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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마태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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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15 ㅣ No.147589

 

 

(공동번역성서) 2021. 6. 15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도란도란글방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마태5;43-48)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이라는 건 그대로 되라는 거거든요. ‘그 완전하심까지 열심히 달려서, 하는데 까지 해봐라.’라는 말이 아녜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거를? 성경에서의 아가페, 사랑은 그거예요. 진리(眞理)를 사랑으로 깨달아,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흘려주는 걸 사랑한다라고 그래요.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율법 전체를 살인, 간음, 거짓증거 이렇게 축약(縮約)을 해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사실, 율법은 전부 그 이야기라는 거예요. ‘살인(殺人)하지 마!’너희들이 익숙한 희생제사 반복해서 드리지 마! 그리고 진리가 아닌 율법을 네 남편으로 삼아 간음하지 마! 행위(行爲)의 아들 낳지 마!’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곡해(曲解)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전하지 마! 그게 거짓 증거(證據)~. 거짓 맹세(盟誓)~.

마치, 율법이 그러한 그냥, , 하느님의 명령(命令), 이런 것인 양 그렇게 알아, 다른 이들에게 전하면, 그거는 사망(死亡)을 전하는 것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그 율법을 거꾸로 듣고, 거꾸로 말을 하더라는 것이죠. 그거는 피조물(被造物)의 한계(限界)입니다.

주님이 내가 이제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줬으니까, 거짓말 하지 말고, 이제 그 진의(眞義)를 흘려주라!’라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오면 그렇게 될 거야~.’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의 진의(眞義)를 마음으로 가져, 하느님의 성전(聖殿)이 되는 거고, 그거를 히브리어로 그냥 읽으면 아브, 아바, 아버지예요. 그게. 아버지!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가 되는 거죠. 그 마음으로 내 마음이 된 그 진리, 그 마음으로 가난한 그 푸토코스,’ 그거 없으면 죽는 그런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는 거. 그게 이웃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가 되는 거예요. 하느님의 완전하심이 뭔지 우리가 알기나 해요? 몰라요. ‘너희 수준에서, 내가 이렇게 되면 완전이라고 해 줄게.’라는 말이에요.

보세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줘요. ()한 거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두 마음으로 그걸 곡해(曲解)해서, 그거를 그냥 율법으로 붙들어서, 그걸로 행위의 열매를 계속 낳는다고요. 그런데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어요. 바오로도 내가 열심을 부렸다. 난 거기에 대해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잘하는 건 줄 알았단 말이죠.

그런데 보니까 그게 전부 살인이고, 간음(姦淫)이고, 거짓증거였네. 그러면 진리를 안 나에게 있어서, 그 하느님의 원수가 누구예요? (진리를) 알기 전의 라니깐요. 그러니까 그 원수, 그 이웃을 우리는 항상 내 밖에서 찾으려고 하니까, 나를 늘 제외(除外)시킨다니깐요. 아니, 나와 관계(關係)없는 말씀은 우리 꺼 아니라니깐요. 다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뭐라고 그러냐면, 그렇게 아쿠오, 들었지?’ 율법이 그거잖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할게. 그 원수도 사랑해!’ 그래요. 이거 무슨 말일까요? 그렇게 내가 율법을 갖고 행위(行爲)의 죄()를 낳았어요. 처음부터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걸로 생명(生命)을 낳아버리면, 내가 하느님이라니깐요.

그런데 나는 피조물(被造物)이란 말이에요. 그 먼지가 어떻게 하느님의 말을 올바로 알아들어요?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 하늘의 것을 설명(說明)해 주기 위해, 이 땅의 것, 아래의 것, 이런 것들로 하늘을 설명하신단 말이에요.

그러면 성도(聖徒)라는 존재, 진리가 되는 그 존재에게 있어서 그 아래의 것, ‘야 그것도 사랑해야 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사랑스러운 게 되면, 죄까지도, 그렇다면 그 원수 짓을 한 그것까지도, 나의 선에 선용(善用)되는 것이었다면 나에게 있어서 죄가 삭제되는 거예요. 그걸 용서(容恕)’라고 한단 말이에요. 물론 진리가 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에요.

