비어있어야 합니다.

가난 자체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부를 탐하는 사람의 마음이 죄악을 수반하기 때문에 가난을 택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의「가난」이란 말의 쓰임은 수덕적(修德的)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청빈(淸貧)은 소유욕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가난은 경제적 사회적인 상태보다는 정신적 성향이나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은 가난이 지니는 정신적 부(富)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고, 신약은 가난한 자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특권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청빈의 영성 안에 머물고 있는 교회라면 ‘봉헌금납부현황’이라는, 가난의 고통에 찌들려 있는 교우들을 쥐구멍으로 내모는 낮 뜨거운 방(榜)을 내 걸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눔의 의식을 상실했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자를 돌보지 못하는 교회는 청빈의 영성을 상실했음입니다.

 

옛날, 가난하고 고생하며 살 때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몹쓸 농담 중에 ‘중이 고기 맛을 보면 환장을 한다.’ 듯이 돈이 하도 설치는 세상이다 보니 돈맛을 알아서 이지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갖은 엄포 공갈 협박으로 헌금을 갹출해 내는 일부 개신교회들처럼 돈이 넘쳐 나는 걸 부러워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가난해야 함은 가난한자를 보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이해하고, 돕고, 스스로도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재물은 항상 넘쳐나야 하고 창고는 늘 비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회는 청빈을 말하기 이전에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바로 ‘신심의 빈곤‘ 입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산다고, 큰 차를 타고 다닌다고 그런 집이 모두 넉넉한 것은 아닙니다. 들어가 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봉헌금을 얼마를 내고 안 내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며 신심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지 까발리고 흔들어서 쥐구멍으로 몰아서 될 일은 아닙니다.

GNP가 10,000 불 20,000불이 되고 보니, 지폐가 풀풀 날아다니고 신용카드가 주머니 속에 그득하다보니, 아쉬운 거 없는 세상이 되다보니 가난의 신비를 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속리산 법주사의 세계 최대 입상(立像.높이 33m)인 미륵대불에 20여억 원을 들여 순금으로 씌운답니다. 지금 전국에 작은 사찰이건 큰 사찰이건 온통 불상이나 기둥 석가래 까지도 금으로 범벅을 해서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 볼 수가 없습니다.

신자들과 지역본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교구마다 수백억씩 들여 경쟁적으로 펼치는 대형성전이나 신학교 건축물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도절도 없이 동가숙서가식하시며 광야에 머무셨습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마르코복음서 6:8- 며 사셨던 예수님을 닮지 못하고 가난하고 고통에 신음하는 신자들을 모두 몰아세워 내 쫒고 교회를 ‘중상층화’ 시켜놓았습니다.

배포된 현황을 보노라면 기만원부터 3000만원까지 천차만별인데 과연 동내 골목 옆집 앞뒤집 이목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과연 누구리 이것이 ‘과부의 헌금’을 기리는 뜻이라고 변명하겠습니까? 이건 마치 사육차트를 목에 달아 매 놓고 소를 가두어 기르는 육우사육장이 연상됩니다.

봉헌의 척도는 액수가 아니라 정성이어야 합니다.

 

얼굴에 수심이 어리고 피로가 역역한 가난하고 어렵고 고통 받는 신자들은 미안해서, 쪽팔려서, 아니꼬워서, 찌들어서, 더러워서 교회를 속속 떠나가 버리고 이젠 보이지 않습니다.

냉답률이 매년 증가하고 주일미사 참례률이 매년 줄어듭니다. 매스컴에 빈번히 나타나는 그 수치는 놀랍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시대적 조류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이 세상에서 구원의 성사가 되어야할 교회가 권위주의와 돈냄새에 맞물려 세속주의로 타락한 교회의 참상입니다.

 

강북의 기독교 비율이 15%인데 반해 강남은 29%라고 합니다. 농어촌보다 도시의 비율도 마찬가지로 교회공동체 구성이 이미 중산층화 되었다는 현실입니다.

“교회의 중산층화는 각종 조사와 연구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 연구발표회에서 박문수 박사(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강사)는 ‘한국 교회가 중산층 교회로 굳어진 것이 갖는 의미‘를 검토하고, 이러한 계층화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떨어뜨리고 다른 계층의 사람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고 말했다.

인천교구 오경환 신부는 고소득 신자 가정이 늘어나는 현상과 관련해, ‘교회가 중산층에 몰려 있다는 증거‘이고 ‘이러한 현상은 향후 20여 년 동안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요안 신부-

 

“어느 날 갑자기 성당에서 사라지는 신자들이 늘고 있는 반면 그렇게 사라진 빈자리는 속속 중산층 신자들로 채워지고 있다”며 “가난한 이들을 사회복지적 혹은 시혜적 차원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본당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김태건 신부(순교복자 성직수도회)-

김신부는 또 “경제적 문제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신자들은 자의에 의해 쉬는 신자 보다 더 정신적으로 황폐해 지기 쉽다”며 “일선 본당에서는 다양한 문화선교 방법론과 가정사목 강화를 통해 이들이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당 가도 미사만 참여할 뿐 사람들하고 아는 척도 별로 못해요. 성당에서 할 일도 별로 없구요. 돈이 없으니까 신앙생활도 어려워지네요........”

“본당 봉사활동도 구역 반에도 누가 막는 건 아니지만 낄 수가 없어요.........”

정녕 교회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신자들을 몰아내고 쇠푼 좀 만지는 자들의 집단으로 남을 것인가.........

오!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들이 주님의 집 제일 안쪽에 머물며 평화를 얻게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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