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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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이기 무신일이고? 큰일났네!(삼성산성지/둔토리동굴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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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남 [agnes536] 쪽지 캡슐

2021-07-19 ㅣ No.99858

 

 

 

"따릉 따릉!~~" 주일아침 6시 알람벨 소리가 울린다.

오늘은 여유로이 일어나서 아침기도만 하고 밥챙겨먹고 10시 성당에

영성체만 하러 가면 된다고 생각한 순간.....


"아이쿠 옴마야! 큰일났네 반석아부지... 빨랑빨랑 일어나이소.

우짜노 큰일났네... 세상에... 나는 오늘아침 방송미사는 당연히

쉬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주일 아침 이리도 기지개 쭉 펴는 아침을 맞았는데....

미사. 미사. 시작하네., 우째 이런일이 . 빨리 텔레비를 켜야지,..


땡! 땡! 땡! 삼종이 울리고 있다.

휴~! 시간맞춰 우리 하느님이 그래도 생각나게 해주셨기에

망정이지 미사도 안하고 그냥 가서 영성체만 하고 올려고 했다니

참 내 여엉~ 찝찝한 하루를 보낼뻔 했네... 참말로 감사합니다.


순간 순간 때맞춰 일러주시고 깨우쳐 주시는 우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수 없는 또 작은 일상의 작은 기적들이 시작된다.


2월부터 시작된 성지순례길의 여행도 6개월이나 되었다.

황창연 신부님의 해만뜨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던 강연을 듣고 시작된

여행에로의 길이 시작된 수원교구 성지순례 길이었던 것이다.


어제 토요일은..

이제 얼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분당 청계산자락 국사봉 꼭대기에

자리한 둔토리 동굴성지가 마음에 걸려 찾기로 길 떠났다.


자료실에 올라와 있는 주소로 찍고 달려갔더니 얼토당토않은 고속도로 윗길

농사꾼 아저씨의 하우스가 나오길레... 주인장께 물어보았더니..

"아니., 그 동굴바위는 저기 고개 고개 넘고 넘어 한참을 올라가야 되는데

왜 가끔씩들 여기와서 찾아대는지 모르겠다."며 대충일러주는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와 동네 슈퍼에 들어가 또 물어보았다.


"저기 ~ 작은 골목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서 계단으로 또 어디로 올라가면

그 왜 외국인신부 이름인데 아주 길다란 이름으로 되었다고 하던데..."


고맙다고 인사하고 높다란 좁은길을 따라 산길을 올라가니

저 멀리 언덕받이에 근사한 별장같이 생긴 건물이 보여 성지라서 그런지

멋지게 꾸며놓았네.. 하고 반가이 다가가니... 

 

"왕 왕 왕!!!... 으르렁 컹컹!!" 커다란 개가 물어뜯으려 난리가 아니다.

관리인 같은 사람이 여긴 개인 집이라며 그 동굴은 못간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가파른 산을 넘고 또 넘고 몇시간을 올라가야 되는데 댁네들은 절대 못간다 고한다.

아마도 허연 머리칼 의 노인네들이라서 지레 겁을 주었던 가 싶다.


길을 도로 돌아 내려와 개천을 타고 구불지고 좁다란 산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새로난 고속도로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는 컴컴한 굴속같은 시원한 길도 오르고

뜨거운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자잘한 돌길도 한참을 걸어가는....

안내 표지판이 제대로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길을 오르는 순례객들이 거의

없는 모양새인가? 싶다가도....


26살의 프랑스사제가 지구의 저쪽에서 오지의 조선땅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해 한목숨 초개같이 버려도 좋다는 열정과 믿음으로

달려왔건만 위험에 처하자 청계산 국사봉이란 꼭대기 아래 음습한

바위동굴안에 피신해 선교활동을 하다 관군들에게 결국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는데..

이까짖 잠깐의 고행으로 그분들의 쓰디쓴 고배의 잔을 언감생심 기워

갚으랴 마는 그래도 작은 양심의 소리로 감사해 본다.


그이름 루도비코 볼리외 ...!! 길다란 이름의 외국인 신부님이다.


오르막길만 연속되는 길고도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오르고...하기를

한시간 반만에 다 올라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 유명한 청계산 국사봉 이란다.


"혹시, 천주교 성지인 동굴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 ! 거기요? 조기~아래로 길따라 내려가다 보면 바위굴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도 옛날에 아주 굉장했던 곳이래요. 무수한 사람들이 그 동굴에서

잡혀 죽임을 당했던 곳이래요"

 

천주교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소문무성한 순교의 장소는 이렇게 아름아름

후대 사람들에게 끊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더 힘든 감악산을 올랐으면서도 리노할배는

이렇게 힘든산은 처음이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적지 동굴앞에

도착하자 힘듦도 잊어버리고 감개가 무량하다.