그냥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그게 멸망(滅亡)이에요. ‘네크로스의 사망. 죽음이라니깐요. 그런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걸 디딤돌로 딛고 생명으로 진리로 간 자들에게 있어서, 그거는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거 사랑해!’라고 하는 거예요.

실패(失敗)는 성공(成功)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죠?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실패 몇 번은 해 줘야 돼. 이런 말이 아녜요. 사실은요 완성, 성공. 그러면 성공이 되기까지의 그 과정(過程)은 전부 뭐예요? 실패예요, 99% 달성해도 실패예요. 이 실패를 거치지 않고 완성이 오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정석(定石)이라면, 이 실패(失敗)가 왜 나빠요? , 발차기를, 돌려차기를 연습하는 사람이 있어요. 삼천 번을 찼더니 그때 비로소 완성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이제 완성된 돌려차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 2999번까지의 그 사람의 발차기는 뭐예요? 다 실패예요.

그런데 보세요. 완성이 된 자에게 있어서, 이 실패는 즉시 삭제(削除)됩니다. 그러면 그 완성 지점에 올라간 이에게 있어서, 이 실패는 삭제(削除)되지만, 내 자랑이 돼요. 얘깃거리가 된다고요.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담(失敗談),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계속 그러는 거예요. 그게 자랑이거든요.

마찬가지예요, 진리가 된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 즉시 삭제(削除)된다고요. 그런데 그 아래에서 머무르고, ‘이게 다 아니야~? 이게 완성 아니야~?’ 그리고 어줍지 않은 돌려차기 하면은 펭귄 발차기 하는 거예요 심형래 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완성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에게는, 그것 자체가 다 가치가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얘기할게 그 원수(怨讐), 거기에 머문다면 당연히 미워해야지? 진리에 입문했는데, 그 전의 그거 너! 그게 너에게 옳게 보이면 안 되지? 당연히 그건 원수잖아?

하느님이 하라는 거, 반대로 다 했으니까 하느님의 원수잖아? 그러나 그건 미워해야 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여 네가 진리가 되었다면, 그것도 사랑해야지. 하느님이 준 거니까.’ 그 말 하는 거예요.

원수 같은 인간, 이 악물고 한번 사랑하는 척 해 보라는 그런 말 아녜요. 아니 하느님이 그런 거 요구하시겠냐고? 우리한테. 그러니까 이 구절을 자기에게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도 인간적인 그 에로스의 사랑을 주라는 말로 들어서 이를 악물고 벼름의 사랑을 결단(決斷)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거 하지 말라는 거 아녜요. 그렇게 해 주세요. 어차피 인간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그냥 불쌍한 존재 아닙니까? 진리가 된 사람들이 참아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 모든 게 이렇게 우스워 보이지 않아요? 우습다기 보다는 좀 , 왜 그때 거기에 그렇게 집착(執着)을 했던가?’ 뭐 이렇게. 진리가 된 사람이 참아 줘야지 뭐~. 그 말은 율법 안에 담긴 아가페의 사랑을 잘 깨달아서 그것으로 이웃들을 섬기라는 거예요. 자기 안의 진리로, 그 진리를 흘려낼 수 있는 또 다른 선한 이웃들을 만들어 내라는 거예요. 그게 이웃사랑이에요. 진짜 이웃사랑.

 

하느님이 원하는 뜻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흘려주는 거예요. ‘너희는 이렇게 됐으면 좋겠어.’ 이거. 그러면 우리가 그걸 받아다 충분히 이해하고 깨달은 다음에, ‘하느님,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저도 그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가 기도죠. ‘프로슈코마이.’ 그러니까 내가 그걸 깨달아서,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흘려주면 기도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기가 막히게 제자들이 다 받아 적었죠? 산 속에 들어가서 심지어 자고 있었는데도, 그걸 또 다 받아 적었네. 어떻게 적었을까요? 기도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였단 말이에요.

 

하느님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사랑으로 흘려주어서, 그들의 모든 걸 선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이라면, 우리가 함부로 어떤 이들을 정죄(定罪)하거나 판단(判斷)하면 안 되죠! 그들에게 그거 흘려주면, 그들이 그 과정을 거쳐서 진리로 올 수 있잖아요? 우리는 그 결과를 모른다니깐요. 그들이 현재 가는 그 길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해 줄 수는 있지만, 그러니까 넌 죽어라.’ 이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들이 언젠가 진리로 완성이 되었을 때, 그들의 과거의 그 원수의 행적(行蹟)도 모조리 삭제(削除)되어 버린단 말이에요. 그게 구원의 공식(公式)이란 말이에요.

