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4일 (월)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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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체를 모시는 올바른 자세-----송용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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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9 ㅣ No.1080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리스도의 몸' 하며 성체를 분배할 때 가끔 신자들이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면 흘낏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이 사람이 신자가 아닌가? '아멘" 하고 응답하는 것을 모르나? 괜히 분심도 든다. 요즘 본당에서 성체 모독이나 훼손이 적지 않아 영성체 전에 해설자가 '가톨릭 신자분만' 또는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신 분만' 하며 안내를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제단에서 성체를 축성하는 사제의 마음에도 적지 않은 의문이 들 때가 있는데, 하물며 신자들이 성체를 대하는 태도야 오죽하랴. '이것이 정말 그리스도의 몸일까?' '내가 지난주에 주일미사에 빠졌는데 성체를 모셔도 되나?' '밥 먹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하루에 두 번 성체를 모셔도 되나?' 등의 질문이 마음속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

   성체에 대한 어려운 교리는 좀 뒤로 미루자. 우선 신자들의 성체신심에 대한 것부터 한 마디 하고 싶다. 독일교회에서 적지 않게 놀란 점 하나는 유럽 신자들 중에는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다가도 고해성사를 보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성체를 모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성체에 대한 교리와 신앙이 유럽교회가 우리와 다르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처럼 주일미사 한 번 빠지면 대죄이고, 고해성사를 볼 기회를 놓치면 성체마저도 모시지 못하는 죄스러움으로 한 주간을 허전하게 보내야 하는 그런 신자는 유럽에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가 신앙의 중심으로 성체에 대한 공경과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왜 성체를 교회가 그토록 존귀 하게 여기는지,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지, 그렇게 변화된 성체를 모시면서도 내 마음에서는 왜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는지 신자들은 솔직히 잘 모른다. 그냥 교 회가 교리적으로 가르친 내용을 굳게 믿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성체에는 가톨릭 신앙의 진수가 담겨 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신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세상 속의 하느님이 되신 분이다. 이제는 말씀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을 알리는 엄위하신 구약의 하느님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웃고 우는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임마누엘)' 육肉을 취하신 하느님이 되셨다. 하느님의 신성 안에서 인성이 받아들여지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이것이야말로 성탄과 강생의 신비가 아니겠는가? 하느님은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당신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셨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실 협조자 성령을 파견하시어 우리와 더 가깝게 있기를 바라셨고, 일상의 음식인 빵과 포도주 안에 당신의 형상을 불어넣어 주셨 다.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맛보아도 알 수 없는' 성체의 신비 가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통해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성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의 최후만찬은 단순한 식사나 상징 이 아니라 십자가에 봉헌될 당신 살과 피를 완전하게 내어주는 성사聖事, 곧 거룩한 사건이 되었다. 

  가톨릭 신앙을 성사적 신앙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 있게 전해 주는 표징과 실재를 신앙의 중심에 두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지금 만날 수 없는 그리스도를 미사 때 마다 살갑게 만나게 해주는 성체성사, 그것도 모자라 성체의 형상으로 늘 감실 안에 머무신다. 성체가 모셔진 곳은 예수님 의 현존이 약속된 만남의 장소가 된다. 그곳이 성당이든, 성체 조배실이든, 성체강복과 봉성체를 하는 순간이든 그분은 우리 에게 자신을 드러내 주신다. 그뿐 아니라 미사 때 성체를 영하는 우리의 마음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성전'인 것이다.

   성변화의 신비는 우리가 증명해 낼 대상이 아니다. 우리한테는 성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본래 인간은 표징을 통해서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마음 그대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내게 보 여주는 작은 행위, 위로의 손길, 정성이 담긴 선물, 입가에 띈 웃음으로 전해진다. 병든 아내에게 인삼을 산삼으로 속여 먹인 남편의 정성에 치유된 사례가 있다. 아내를 속인 미안한 마음 을 고백한 남편에게 아내는 "저는 산삼도 인삼도 아닌 오직 당신의 사랑을 받아먹었을 뿐이에요." 했다.

   꽃장수에게 꽃은 돈벌이의 수단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려는 이에게는 사랑 자체가 된다. 의심하는 이에게는 성체가 상징일 뿐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받아 모시는 이에게는 천국의 참된 음식이 된다. 미사 내내 분심 속에 성체만 날름 받아 먹고 바쁘게 성당을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성체는 가톨릭 신자의 의무이지만, 죄를 피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닦은 후 교회가 가르친 대로 공심재를 지키면서 정성껏 성체를 모신 사람에게 성체는 생명의 빵이요 영혼의 양식이다. 그 힘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세상에 봉사하며, 영원을 '지금 여기서' 살 아간다.

   이토록 존귀한 성체이기에 중세시대에는 성체를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받아 모실 수 없었던 때도 있었고, 과거에는 성체를 모시기 전날 하루를 꼬박 굶기도 했다. 건강을 위해 내시경 검사를 할 때에는 전날 저녁부터 굶으면서, 예수님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는 1시간을 준비하는 데도 인색한 것이 우리다. 과도 한 성체신심으로 교회 안에서 폐단도 많았고, 성체를 신비적으로 대하려던 잘못된 신심이 교정된 것은 잘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성체 자체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성체성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가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돌아보는 것 못지않게 빵의 형상 속에서 당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 은총에 감사하는 일도 중요하다. 죄를 의식하고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모신 성체는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모신 성체보다 더 존귀하다. 성체는 양식인 동시에 '영혼의 약藥'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 중에 그리스도를 직접 받아 모실 자격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교회가 신자들에게 하루 두 번까지 영성체를 허락한 것은 영성체의 유익함과 함께 그 남용을 경계한 현명한 판단이리라.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와 좋은 약재들을 집안에 쌓아두는 일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건강을 위해 성체를 받아 모시는 즐거움을 올 한 해 실천해보면 어떨까?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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