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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121.131.169.*]

2013-03-07 ㅣ No.10102

미사보

누군가 미사 보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여인이 미사에 임할 때 자신의 머리를 보호받고 미사에 임하라는 말씀을 복기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미사에 임하는 사람들 가운데 간혹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누구하나 그것을 지적해주는 이가 없다고 하고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인가 지적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필자가 성모성심 성당으로 돌아온 날 성체 조배 중이신 어머니와 연세 같으신 정 이사벨라 수녀님의 기억을 이끌어준다. 수녀님은 누군가에 대한 사랑으로 지친 나의 말을 듣고 당신의 묵주를 손에 쥐어주셨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한 바퀴도 돌리지 못하고 잃어버려야 했다. 아마도 가정교육 잘되어 늘 착한 침묵으로 임하던 어느 후배에게 양복을 물려줄 때 안주머니에 담기지 않았겠는가 하는 추측만 남아있는데 얼마 후 후배의 결혼 통지서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매괴 여고 50주년 팜플렛 제작 차 감곡성지를 방문하니 수녀님이 다시 반갑게 맞아주셨다. 수녀원 마당에는 성령강림 초대 본당에서와 같은 성모님상이 있었고 성지에 사는 고양이들이 신기하게도 밥을 주는 수녀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모여들고 있었다.

이 날 세례, 혼인, 장례미사 세 대를 참례했다는 수녀님은 내게 두 번째 묵주 선물을 주셨는데 하나는 장미문양 아로 새겨진 잃어버린 루르드 본토 묵주보다 훨씬 초라하게 생긴 나무 물방울 묵주였고 하나는 그녀가 좋아하던 연보라색과 같은 묵주였는데 아내에게 전해주게 되었다.

나무 묵주에는 하얀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어있다. 지난해 5월 1일 어느 여인 초대를 받아 첫 번째 소임으로서 장미 나무를 마당 쪽의 장미 나무와 같이 살도록 이목하고 칠월의 더운 태양 아래 그늘 집을 만들고 꼼꼼히 하얀 페인트칠 할 때 묻어난 것이기 때문인데 맞은편에는 또한 갖가지 장미꽃들이 피어있었고 놀랍게도 그 사람은 그 옆에 안개꽃들을 심자는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서 잠시 글을 정돈, 회상해보고자 한다.

안개꽃 가슴에 안고 다가온 사람아
안개꽃말 묻던 그 마음
안개 속으로 어렴풋이 그대를 돌아본다.

"엄마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구하라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구하고 싶어요."

무엇이 우리들 사랑인가
무엇이 그대와 헤어짐을 노래하기에
무엇이 그대와 나의 희망을 기약함인가

사람들은 묵주가 주인에게 돌아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것을 물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얼마나 게으르면 수녀님 권면으로 마리아의 또 다른 이름 실비아로 거듭난 아내의 연보라색 묵주에 대하여도 묻지 못하였다. 옆에는 엊그제 아파트 출구에서 주운 투명한 묵주가 걸려있다. 엘리베이터 옆 게시판에 공지하여 교형과 악수를 나눌까? 도 생각해본다.

미사 보에 대한 신자들의 바보 같은 침묵 자세와 필자의 묵주가 그 품에서 오가는 동안 그것에 대하여 묻고 대답해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회두한 나도 바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 완전한 기도라고 하는 꿈과 관련하여 네 개의 들숨날숨 또는 잠과도 관계가 있겠다. 첫째 잠은 이미 잠든 자신과 함께 자신은 자지 않는다고 우기는 단계다.

두 번째 잠은 몸과 마음의 잠으로서 소위 말하는 숙면이다. 이때에 여러 가지 꿈을 꾸게 되는데 세 번째 잠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마지막 꿈을 기억하며 깨어남이라는 것이 공존한다. 그와 내가 죽었든, 살았든 말이다. 그리고 네 번째 활동에 있어 게 중에는 아직도 자고 있으면서 잠자지 않는다고 우기는 자아조차 만날 수 있겠다.

이것이 우리들의 살고 죽는 모습이다. 꿈속에서 임을 만난 사람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꿈속에서 마지막임만을 기억하며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을 보고 있는가? 필자는 이때에 힘주어 여인은 마지막 사랑을 기억한다는 속설을 믿기에 첫사랑을 못 잊는 남자의 마음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자는 가슴속으로 말하고 여자는 몸이 건강하기에 늘 아주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고 이때의 몸이 아픈 사람은 오로지 한 가지 걱정만을 한다. 그것은 건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남자는 하느님이다. 여자는 인간을 지칭함이다. 따라서 미사 보를 즉 미사 보호 두건을 쓰지 않는 사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먼저 탓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일상의 패배가 달콤한 승리보다 더 치료효과 뛰어남을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기에 개인 기도 중 미사 보를 착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이는데 그것이 심해지면 화성인이 될 수 있으니 그 또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우리 인간은 자주 공동체 안에서 세 가지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이때에 단순하게 미카엘 행세만 하다가는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 하는 것이라고 음으로 양으로 상호 낙태 자 형 돌팔매질을 당할 수 있고 계속하여 인간 편향적 사고로서 라파엘로만 머물다간 영락없는 돌팔이 의사가 되기 십상이다. 이때에 우리나라가 세계 1위의 낙태, 제왕 절개 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시대의 남녀인 우리가 반성할 일이다. 여기서의 반성은 ‘돌아보다’ 즉 회개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한데 회심하는 것도 미사 보를 쓰는 것과 개신교적 인간의 사고로 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통계학, 즉 혈액형, 타로 점, 돌팔이 사이비 승려 즉 무당들의 사주팔자 학 같은 것이 심각한 사회악을 초래하고 있는데 승려나 세례를 통해 사제직, 왕직, 예언 직을 부여받은 너와 나 또한 천주교 신자로서 성 미카엘 대천사를 따라 전투적 크리스천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 가브리엘의 꿈을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미사 중 미사 보를 쓰지 못하는 임도 겉으론 그렇게 보이나 속으로는 삼위의 대천사를 만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미사 참례 객들은 편견이 아닌 내안의 평상심을 초대하는 삼중 적 태도로 그것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사순절이니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좌도, 우도를 보는 것도 좋고 일상 안에서의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보는 것도 한 방법이겠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 요셉 성인은 그가 관구 장으로 선임되자 수도원에 오락을 도입하였다고 한다. 밝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의 균형감을 위해 이 시대의 물질주의와 향락을 보다 올바로 받아들이자는 취지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아내들조차 남편의 검은 지갑에 둔감한 것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들이 서민의 삶을 운운하지만 실질적 서민의 삶들이 처절한 2. 3급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다시 저들이 여관에 흘리고 가는 온갖 오물들을 감당해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시대의 남녀는 거꾸로 문화, 사회를 우선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에 또 다른 주인공들은 이로써 나름대로 소신과 고집과의 화해를 추구하겠으나 홀로 길을 걸으며 녀석이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며 그래도 참아야 하는 여건 속에서 휘어지지 말고 차라리 부러질까? 라는 분심을 맞기도 한다.