 

(마태5,45)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라는 이 말은 저기 어디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예요. 복수예요. 신약 성경에서 우라노스가 복수로 쓰이고 거기에 관사가 붙으면,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을 가리켜요. 그러니까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 그게 뭐라고 그랬어요?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이죠? 그 아버지의 아들, 그 진리의 말씀이 낳은 !’ 나예요. 내가 아들이잖아요?

내 밖에 존재하는 어떤 신은 나와는 상관없는 하느님으로 불리지만, 그래서 예수님이 죄인으로 죽을 때는 딱 한번 하느님이라고 부른 거예요. 그 이외는 전부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 하느님이 내 안에 진리로 깨달아져서, 내 안에 이렇게 마음으로 되면, 그걸 아브, 아바, 아버지라고 그래요. 아버지! 그러니까 진리를 깨달아야 진짜 아버지를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그러죠.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가서 장사(葬事) 지내고 오면 안 돼요?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지내게 하라고 그러죠. ‘너 지금 나를 쫓아와서 진리를 받아야, 산 아버지 만나는 거야~’ 그런데 그 아버지, 죽은 자의 아버지는, ‘네가 만약에 나를 지금 쫓지 않고, 거기에 가서,’ 장사가 뭐예요? 율법이에요. 규례(規例)란 말이에요.

그걸 한다면, 너 살아 있는 아버지 못 만나!’라는 말이에요. 무슨 인륜(人倫)을 저버리라는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성경은 전부 메시지가 있다니깐요. 그러니까 내 안에 그 아버지! 그거 만나려면 나 쫓아와서 내가 가진 진리를 네가 넘겨받아야지. 이런 말이에요. 거기 가서 율법 행해서 진짜 네 아버지 초상 치를 거야~? 그럼 네 아버지 죽어! 진리가 안 되니까. ‘그러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가서 장사 지내라고 그래.’ 그러는 거예요.

, 그렇게 아버지를 간직한 그 사람이 또 아버지, 진리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서, 다른 이에게 그 아버지를 전해줄 수 있게 되는 것, 이걸 진리의 흐름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 사람을 완전하다라고 여겨주는 거예요.

 

(요한복음 14:15-21)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된 나로, 사랑하는 자는 오늘 본문에서 그러잖아요. 네 가장 가까운 이웃, 너 사랑하라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진리가 된 나로,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계속 흘려준단 말이에요. 사랑을 받는 거예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리스도가 진리로 내 안에서 계속 밝혀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그 나타나신, 주님이신 그 진리를 이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겠죠? 하느님께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그것을 이 피조물의 수준으로 보이게 주면, 그렇게 하느님의 것이 나타날 때, 그걸 영광이라고 그래요. 그렇게 우리가 그 진리를 알게 되면, 하느님이 나에게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영광은 우리가 하느님께 돌리는 게 아니라니깐요. 발광체(發光體)가 먼저 자기를 나타내야 영광이란 말이죠. 그게. 그러면 그걸 반사체(反射體)가 받아서, 마치 해의 빛을 받아 달이 반사하여, ‘해가 있어요!’를 보여주는 것처럼, 이거는 달의 빛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반사체에서 나오는 걸, 내가 굳이 말하자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아버지가 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거란 말이에요. 영광은 누가 돌리는 거예요? 하느님이 돌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8:54)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 안에 그리스도로, 진리로 와 계셔야 되는 거예요. 그걸 성령 받았다, 그래요. 거품 물고 쓰러지고 벌벌 떠는게 성령 받은게 아니라, 그렇게 진리로 내 마음에 말씀이 깨달아 질 때, ‘아 내 안에 영, , 깨끗한 말이, ‘푸뉴마가 진짜 와 있는 거구나.’ 그래서 그걸 성령 받았다. 그래요. 그것이 점점 내 안에서 이렇게 충만하게 깨달아질 때, 그걸 성령 충만(聖靈充滿)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너희 그렇게 원수(怨讐), 그거 미워하고 그러지마. 옛날에 어떻게 산거, 절망(絶望)한 그거 하느님이 하나도 카운트 안 해. 그러니 그것도 사랑해~.’ 이야기 했어요. 그러면 네가 다른 이들도 그렇게 마땅히 대해야지, 판단(判斷)하고 정죄(定罪)하지 말고, 네 눈에 악하게 보이는 그들에게도 그 사랑을 흘려 줘! 일차적인 원수는 !’ 이 온 세상이 율법 속에 갇혀서 하느님의 원수로 살고 있잖아요? 그들에게 말씀을 흘려주는 게 원수를 사랑하는 거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거니까.

