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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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전과 동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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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5-02-09 ㅣ No.9387

 

2월 9일 재의 수요일-마태오 6장 1-18절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파전과 동동주>


요즘 틈만 나면 아이들과 함께 등산을 다닙니다. 늘 가까운 관악산만 가니 애들이 싫어하는 눈치여서 오늘은 차를 몰고 정릉 쪽으로 해서 북한산을 올랐습니다. 하루 종일 맑은 공기도 마시고, 땀도 흘리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하산 때마다 제가 늘 직면하는 꽤 큰 유혹거리들이 있습니다. 산 초입까지 내려오면 어김없이 감자전, 파전 굽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또 주인아주머니들은 얼마나 상냥하고 친절하신지.


아이들도 꽤 출출한 눈치여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처음 들어갈 때는 딱 파전 한판만 먹고 나오기로 하고 했었지요. 그런데 바로 옆 식탁에 앉은 등산객들이 시원한 막걸리를 한 사발씩 숨도 안 쉬고 들이키면서 “카^^! 좋다!” 하는 겁니다.

   

그 순간, 제 마음은 즉시 흔들리는 갈대가 되었습니다. 운전을 해야 되고, 또 아이들도 있으니, 먹으면 절대 안 되지 하는 마음이 49%, 딱 한잔인데 뭘, 하는 마음이 51%였습니다.


딱 한잔만 하는 마음에 좁쌀막걸리 한 병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웬걸, 한잔 하고 나니 또 마음이 그게 아니었습니다. 남은 술이 아깝기도 했지만, 그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또 한잔 더 하고, 그러다 보니 두 잔이 세잔 되고, 또 다른 한 병이 되고...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제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 따로 행동 따로,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제 부끄러운 모습을 아이들에게까지 들켜버리고 말았네요. 유혹은 그 빛깔이 너무도 고와서 나약한 우리들은 이렇게 한순간에 넘어트리고 맙니다.


오늘 설이자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 선포되는 복음은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이자 이중인격자들의 대표 격이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보다는 율법에, 하느님의 계명보다는 그릇된 전통에 몰두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다시 맞이한 이 은총의 사순시기, 어떻게 해서든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신앙인, 신앙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신앙인으로 하느님 앞에 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든 치명적인 결점인 위선과 이중성을 극복하는 우리이길 바랍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한 인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인간 안에 깃든 하느님을 극진히 섬기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요즘 존경하는 존 포웰 신부님의 ‘내 영혼을 울린 이야기’(가톨릭출판사)를 읽고 있습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우리에게 선물로 남겨주는 여러 감동적인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실크 잠옷 한 벌’이라는 이야기는 사순시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신학교 근처 한 교회 병원에 다재다능하고 친절한,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극찬을 하는 수녀님 한분이 근무하고 계셨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그 병원에서 활동하기 3년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형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답니다. 의사들은 장상 수녀님들에게 ‘이 수녀님은 남은 생을 이 침대에서 보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답니다.


수녀님은 병상에 누운 채, 모든 희망을 잃은 듯한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의 정신 이상은 한 가지 특이한 증상을 보였는데 침대보를 모두 벗겨 내고 자신이 입고 있던 환자복마저도 벗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전문의에 따르면 수녀님은 자신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지긋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밝은 분홍색 실크 잠옷 한 벌을 들고 수녀님의 입원실에 들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딸을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로 수녀님에게 말했습니다.


“이걸 입으면 아주 예쁠 거예요.”


그 수녀님은 그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두 손으로 제 뺨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준 순간, 저는 정신분열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저는 제 뺨을 어루만지던 그분의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습니다. 그 순간, 정말로 사랑이 사람을 치유한다는 것과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듯이 ‘우리는 진정 다른 사람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로 수녀님은 그 따뜻한 체험을 자기 인생의 화두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활함으로써 훌륭한 분이 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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