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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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완벽주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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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06-15 ㅣ No.56589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11주간 화요일 - 완벽주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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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완벽해야한다는 것과 완벽해지려하는 것은 비인간적이 된다는 시각 사이에서 갈등을 해 온 것 같습니다. 또 사회에서는 정말 완벽주의란 말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일반대학 다닐 때 한 여자후배와 함께 걸을 때 후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는 빈틈이 없어.”

그래서 자신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에게 완벽주의가 있어서 사람들이 다가오기 쉽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라도 빈틈을 많이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본래 말도 안 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농담도 많이 하며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걸 원하는 건가?’

신학교에 들어와서는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형은 혼자는 잘 살지만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하느님이, ‘왜 너 혼자 왔니? 쓰러져가는 네 형제들은 왜 함께 데려오지 않았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쓰러질 땐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되는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먼저 완전해지면 주위 사람들도 함께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형제들을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왜들 쓰러지고 그래?’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또 함께 쓰러져보기로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함께 울고 아파하고 싶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그런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신부님은 답답하다느니, 인간미가 없다느니,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안 산다느니, 사는 것이 군인 같다느니, 자신은 완벽주의적인 사람은 싫다느니 하는 등의 참 많은 충고를 들었습니다. 저는 전혀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시선으로 보나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에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도 여러 번 그런 충고대로 되어보려고 했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저에게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넘어지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혹 옆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기대어 버틸 수 있도록 흔들림 없이 곧바로 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주위 사람을 위해서도 더 좋습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나에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이젠 완전해지려고 하는 것이 절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생각에 힘을 주는 가장 큰 말씀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연 불완전한 것이 인간적일까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스스로 불완전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인간답다는 의미는 완전한 인간을 두고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전할 수 없어.”라고 하며 자신의 불완전을 정당화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고 하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불완전한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된다는 말은 ‘완전한 사랑’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완전하다는 의미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라고 풀이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똑같이 미워한다면 하느님나라에서 칭찬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완벽주의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옳지 않은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습대로 더 완전하게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주눅들 필요 없습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봅니다.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바라보며 그 사랑을 닮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태양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닮도록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묵상>>

오늘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할 가리옷 유다를 끝까지 감싸주시고 사랑하셨고 또한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모범에서 정말 원수를 사랑하시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 그것이 가능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책과 영화로 유명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사형수들의 어머니 조성애 수녀님이 대법원에서 사형제도의 합헌이 결정되자, 사형수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가식’이라고 하였고, 그렇게 똑같이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범죄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영철에게 4대 독자인 아들, 아내, 그리고 어머니까지 무참히 살해당한 고정원씨가 유영철을 용서한다고 할 때 같이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물론 그 분의 딸까지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당연한 인간적인 감정을 넘어서지 않으면 하느님께 칭찬받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넘어선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들이 가식으로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씨앗이 따스한 햇살과 수분이 있는 흙 안에 있어야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뚫고 새싹이 나올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자신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며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변화되면 될수록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그분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으로는 용서나 사랑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기도는 이미 감정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은총의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지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싫은 것입니다.

기도는 은총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그 초자연적 은총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저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술집 여자와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남편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니 기적적으로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재시작하는 가정을 보았고, 또 바람피우는 남편을 위해 기도하니 남편이 밉기보다는 불쌍해 보여 가끔 집에 돌아오는 남편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잘 대해준다는 자매님도 만났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사적으로 따를 줄 알아야겠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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