그게 아버지 안의 아들이야~.’라고 한 다음에 하느님이 해를 악인(惡人)과 선인(善人) 가리지 않고 비추어서, 당신이 택한 것들을 위의 것으로 완성하니까.’라고. 아나텔로아나, 위의,’ ‘텔로스가 완성이거든요. 그걸 빛을 비추다.’라고 했는데, 해라는 건 항상 하느님의 말씀, 발광체, 하느님을 이야기해요.

그 하느님의 말씀, 그 공의(公義)의 말씀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세상이 그렇게 구분해 놓은, ‘, 이 세상에 선인(善人)이 어디 있니? 그런데 내가 얘기 할게.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하느님이 비추어서 반드시 위에 것으로 만들어 내! 그러니까 원수 사랑해!’ 그러는 거예요. ‘흘려 줘!’ 그러는 거예요.

비는 불의한 자, 의로운 자, 가리지 않고 내린단다. 비는 신명기 31장에서 하느님의 말씀비가. 하느님의 말씀은 의로운 한 자나 불의한 자나, 너희들이 구분해 놓은 그 어떤 구분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내리는 거야~. 그런데 이 세상에 의인(義人)이 어디 있어? 아니 굳이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그 의인, 그리고 불의. 그렇게 너희들이 이야기한다고 하니까 내가 이야기할게.

그렇게 너희들이 판단(判斷)한 그 어느 누구 위에도 그 비는 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원수 사랑해! 이웃 사랑해! 그런 말이에요. 그 빛은 반드시 위의 것으로 완성시켜 내는 힘이 있는 거니까.

 

(이사 60:19-20) 19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 20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고 너의 달이 사라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이제 네 애도의 날들이 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때요? 우리가 자꾸 뭔가를 이렇게 올려드려야 되는 걸로 생각해요. 하느님도 내가 먼저 섬겨드려야 되는 걸로 생각하고, 내가 먼저 뭔가 기도를 해야 되는 걸로 생각하고, 그러니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고, 왜냐면? 내가 뭔가 자꾸 말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기도를 어떻게 해서든지 이렇게 올려드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라니깐요. 교회는 하느님이 우리를 섬기는 곳이라니깐요. 그리고 그 은혜를 올바로 깨달아 제가 도대체 뭔데, 구원 받을 자격도 없고, 그렇게 요구할 권리도 없는 그런 이런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魁首)를 하느님이 왜 섬겨 주세요?’ 이게 찬송이며 영광이란 말이에요.

이게 교회여야 되는데, 교회에 오면 그냥 뭘 하려고 들 그냥 눈이 벌게 가지고 이러고 앉아 있냐고요. 왜냐면 불안(不安)하거든요. 내 안에 진리가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라고요. ,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라고 그랬으니까.

 

(마태5,46)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이건 무슨 말이겠어요? 너희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면, 그건 상 없어. 하느님이 너희에게 사랑을 흘려줘야 되는 거야. 그게 하느님나라인데, 너희들이 그 사랑을 위로 흘려보낸다고 하면, 그게 말이 되니? 이런 말이에요. 그 사랑을 받으라는 거예요. 흘려 받으라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9:18)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엑소시아,’ 복음이 내 안에 들어와 있을 때, 그 간직하는 그 능력! 이게 엑소시아. 미스는 그걸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이고, 엑소시아!’ ‘그걸 다 쓰지~’가 아니라, 남용(濫用)하지 않는 것. 이게 내 상이야~. 그러는 거예요. 왜 그게 상()이에요? 내 안에 원래 없던 거잖아요 나는 피조물(被造物)이라고. 내가 담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그 하늘의 진리를 하느님이 나에게 흘려줬네요. 그래서 그 진리가 내 마음에 새겨졌어요. 그래 나는 흘려줄 수 있는 자가 됐죠? 그게 크리스토스예요. 그리스도들.

