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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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들의 송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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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2-01-01 ㅣ No.3095

1월 2일 수요일, 요한복음 1장 19절-28절

 

"나는 이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귀신들의 송년회>

 

"자기 정체성 파악"이란 의미는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행동양식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어젯밤 저는 밤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뭔가 끄적거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수녀님들을 대상으로 한 피정강의차 요즘 제가 도심에서 꽤 떨어진 시골에 와있었거든요. "전기줄이 바람에 우는 소리치고는 너무도 크고, 아마 이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귀신들이 송년회한다고 모였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서 탁상시계의 시계바늘을 확인한 순간, 겨우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상한 소리는 다름아닌 수녀님들의 기도소리였습니다. 저녁 9시경부터 새해가 오는 순간까지 성체 앞에 앉아계시던 수녀님들은 시계바늘이 자정을 넘기는 순간에 맞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수녀님들의 노래소리가 복도를 통해 제 방까지 울려왔었는데, 저는 그 성스런 소리를 귀신소리로 알아듣다니...참으로 수녀님들의 영적 수준과 저의 영적 수준 차이는 크기만 합니다.

 

한해가 저무는 순간을 조용히 하느님 앞에 앉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새해 첫순간을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시간으로 할애한 수녀님들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 모습, 수녀님들의 자기 정체성에 가장 잘 드러맞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다 잠든 때, 또는 많은 사람들이 상업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해 의미없는 송년행사에 몰두할 때, 수녀님들은 성체 앞에서 세상을 위한 기도에 열중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흐믓한 일입니다.

 

수녀님들의 송년기도 모습, 자신들의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수녀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기억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있었고, 구세주의 내림을 위해 자신이 해야할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이 시대 최후의 예언자,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나는 이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이오." 비록 간단해 보이는 한 마디 말이지만, 세례자 요한의 겸손과 자기 사명에 대한 충실성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말입니다.

 

기다려왔던 구세주가 이 세상에 도래하자 자신이 그간 공들여 닦아놓은 터전을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즉시 내어드린 사람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제 사명을 다한 자기 앞에 놓여진 쓰디쓴 고난의 잔을 서슴없이 집어들고 돌아올수 없는 먼길을 떠난 겸손한 순례자,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끝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 구세주의 재림을 위해 기꺼이 자기 한몸 희생하는 용기, 그것이 올 한해 모든 그리스도인, 사제, 수도자들의 삶의 지표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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