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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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 3] 3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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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오 [matthiaskim] 쪽지 캡슐

1999-05-12 ㅣ No.330

3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비행기만 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나의 아버지는 한때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 소재한 기린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으

신 적이 있다. 내 기억에 의하면 아버지는 가족보다 학생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었다. 월급을 타더라도 가족을 위해서 쓰는 액수보다는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서 쓰

는 액수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시 빈곤한 살림을 면치 못했다.

  당시 아버지의 제자 중에 장성해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투기 조종사로 임관된 사

람이 있었는데, 어느 가을날 아버지를 몹시 흥분케 만드는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몇 월 며

칠 몇시 몇분에 자신이 편대장이 되어 시험비행에 출격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그 지역을 경

유하게 되었으니 스승님의 은혜를 기리는 의미로 모교의 상공을 세 바퀴 선회하고 돌아가겠

노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받은 날부터 아버지는 일기예보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혹시 그

날 비라도 내린다면 아버지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 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는 소풍을 앞둔 국민학생들처럼 기대감에 부푼 표정으로 자나깨나 라디오의 일기예보를 체

크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전날 국립중앙관상대의 일기예보는 쾌청이었다. 그래도 아버지

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국립중앙관상대가 시설미비로 자주 엉터리예보를

일삼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그날 날씨는 쾌청이었다.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한다면 전투기가 오기로 예정된 시각에는 산수를 가르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체육시간으로 대체시키고 학생들을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학

생들에게 편지의 내용을 소상하게 이야기해 주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아버지도 학

생들도 수업은 건성이었고, 수시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전투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

었다. 마침내 예고된 시간이 되자 요란한 비행음이 천지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학

생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인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을이었다. 하늘은 눈부신

쪽빛이었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일순 전투기 편대가 서쪽 산머리에 나타나서 빠르게

학교 상공을 가로지르더니 동쪽 산머리로 사라져 버렸다. 한르에는 비행운만 남아 있었고

운동장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동안 미묘한 실망감과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시 비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돌아온다아.

  학생들의 환호성과 때를 같이하여 편대는 한 번 더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동체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더니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학교의 상공을 선회

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와아아 하는 함성이 터지면서 교실 여기저기에서 선생님과 학생들

이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교장선생님도 달려나왔고 교감선생님도 달려나왔다. 며칠 전부터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진 모양이었다. 면소재지의 조그만 국민학교였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하늘을 쳐다보며 손을 흔들어대는 선생님과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편지의 내용대로 전투기 편대는 학교의 상공을 크게 세 바퀴 선회하고 돌아갔다. 텅 빈

하늘에는 비행운만 남아 있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전투기 편대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오래도록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투기 편대가 학교 상공을 세 바퀴 선회하고 떠나는 데

는 불과 3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버님은 그 3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을 떠올리면 한평생 누적되어 있

던 고통이며 울분이며 피로들이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아버님과 교

분이 있는 분들이시라면 누구나 이미 스무 번도 넘게 들었을 이야기겠지만.

 

                                   - 이외수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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