내가 그 하느님의 말씀, 기름을 받아 이 기름을 다른 이에게 발라 줄 수 있는 자가 되었다면, 그리고 그걸 하느님께 올바로 받아서 남용(濫用)하지 않고, 잘못 전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자가 됐다면, 이거보다 더 큰 상이 어디 있어요? 나한테. 내가 뭔데 그거를, 그 예수가 하신 그 일을 내가 하냐고요?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동참(同參)하느냐고요? ‘그게 내 상이야~.’라고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내 상이면, 그렇게 내게 주신 걸, 내가 그리스도의 역할(役割)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하라고 우리에게 사랑을 흘려줬더니, 그걸로 열심히 그냥 하느님만 여기서 두들기면서, 예수님 찬양 이러고 있네. 그러면 그게 무슨 상이냐? 너한테는 아직 그 예수 안 죽었네? 그러니까 예수님 찬양 그러고 있는 거 아냐? 그걸 흘려줘야지! 그게 무슨 상이야?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급(賞給), 상급하지 마세요. 이게 여러분의 상이라는 그 인식(認識)이 없으면 여러분은 하느님한테 엉뚱한 상, 지금 바라게 된다니깐요.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아녜요.

강론시간에 상급 얘기하는 사람 100% 거짓 예언자입니다. 우리가 우리 수준에서 원하는 그런 상급, 거기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100% 거짓 예언자예요. 그리고 이 허깨비 같은 세상에서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공해라.’ 120% ()이에요. ! 복음의 자도 모르는~

, 그러면서 세리(稅吏)는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예수님이 여기서 세리라는 이야기를 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에 세리들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거예요. 산상수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이걸 못 알아듣지? 이 산상수훈에서 내려오자마자 기적(奇績), 표적(標的), , 비유(譬喩) 던져서 설명해 주는 거예요.

그 세리, 그때 얘기했던 산위에서 얘기했던, 그 세리가 이거였어.’라고 세리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세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텔로네스,’ 조금 아까 해를 비추다에서 비추다텔로스라고 했죠? 완성하다. ‘텔로스라는 단어하고 오네오마이,’ 이게 값 주고 사다, 구입(購入)하다.’라는 말이에요. 이거 두 단어의 합성어거든요. 세리가.

그러니까 세리는 완성, ‘그 안식(安息)을 값 주고 사는 자라는 말이에요. 완성을 어떻게 값 주고 사요? 그래서 세리예요. 그게 죄인(罪人)이에요.

원래 세리라는 직업은 세금(稅金)을 징수(徵收)하는 자예요. 그들은 자기들의 조국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날 가망성(可望性)이 없다고 낙심(落心)하고,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지중해 등지에 그런 휴양지에 가서, 편안하게 살자고 로마의 주구(走狗)가 된 자들이 세리였어요.

시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 욕망(慾望)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세리의 직업에 뛰어 들었다 그래요. 어차피 가망 없는 나라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튀자! 좋은데 가서 살자! 그게 세리였어요.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예요. 무조건 가서, 걷는 만큼 자기들에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유대 안에서의 세리는 그냥 죄인이었어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그냥 세리였다니깐요. 율법과도 무관하게 살아. 욕심 부리면서 살아. 그러니까 자기들도 알았고, 다른 이들도 저거 죄인! 저거.’그랬단 말이에요. 그게 세리예요.

 

유대인들은 안식을 행위, 율법 지킴, 제사라는 걸 지불(支拂)하고 사려고 했던 자들이고, 세리들은 다른 종류의 안식이지만, 자기들의 돈으로 그걸 사려고 했던 자들이죠? 둘은 같은 자들이에요. 이 율법주의를 부수기 위해, 하느님이 세리를 끌어다 쓰는 거예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세리를 부르시고, 진짜 세리인 바리새인들 저주(詛呪)하죠? 그 말은 너희들이 진짜 세리야!’ 가르치기 위함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세리가 나오는데는 바리새인이 같이 등장해요. 항상. 주님이 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그래요. 아니 거기서는 바리새인 아예 삭제돼요. ‘의로운 자는 저 세리다. 저 세리가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자기의 성전으로 내려가는 자야!’라고 이야기해요.

