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성지순례기]신나무골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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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simon] 쪽지 캡슐

2000-11-06 ㅣ No.298

안녕하세요..오랜만에 글을 남깁니다.

잠시 카메라의 고장으로 서울에서 잇었다가 성지순례를 시작했습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어제 왜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왜관 남부터미널로 향햇습니다.

남부터미널은 왜관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더군요..

터미널에서 신나무골로 가기위해 표를 파시는 분에게 물어보니 ’신동’이라는

마을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신나무골’로 가는 버스는 30분단위로 있었는데

요금은 일반버스 650원과 좌석버스 1,050원이었습니다. 일반버스는 0번, 좌석버스

는 215번..이렇게 두 버스를 타면 신동으로 가게 됩니다.

 

신동은 왜관에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더군요.. 기사아저씨께 알려달라고 한뒤

자리에 앉아서 그냥 풍경을 보았습니다. 서리가 내린 후에 벼를 수확하면 품질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이곳 지역에서는 모내기가 늦게 시작되었는지 아직 수확하지

않은 논이 제법 있더군요..

 

신동에 내린 후 바로 길을 건너면 건너편에 신나무골 성지라는 푯말이 보입니다.

 

신나무골은 1815년 을해박해 시에 이곳으로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교우촌이 형성

되었는데 아직도 그 구교의 후손들이 교우촌을 이루며 살고 잇습니다.

 

또한 신나무골은 대구를 지척에 두고 있기때문에 많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대구로

들어가기 위하여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신동마을에 들어가면 왼편으로 대구교구

의 첫 본당 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다른 곳의 성당터를 보면 그 안으로 들어

가지 못 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곳의 성당터는 안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방안까지 직

접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조그만 전시관도 있고 기도실도 있더군요..

 

성당터내에 들어가면 신나무골 학당이 있는데 1833년 이곳에서 한문과 교리를 함께

가르치던 최초의 학당이라고 합니다. 이 학당안에는 미사를 할 수 있는 제대와 마루

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신나무골 성지는 이선이(엘리사벳)의 묘지가 있습니다.

 

이선이(엘리사벳)은 박해시에 포졸들의 추적을 피하여 한티의 사기굴로 피난을

햇지만 바로 쫒아온 포졸들에 의해 잡히게 됩니다. 이때 포졸들이 성교를 버리라고

했지만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댓가로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작두로 이선이(엘리사벳)와 그 아들 배도령의 목를 자릅니다.

 

다른 순교자의 묘에 비해 이선이(엘리사벳)의 묘는 그 보존이 아주 잘 되어 있더군요

묘지 주변으로 나무가 많은 데 그곳에 십자가의 길을 할 수 있도록 나무 각처를 만

들어 두었습니다. 오늘은 대구의 한 레지오단체에서 오신분들이 과일을 나누어 주시

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신골성지는 교우촌으로서 그리고 다뷜뤼, 주문모, 최양업, 이리델 신부님 등 많은

신부님께서 활동지역으로 삼으셨던 곳이고 더불어 아직도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는

몇안되는 성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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