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성지순례ㅣ여행후기

[성지순례기]상주 신앙고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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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simon] 쪽지 캡슐

2000-11-06 ㅣ No.299

신나무골에서 왜관으로 오기 위해 차를 잡아탔습니다. 성주에 사시는 분들이셨는데

고맙게도 상주로 간다고 말씀드리니까 구미터미널까지 직접 태워다 주셨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구미에서 상주로 오기위해서는 구미터미널에서 30분마다 한대가 잇는 버스를 타야

합니다. 요금은 4,200원인데 한시간정도가 걸리더군요..

 

상주터미널에서 내려 신앙고백비로 가기 위하여 청리행 버스를 탔습니다.

청리행 버스는 김천으로가는 버스를 타면 내릴 수 있는데 700원이었습니다.

 

청리에서 내려 기차역 반대의 길로 좀 내려오면 인터넷게임방이 나오고 그 길로

쭉 들어가야 합니다. 길을 쭉 들어가면 다리가 나오고 그 앞으로 청리장로교회가

나옵니다. 교회에서 우측으로 빠지는 길을 계속걸어가면 다리가 나오고 그 다리를

넘어 계속걸어가면 삼괴1리라는 안내판이 나옵니다. 그냥 계속 직진을 해서 조금 내

려가면 우측으로 슈퍼가 나오는 데 그 골목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걸어가면 석산이라

는 안내돌이 나오고 조그만 다리를 건너 다시 계속들어가면 바로 신앙고백비가

나옵니다.

 

후...

 

왜 이렇게 길을 자세하게 써놓냐면 이 길이 좀 찾기가 어려워서 나중에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서입니다.

삼괴리에 들어가서 ’석남문’또는 ’돌남문’이라고 묻거나 ’천주교성지’라고 말하면

동네 분들 대부분이 잘 가르쳐줍니다.

 

상주의 신앙고백비는 우리 나라에 깄는 유일한 신앙고백비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큽니다. 이곳 지역은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徐光修)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안내파넹 쓰여잇더군요...특히 덕산리에 서산 중턱에는

신자들을 처형하던 ’화형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어딘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앙고백비는 김삼록이라는 교우가 이곳으로 내려온후 자신의 신앙을 꾿꾿히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당시에는 아직 자잘한 박해가 남아 잇어서 김삼록은 신앙고백

비를 만든 후 그 앞에 나무를 많이 심어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 신앙고백비를 발견한 것도 오래되지 않은 1982년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이지역 본당의 신자들이 성지로 조성해서 십자가의 길도 아주 잘 꾸며져

있더군요..지금까지 성지중에 대희년기념비가 잇는 유일한 성당이기도 했습니다.

 

신앙고백비는 127센티미터, 폭 39센티미터, 두께 22센티미터의 모습으로 잇는데

직접보면 선비가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돌에 천주를 공경하는 글과

교황, 신부, 신자를 공경하는 글이 적혀 있고 그 돌위에 갓을 쒸운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렇게 고백비를 지었다는 것 자체가 큰 용기가 없더라면 불 가능 했을

것입니다.

 

요즘은 5시정도가 되면 해가 일찍 떨어지기 때문에 빨리 점촌으로 이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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