 

(루가 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자에게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反應)이 뭐라고 그랬어요? ‘, 내가 원수였네!’ 그러면 그 이웃 사랑하라고 그랬잖아요? 말씀을 줘야죠? ‘, 내가 원수였네!’ 세리가 그러잖아요? ‘내가 죄인입니다. 하느님.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원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걸 사랑하려면, 말씀을 줘야죠.

 

(루가15:1-2)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말씀을 들으러 온 걸, 예수님이 그들과 음식을 나누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들에게 먹을 걸 줬다는 거예요. 진리를 줬다는 거예요. 사랑을 줬다는 거예요. 물론 다 상징(象徵)이에요. 내가 가난한 자라는 걸, 아는 거, ‘푸토코스라는 걸 알게 됐어요. 세리거든, 난 죄인이에요.

살아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푸토코스,’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그것 찾으러 가야죠? 그래서 세리, 즉 죄인이 말씀 들으러 가는데, 바리새인들은 걔네들은 그거 주면 안 돼. 그거 먹을 자격 없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거 바리새인예요. 그런데 오늘 주님은 뭐라고 그래요? 의인(義人), 선인(善人)이 어디 있어? ‘하느님의 말씀, , 해는, 빛은 선악 구분 없이 그 위에 내리는 거야.’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바리새인이 그거 동의(同意)할 수 없어요.’라는 그 사람들로 나온다니깐요.

 

(루가19:1-2, 5-6, 8)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이스테미,’ ‘티데미호 코스모스로 뭘 깨달아, ‘, 이게 진리예요?’라면 이스테미위로 서는 거예요. 그게 스타우로스, 십자가를 낳는 단어에요 세리가. 일부러 성경이 그런 단어를 쓰는 거죠. 이스테미, 서서, 이제 섰어요. 그게. 죄인이 위로 섰다니깐요. 계약 안에서 선 거죠?

절반이라는 이 단어는 헤미쉬인데, 이게 하마라는 단어에서 나온 건데,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딱 반이 아니라 내 소유, 그가 부자라고 그랬죠? 그런데 어떤 부자냐면, 예수님을 찾아와서 네 소유 다 팔아 줘라~’ 했을 때 못 준 부자가 아니라, 자기 소유를 다른 이들에게 그 같은 것으로 줄 수 있는 진짜 부자의 모형으로 나오는 거예요.

내 소유를 같은 것으로, ‘푸토코스,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그래요. 세리장이. 횡령이라는 게 엉뚱한 말로 준적이 있으면,’ 그러니까 쉬코판테오거든요. 쉬코판테오!’ 이게 쉬콘이 무화과고, ‘판테오드러내다.’ 그러니까 무화과로 드러내다.무화과는 항상 율법의 모형이죠? 열매도 아닌 게 열매인 척 하는 것. 내가 율법으로 잘못 전한 적이 있으면, 내가 그것으로 가서, 이제 내 안에 들어왔어요. 주님이~. 네 배()가 아니라, ‘넷으로 넘겨주겠습니다.’예요.

넷이 뭐라고 그랬어요? 하늘의 셋이 땅에서 완성된 게 넷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겉옷도 넷으로 넘겨주죠?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이것도. 보세요. 내 것을 모두 들어내 주는 거. 가감(加減)없이. 이걸 헬라어로 친구(親舊)’라고 그래요. 내 걸.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벗이라고 하신 그 분이, ‘내가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다 알려주지 않겠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루가복음이 어떻게 시작해요? 데오필로,’ 하느님의 친구, ‘내가 다 밝혀줄게.’라는 뜻이에요.

 

한번 보세요. 거짓증거, 살인, 간음, 거짓예배,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이게 넷이라니깐요. 그 이야기가 사복음서에 그대로 나오고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똑같이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사람이 썼다고 하겠냐고, 이 책을?

