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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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맞이한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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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학 [pshak59] 쪽지 캡슐

2001-04-09 ㅣ No.3229

이글은 *신달자 (시인 /교수)이 가톨릭다이제스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내가 만난 가톨릭/눈물로 맞이한 가톨릭
1977년 늦은 봄, 늦은 오후 시간에 나는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하면 틀린 말이다. 방황하고 배회하고 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대로 땅 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디론가 한 몇 년 사라져 잠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때 그렇게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막내아이가 세 살, 그 위로 일곱, 여덟 살인 아이와 팔순 시어머니가 집에 있었고 나는 막연한 혼수속에서 중환자실에 누운 남편의 면회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하늘이 무너진다던가 하늘이 노오랗다던가 하는 말의 실제를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니 그런 것인가 아닌가도 인식할 줄 모르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황망했었다. 내게 종교 따위는 없었다. 대개 무지한 삶을 막무가내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산다고 한다. 나의 힘으로… 나도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었고 심지어 종교를 얼굴에 그리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녁이 오고 있었고 다리에 힘이 없어 나는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불러 이야기할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아는 사람이 설사 있더라도 나는 피하고 싶은 그런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그무렵 나는 나의 남루를 보이는 일에 신경이 곤두섰다. 나의 이야기를 아침밥상에서 아무개가 이런 꼴이 됐다며 나의 불행이 남의 반찬용이 되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피하고 피하고 나는 외로웠다. 외로움의 극치를 사람들은 알지 모를 일이다. 나는 서서히 걸었다. 걷다가 보니 내 앞에 혜화동 성당이 있었다. 뭐랄까 무심결 그렇다. 무심결에 나는 발걸음을 거기로 옮겼다.
성당문이 열려 있었다. 다시 문을 열었다. 생각난다. 성당은 비어 있고 빈 의자 그 너머 벽에 예수님의 십자고상이 달려 있었다. 눈에 들어왔다. 흔히 보던 그림이었다. 십자가처럼 흔한 게 또 어디 있는가. 아아 그러나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리가 피곤했을까.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으며 바로 눈이 마주친 십자고상….
그때였다. 온몸에 전율이 왔고 그리고 온몸에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반드시 눈에서만 흐른다는 것은 상식적인 말이다. 때때로 뼈가 우는 경험에서는 상식을 뒤엎는다. 나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발톱이 울었고 손톱이 울었으며 척추의 뼈도 소리내어 울었다. 그렇게 몇 시간 울었다. 그리고 나는 그 울음을 이제 그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그 울음은 도저히 내 의지대로 그쳐지지가 않았다. 나는 무슨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그래 울음의 마법에 걸린 여자처럼 울고 또 울었다. 일생에 울어야 할 분량의 눈물을 나는 그 순간에 흘렸다고 생각한다. 우는 데도 힘이 필요하다.
나는 너무 울었으므로 일어설 기운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으로 걸어가는 내 걸음은 힘이 있었다. 면회실에서 나를 찾고 있었다. 웅성거렸다. 드디어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23일만에 그는 혼수에서 깨어나 나를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너무 지나치게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고 나는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 내 인생에 내 상처에 깊이 닿아오는 어떤 빛에 대한 감사는 억눌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가톨릭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가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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