동굴안은 캄캄하고... 음습한 기운과 함께 거미줄이며 이끼가

벽을 둘러치고 있는가운데 우리 성모님 십자고상과 함께

그날의 사람들을 못내 잊지못해 두팔모아 하늘을 우러럼인가?


"아! 다 이루었다 는 감탄의 말이 우리둘의 입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예수님 때문에 웃어보는 순박한 모습들이다.

"신부님! 당신때문에 오늘 우리가 참으로 평화의 주님을 누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산길 서두르며 내려오다 리노할배 왈

"저 아래 그 별장 아저씨한테 꼭 들러서 '아저씨 우리 국사봉꼭대기

동굴앞에 갔다왔네용" 하고 가자" 고 해서 한참을 또 웃으며 내려왔다.


참고로 국사봉오르는 등산로 입구 주소를 기록해본다

경기 분당구 운중동 382-1

한시간 반 오름길 국사봉 (우리처럼 딴 사람들 헛탕치고 헤맬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서울길 관악구 에 위치한 삼성산 성지를 또 들렀다.

40여년 전 능곡성당 새내기 신자시절 단체로 와본 그곳 삼성산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변해있었다.


그옛날 오웅진 신부님께서 오신날 같은데 둥그스럼한 넓은 동산을 둘러타고

앉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은혜 나누며 기도했던 그 동산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 곁에 자그마한 가건물 같은 강당도 있어 그날밤 철야로 기도하며 창피하고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얼마나 대성통곡으로 울어대었던 천국의 올리브산? 기억도

가늠하기 힘든 흩어진 퍼즐조각마냥 하얀구름 새파란 하늘가로 날아다닌다.


40여년전 같은 동네에 평화교회 라는 개척교회가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경화라는 처자가 한날은 부흥회 중에 성령이 임하면

커다란 스크린속에 영화를 보게되고 통회를 하게된다고 해서

참 희안한 신앙도 있다 고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일이 있는데...

 

젊은날  자식들 키우고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성지순례? 피정?

이라는  단어들은  아예 생갖조차 갖지 못했는데.

리노할배 나이 30대 후반쯤 대퇴골이 괴사하여 달걀껍질만큼 붙어있다고

당장 수술을 해봐야 악성인지 양성인지 알수있다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측의

진단으로  몇날을 울어대며 처음으로 구역장. 반장을 찾아가 애걸을 했었다.


그전까지는  구역도 반도 모른채 그냥 일만하느라 겨우 주일미사만 안

빠지고  열심히 나가는걸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완전하다고  믿고 있는 상태였다고나 할까?


기도회 할머니들의 방문기도와 성당식구들의 관심과 격려속에

대수술을  마치고 부터는  우리부부의 신앙관도 바뀌어 갔다.

지나고 보면  대단하신 하느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그분의 백성들

속으로  들어서게 하신것으로 깨달아진다.


다행이도 양성종양이라는 판명으로 한시름놓으며 우리의 갈길

인도해주시라고 그날  삼성산 성지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절뚝 절뚝  목발을  짚고서....


 

그날밤 삼성산 철야기도 방에서 나도 생전처음으로 커다란 스크린속에서

얼마전 내 생애에 딱 한번 제일 크고 심하게 다투었던 할배와의 전쟁장면이

펼쳐져 보이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지 그순간 참지못해

터져 나오던 통곡의 외침이 얼마나 흘렀는지 주위도 조용해지고..

나는 천국에 와 있었다.


그 새벽 절대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을 만큼 다 놓아버려도

평안해 지는 다볼산의 천국을 나도 보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신앙의 문턱을 넘어서며 사람이 되어갔다고나 할까?


골짜기 졸졸흐르는 실개천가에 앉아 도시락 김밥을 먹으며

젊은 날의 우리모습을 기억해가며 도란도란 행복하다

산 길 따라 길다랗게 엮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


이곳 삼성산 성지엔

앵베르 범주교와 모방 신부 성야고보 샤스탕 신부 세분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라 한다

낮에는 이국적인 면모때문에 늘 상복으로 얼굴을 가리고

밤낮으로 복음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며 특별히 모방신부님은

어린소년 김대건 안드레아 , 최양업 토마, 최방제 프란치스코 등을

마카오로 유학시켜 조선 최초의 신부로 양성했다는 고마운 일화도 전해온다.


천진암 성지와 함께 이곳 삼성산 성지 또한 우리부부에겐

참 믿음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젊은날의

오래되고 참새내기 의 믿음을 자라게 해준 어머니의 땅이

라고 돌아오는 길 내내~ 

 

"그래 그래.. 감사하고 말고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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