, 그렇게 쉬코판테오,’ ‘내가 횡령한 일이 있으면, 하느님 이제는 내가 넷으로 넘겨주겠습니다.’ 이게 세리가 완성된 거라니깐요. 그런데 어디서 시작 돼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그 진리를 주니까 넘겨주는 자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뭐라고 그래요? ‘세리는 이 같이 안 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랑을 흘려준 자로 섬긴다고 너스레 떨지 않아.’ 이런 말이에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래서 세리는 이같이 안 해.’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세리일까? 이건 구약에서 하느님이 세리와 세(), 세금(稅金)으로 진리를 설명하셨기 때문에 그걸 그냥 갖다가 쓰시는 거예요.

 

(민수 31:40) 40 또 사람은 만 육천 명이었는데, 주님을 위한 공물은 서른두 명이었다.

(아모 5:11-13) 11 너희가 힘없는 이를 짓밟고 도조를 거두어 가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탐스럽게 가꾸어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 정녕 나는 너희의 죄가 얼마나 많고 너희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너희는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으며 빈곤한 이들을 성문에서 밀쳐 내었다. 13 그러므로 신중한 이는 이러한 때에 입을 다문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는요, 성전을 이루고 성전을 완성하는 거, 그 세금을 받아서 성전을 유지(維持)했단 말이에요. 성전 지을 때도 그 세 받아서 성전 지었잖아요. 반 세겔! 그게 성전 지을 때 받았던 성전세란 말이에요. 그 다음부터는 안 내도 되는 건데, 이 사람들이 성전은 바로 우리들의 힘이 모아져서 지어지는 거다.’, 그걸 붙들기 위해서, 계속 자기들이 낸 거예요. 그냥요. 성전세는요. 레위인들이 그걸 받았단 말이에요. 성전세를. 반 세겔씩.

그런데 그 세()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는 걸, 주의 깊게 보셔야 돼요. 하느님의 성전은 너희들이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고 그러죠. 그러니까 진짜 성전에서 요구하는 성전세는 사람이에요. 성도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세금, 성전세라는 것으로 모형화하여 뭔가를 설명하는 거예요. 지금요.

이런 말이죠. 하느님의 성전은 성전에 세()로 들여지는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지고, 완성이 되는데, 그게 에페소서의 논리예요. 그 세를 받는 자들이 엉뚱한 세를 받아 버리면, 성전이 더럽혀지고 완성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하느님께 드려지는 세가, 엉뚱한 것들이 가버리면, 그 성전이 흠이 있는 성전이 된다는 거예요. 그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표면적, 구약의 표면적 성전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졌어요. 레위인들이잖아요? 그러니 그 레위인이 성전을 이루는 성전세의 역할도 한 거고, 그 성전세를 거두는 세리의 역할도 한 거예요. 그 레위인은 곧 우리잖아요? 하느님께 드려진 자! 그래서 그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연합, 덮음, 휘장다 성막(聖幕)을 덮던 용어들이죠?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성전이에요. 그들이 거두어 간 성전세가 반 세겔이었어요. 그러니까 레위 사람들이 바로 반 세겔이었던 거고, 성전세였던 거고, 그 세를 징수하는 세리였던 거예요.

 

(마태 17:24-27)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 서냐, 아니면 남들에게 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 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아들들은 세를 면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아들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성전을 구성하고 이루는 세금이죠? 그들이 레위인들이었잖아요? 아들들을 대신(代身)하는 자들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 유대인들이 걷었던 그 성전세 안 내도 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세상 임금들이나 그 세 받아서, 아들들이 아닌 자는 율법의 행위만 내 놓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거 받아서 성전 이룰 거란 말이죠. 그러나 아들들은 자기들이 세금(稅金)이고, 자기들이 세리(稅吏)란 말이에요. 그러니 그거 안 내도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저들로 오해치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그림 하나 보여줄게. 너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서,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서, 입을 열어, 먼저 첫째로 잡히는 첫째로 올라오는 자예요. 중성이 아니라 남성 단수예요. 단수. 바다에, 바다 같은 이 세상을 이야기하는 거죠.

바다에 낚시를 던져서, 가장 첫 번째로 올라오는, 그 자의 입을 열어 은전(銀錢)을 찾아라. 은전은 구약에서 항상 속전(贖錢)입니다. ‘입을 열어,’ 어디서 나와요? 입에서 나와요. 용서를 할 수 있는 속전이 입에서 나와요. 입을 열어 은전을 빼내고 아이로,’ 그 자를 제거하라. 그래요. 성경에는 그런 말이 안 나오지만, 본문이 그래요. 첫 번째 낚시를 던져 걸려오는 그 자의 입을 열어, 속전을 빼낸 다음에, 그 자를 제거하라. 그리고 그걸, 반 세겔인데, 한 세겔이잖아요? 그걸 너와 나와 세금으로 줘라. 그래요. 연합(聯合)입니다.

