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상담 신앙상담 게시판은 비공개 게시판으로 닉네임을 사용실 수 있습니다. 댓글의 경우는 실명이 표기됩니다.

q Re:성당에서의 경험

인쇄

사랑과영혼 [59.86.231.*]

2007-12-03 ㅣ No.6101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한 아이가 주일 미사를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
제단의 포도주를 바닥에 쏟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신부는 소년의 뺨을 때리면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아라!"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또 다른 성당에서 한 아이가
주일 미사중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신부는
그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너는 후에 훌륭한 신부가 될거야."
하며 용기를 복돋아 주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당에서 쫓겨난 티토라는 아이는
공산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되어
강력한 전제정치를 실행했고,
칭찬을 받은 다른 아이는
유명한 대주교 훌톤 쉰이 되었습니다.
칭찬처럼 좋은 매는 없습니다.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를 인용 해 보았습니다. 하남님께선 필자처럼 대화를 무척 선호 하시는 성향이겠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리고 진솔하신 분같습니다. 일단 상기 글중에서도 제2의 사제이신 신부님께서 부주의한 실수를 범한 복사 아이의 그것보다 이미 축성이 된 '주님의 피'임을 믿는 확신에 근거함이라 혜량하시는 자세도 필요할 듯 합니다. 하남님도 그러한 맥락에서 본글을 나름대로 사심없이 개제한 발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전에 어느 사제께서는 이와 유사한 사고로 맨 앞줄 아기의 울음 때문에 도무지 미사 집전에 방해를 받았노라고 그 엄마를 엄히 꾸짖었다고 하는데 이에 엄마는 크게 상처를 받았다길레 신부님의 이러 이러한 배려(아기에겐 엄마가 올바로 보호해 주지 못하면 이 순간 악령이 도피할 수 있슴)도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라 말씀 나누던 일화도 생각납니다. 우리가 자주 성모엄마 마마보이로 머물기에 때때로 엄하실 성부 아빠형 신부님보다 성모님형 신부님에 대한 애착을 갖기도 하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이기도 할 것입니다.

결론은 '공과 사'의 개념 은총이 아닐런지요?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는 모든 것 역시 '공과 사'의 개념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즉 '우리'보다 '내'사고가 앞설 때 선악과도 따먹게 될테고 온갖 터무니 없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관대함'보다는 '민감함'에 기울어지는 너와 나의 사고를 접하기도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트러불이 생길시 상대를 먼저 조용히 타이를 수 있도록 그담은 교회의 원로, 그 다음 다음에도 말을 안들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떠나라 하였는데 이 공과 사의 개념이란것이 도무지 섞갈릴 때가 많겠지요. 그런데 성체성사의 신비속에서도 무언가 섞이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 쳇 상에서도 도무지 남자는 남자에 대해 배타적이고 여자는 여자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저는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솔로를 하고 있기도 하여 노래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비복음성에 젖은 남정네들에게 입장과 함께 강퇴를 당할 때에는 화가 앞서거나 가련해 보일 때도 있는데 우리 가톨릭의 환경은 이러한 것들에도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즉 이 사람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임으로도 성찰할 수 있는 영성 제공이 무한정한 환경이기도 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복음을 설파하기도 하였는데 역시 쉬는 교우와 프로테스신자들의 배타성이 제일 견디기 힘든 12년을 살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우선적인 질서가 되어야 할 성찰 측면에서의 나의 부족함에는 늘 관대함으로 일관한 죄인이기도 합니다. 역시 사람들은 아무리 말을 조심하여도 그들의 관점에서의 '잘난척'을 피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으로서 요즘은 '복음설파'를 눈치 작전으로서의 은유적인 대화와 함께 극히 편위 위주로 절재 함도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명에게 매 맞고 열명을 구원하던 지난날의 활기참은 많이 식은듯 합니다.

우리 성당에도 보면 필자가 전직 홍보분과통이라 그런지 게시판 관심률이 나 자신의 그 것처럼 여전히 미지근한 상태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게시판 앞의 그 자리는 부주의한 사람들의 주차공간으로 안성맞춤이라서 그런 형국들을 보면 화딱지가 날 때가 많은 것이 또한 신앙여정 속에서도 잡초처럼 돌출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때에도 철저하게 내려놓으십시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요, 촛불을 켜고 당신의 품으로 쉼으로써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야 할 것입니다.

형제님도 장차 더 보시면 알겠지만 성전건립을 위한 타이밍 외에는 신부님들이 거의 헌금 말씀을 하지를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신자의 의무라 하는 교무금등의 무관심 속에서도 결코 하느님이 '푸른돈'을 좋아하신다는 말씀 한마디 듣기가 힘든 곳이 성당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남님이 화나도록 만든 신부님측의 침묵은 그리스도 오상(다섯상처)에 의거하여 과연 어떤 침묵이었는지는 하남님이 선택하심이 좋을듯 합니다.