이때의 부러짐은 무엇을 말할까? 인간은 나무를 닮았다. 가지는 찬바람에 자주 부러진다. 그것은 작은 새들이 집을 짓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은 미사 보를 쓰던 쓰지 않던 그렇게 살다 죽도록 내버려두는 방법과 미사에 임하고 있기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처럼 삼위의 대천사와 지혜를 나누는 방법과 신성과 인성의 조화로서 과거와 미래로 도둑맞지 않고 미사에 집중하는 자세가 필요하겠는데 이로써 상대를 보고 재빨리 기도하는 여행자의 자세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파견 받는 관문에서 우리는 또다시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수를 이마에 찍는데 이때는 무엇보다 중재자인 사제의 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어둠속으로 떠나는 모녀의 등진 모습을 돌아보는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전히 세계 2위의 교통사고, 이혼 빈도가 기다릴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제2의 예수 사제의 마음, 그것이 없다하면 다시 나는 사이비 목사 또는 무당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늘 깨어난다는 것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사랑과 가치를 추구하는 남녀의 관계를 닮아있다. 한창 호기심 많을 필자의 딸과 같은 나이의 자매에겐 이처럼 보다 범위를 넗혀 대응할 것을 권고합니다. 여성적으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호흡으로 직접 부르는 노래도 좋은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들리지 않는 음과 보이지 않는 음정의 소중함을 간과할 때 많은 여성들이 그것을 사리사욕에 젖어 부르는 남성의 노래에 금 새 취함을 봅니다. 따라서 이때의 여성의 민감함도 모성애도 좋은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특히 용서받기 어려운 경계와 용서받기 쉬운 작전의 상관관계 또한 여성과 남성의 그것을 닮았는데 이때의 인생안의 냉담 자들도 결국은 모두 성이 아닌 성령의 감화로서 내 탓이오!로서 세 번 가슴의 문 두드리며 그것들을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피한다고 능사가 아닌데 우린 참 부끄러운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모교 근처 자정이 넘으면 내 자녀 같은 아이들이 더욱 팔 장을 끼고 모여들고 이시대의 길을 지나갑니다. 그곳에는 간디가 말한 7대 사회악중 하나인 양심 없는 상업행위의 화려한 모텔, 호텔들도 독버섯처럼 생겨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같은 자매님은 그렇게 심각한 일반 환경의 남녀 입장은 아니겠으나 수비력이 옅은 상태로 노출되어 있을 수 있으며 우린 이런 사회를 함께 살고 있기에 보다 범위를 넓히고 남자 친구와 함께 이것들을 함께 돌아보자는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때의 남자의 마음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더욱 넓게 배려하기 시작하겠지요. 서로 아끼고 사랑함으로서의 기다림과 그리움의 합당한 예방주사를 맞는 것입니다. 남녀가 함께함으로서 자주 걸려 넘어지는 생리욕은 1차 욕구일 뿐인 것입니다. 그 경우 사제들은 성령의 스킨쉽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소유자로서 유무상통으로 절재를 나눠주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아무튼 사랑은 어려운 것이 진짜랍니다. 그래서 부자는 천국에 이르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지요.

전입가경의 마지막 자아 욕까지 보다 넓고 자유롭게 생각하길 바랍니다. 이론과 실제 또한 다를 수 있기에 하느님께서 때때로 우리의 기도를 거꾸로 이루어 주심 또한 성질 급한 한국인의 그것을 치유해 주시는 시나브로 사랑과 관련 깊으니 엄마, 아빠와도 모자란 대화를 충당하듯 조언을 나눠 드리세요. 낚시꾼처럼 결혼한 뒤 아내를 처음 그것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남편들의 한계도 다만 아름다움으로 보여 지지만 아내들 역시 봉사는 관리가 아님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인데 자매님 역시 한창 젊을 때 친구와 함께 즐겁게 그것을 잘 가꾸길 바랍니다.

정씨 성을 가진 네 사람과의 만남(로사, 수녀님, 사이비 중, 원정스님)을 이은 필자의 개인적 소견이었습니다.

2013. 3. 7(木`). 海棠 하 경호 Domin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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