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부활 제7주간 월요일 <평화와 사랑은 하나다> 복음: 요한 16,29-33 LORENZETTI, Pietro 작,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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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보험에 들지 않아서 저를 이상해하던 보험회사 직원이 생각납니다. 사제는 보험을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보험이 있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걱정할 것이 그만큼 줄어듭니다. 사실 하느님도 보호하시지만, 교구에서 아프거나 은퇴하면 다 책임져주니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교구에서 하는 이유는 사목에 집중하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면에서 걱정이 없는 마음의 평화가 이웃 사랑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교구에 사제로 속하지 않았다면 세상의 수많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더 좋은 보험을 찾아다녔을 것입니다. 따라서 더 높은 평화의 차원으로 올라가려면 그만큼 나를 책임져줄 존재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이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초월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평화를 찾는 이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나면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도 결국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기 위해 먼저 아버지께 속하셔야 했습니다. 그 평화가 우리를 위해 죽으실 용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평화방송에서 방영한 서울교구 정순택 대주교의 성소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정 대주교는 서울대 공대에 다니는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어린이처럼 되지 못해서 마음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신도 주님께서 사랑하실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떤 부제님이 구들장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다 사랑받는 것처럼, 천천히 갈지라도 하느님께서 다 사랑해 주신다는 말을 듣고는 주님께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만약 그 부제님이 평화롭지 못한 상태였다면 혼란에 빠진 대학생을 평화의 길로 인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의 평화가 곧 사랑이 됩니다. 갈멜회에 들어가 선배 수사와 마음의 갈등이 생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수사는 정순택 수사가 좀 둔하게 보였는지 자꾸 정둔택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하도 화가 나서 들고 일어서려는 찰라 마음에서 이런 목소리를 듣습니다. “저 형제도 내가 사랑하는 형제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에 평화가 오고 그렇게도 화가 났던 자신의 별명을 듣고도 껄껄껄 웃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해 주신 분께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고 그분의 감정에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두 딸을 잃고 우울해하던 아빠가 막내아들의 장난감 배를 만들어주는 세 시간 동안에는 오랜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할 일들의 목록을 정하고 그것을 해내다 보니 우울할 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살면 아이를 잃은 기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일하다 보니 평화를 찾았습니다. 이는 사랑에 몰입하니까 평화를 얻는 경우입니다. 평화를 얻어서 사랑을 하나, 사랑하니까 평화를 얻으나 같습니다. 둘 다 하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우울증을 앓다가 마더 데레사를 따라 캘커타에 와서 봉사를 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우울증에서 사라진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큰 사랑이 있는 자에게 속하면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에 머물게 되고 그 높은 수준의 공동체에는 평화가 넘칩니다. 사랑과 평화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짐승들보다는 인간이 더 사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인간이 더 평화롭습니다. 만물의 영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할수록 더 능력이 있어서 더 안전하고 더 평화롭습니다. 세상이 불안해지는 이유는 사람들 사랑의 수준이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둘 다 하느님께 속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말합니다. “저는 하느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