1. 상대를 무시하는 위선적인 침묵

2. 손해볼 것 같아 말하지 않는 계산적인 침묵

3. 말 자체가 생각 안나는 바보같은 침묵

4. 사랑이 담긴 말만을 행하는 움직이는 침묵

5.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의 거룩한 침묵

이 침묵 속에도 작은 묵상을 통하여 풍성한 우리의 회심으로의 진화 여정인 신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지도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고자 일본에 상륙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연이어 중국에서 풍토병을 앓코 선종하신 선교의 수호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이기도 한 오늘을 만나며 저는 어제 죄인의 마음으로 대림 첫날 아침 절두산 순교 성지를 향하는 길목에 오르며 지하철 7번 출구에서 막 나오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신비 오단이 끝난 여정에서 당시 하남님의 글이 떠오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하남님께선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거부하고 돌아서야 했던 7성사의 은총을 기억해 주시면 좋을듯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프로테스(항거하다)중 하나의 종파인 감리교(비교적 가톨릭의 전례를 많이 고수한다 함, 성공회에서 다시 갈라진 침례교와 감리교중 하나로서 루터 계보의 장로교와는 또 다른 배를 타고 옴)인인 어느 심청으로도 손색이 없는 효녀 자매가 휠체어에 의지하며 가족의 화목을 말없이 주도 해주신 그 어머니의 임종에 임박하여 슬퍼하고 있슴도 기억해 주시면 좋을듯 합니다.

길목의 왼쪽 작은 골목에서 어느 여인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여인은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얀 승용차 한대가 인적이 뜸한 절두산의 일방통행 출구로 나오는데 사람에게 과속에 해당하는 그 속도를 늦출줄 모른채 그만 충돌 사고가 이어질 뻔 하였습니다. 나는 이 때 재빨리 '아줌마! 차 피하세요!'를 외쳐야 했는데 10센티 미만으로 근접한 상호 부주의한 차와 사람의 형국에서 '경고음'을 간신히 입밖으로 꺼내면서 우물거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무 쉽고 편안함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고 깨어있지 못한 상태로의 많이 죽어 있는 형국의 그 심리 상태에서 오히려 아줌마도 부주의 했지만 승용차 주인에게 더 화가 앞섰습니다. '뭔 놈의 사고가 조심성도 없고 운전자는 저리들 급한지!'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세계 2위의 교통사고 왕국인 한국의 현실의 단면이겠으나 차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떠나는 모습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때때로 주님이 내안에서 그렇게 말씀하셔야 하고 나는 그 아줌마 또는 운전자가 되어 과속 운전을 일삼거나 운전중 핸드폰을 열잖았겠나 반성하게 됩니다.

이 때에 우리는 작은 묵상을 통하여서도 주님의 현존 하심과 어깨 동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선 '깨어있지 못한 나에게 깊은 나로서'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절을 맞으면서 긴장해야 할 것은 긴장해야 한다고 두 천사를 통하여 경고해 주신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너무 고독하게 왕따 시켰고 하남님 또한 의협심이 투철해 보이시나 청원 기도보다 감사 기도, 감사 기도보다 찬미 기도가 더욱 효과적임을 잘 모르는 기도의 태크닉 부재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기술력(태크닉)이나 지식 아이큐등은 사실 9할 이상을 차지하는 태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하남님의 솔직함에 박수를 보내 드리며 신부님을 위해서도 기도의 테잎 다시 끊는 성탄 맞으시기 바라며 한번 마음 독하게 먹고 '나'를 빼는 하루의 삶도 시도해 보시기 바라오며 새해에는 본당의 99% 이웃들이 화장실 불을 소홀히 다루고 있는 부주의도 바라보고 보다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힘을 구해봅시다.

아마도 하남님처럼 순수한 분들이 이러한 모순등에 큰 몫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부님 화 내신다고 같이 화 내시면 똑같은 사람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도 한데 나머지는 주님이 알아서 해 주실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새해에는 그 신부님을 선의의 경쟁 대상으로 여기고 대화의 타이밍으로서 옛말 나눌 기회가 틀림없이 올 터이니 이에 대비하기 위한 차원으로서도 2월경의 본당 사목 계획을 미리 입수하여 가정 사목 계획도 올바로 수립하심으로서 결혼전 때부터의 연인 시절의 남편에게도 의지하고플 아내도 더욱 기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360 0댓글쓰기

신고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