첫 번째 걸린 자가 예수죠? 제거되는 자. 속전을 내어 놓고 제거되는 자, 그러나 그에게서 속전이 나에게 왔어요. 그 속전이 말씀, 진리, 그리스도. 그러나 한 세겔이네. 연합. ‘이게 성전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세리의 이야기란 말이에요. 너와 나를 위해 줘라.’ 그게 진짜 레위예요. 연합! 덮음! 휘장! 그래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는 제자 중에 세리가 하나 있었죠? 마태오, 마태오의 이름은 누구? 레위. 이걸 어떻게 사람이 썼다고 하겠냐고요.

 

(루가 5:27-32) 27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이가 죄인으로 보이냐? 내가 보기에는 아닌데, 얘가 진짜 레위인데, 얘가 진짜 성전세로 인구조사(人口調査) 될 자인데, 너희들 눈에는 죄인들로만 보여?’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율법주의자들은 사랑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거예요. ‘아니다.’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해라.’ 흘려주라는 거예요. 그런 걸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내 안에 그 한 세겔이 들어와 있으면, 내 입을 벌려, 이제 다른 이에게 그거 또 넘겨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하느님의 인구조사에 합당한 자가 되어, 성전으로 지어져갈 거 아닙니까?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리는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 세리는 하늘의 성전세를 거두는 진리의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거두어들이는 거예요. 세금을. 이렇게 하나하나. 그래서 성전을 만들어 가는 거죠. 무엇으로? 한 세겔로. 주님이 남겨주신 진리라는 한 세겔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그걸 완전이라고 그래요.

오늘부터 자신 있게 , 난 완전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아무리 와이프가 옆에서 성질이 그 모양인데 네가 온전하냐?’ 그래도 완전해~.’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완전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를 섬기려고 하지 말고, 그 예수가 담고 있었던 진리를 마음으로 담아서, Keep 해서, 가난한 자들, ‘푸토코스,’ 그 필요한 자들에게 흘려주는 거. 이걸 사랑이라고 그래요. 완전한 자의 삶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내 안에 진리가 없어.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전부 그냥 어떻게 하면 잘 섬기는가? 어떻게 하면 율법의 행위를 잘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근사한 가짜 성전을 구축(構築)할까? 수천억씩 들여서 이것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꾸 섬기라고 얘기밖에 못하는 거예요. 그래야 뭘 자꾸 내 놓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에 선동(煽動)당하지 마세요. 돈 없으면 밥부터 사 먹어요. 헌금하지 말고, 왜 밥 굶어가며 헌금하고 그래요. 무슨 의도(意圖)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보배를 이렇게 신문지에 싸갖고 우리에게 줬더니, 보배는 못 알아보니까 버려, 신문지를 벽에다가 걸어놓고, 그걸 섬기고 있네. 예수가 그걸 담았던 그릇이란 말이에요. 보배는 그 진리라니깐요. 그리스도의 말! 성령! 그거! 그게 보배지? 우리가 행위로 섬기는 그게, 그건 가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와 십자가를, 그 내용을, 진리로 우리 안에 이해하고 깨닫고 있지 못하면, 그건 신문지 조각에 불과한 거예요. 거 갖고 자랑하지 마세요. 무슨 십자가? 그게 나랑 상관이 있어야 십자가지. 그것이 완전하신 하느님의 완전인 거예요. 진리가 완전이신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걸 내 안에 갖고 있으면 내가 완전하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되면 우리들은 에스카톨로스 코드란테스,’마지막 걸 채워서 완전한 성전, 사각형이 되는 거예요. 재미있죠?

저는 이 이야기 이외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러니 말씀을 이렇게 연구하고, 강의 하다보면, 모든 게 이렇게 하나이기 때문에, 저는 그 하느님이 두려워서 다른 이야기 못해요. 여러분도 제발 그 하나 속으로 들어가, 그 하나를 여러분 마음으로 가지시길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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