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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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04 - 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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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6-04 ㅣ No.112402




2017
06 04 () 가해 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 묵상



사도행전 2,1-11
코린토 1 12,3-7.12-13
요한복음 20,19-23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70604)


성령강림 축일이 되면 우리는 제1독서에서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의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그것은 사실(事實)의 보도가 아니라성령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체험을 전하기 위해 구약성서 표현들을 빌려 각색한 장면입니다. ‘세찬 바람’, ‘소리’, ‘불’ 등은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입니다각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각자가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은 바벨탑(창세 11,1-9)의 이야기를 상기(想起)시킵니다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올려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며 살고자 하였습니다인간이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며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한다는 말입니다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언어에 혼란을 일으켜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성령강림 장면에서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일은 그 흩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성령이 각 사람 위에 혀 같은 불길로 주어지자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말을 하지만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합니다성령은 인간 상호간의 차이를 존중하고그 차이는 인간의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사실 인간은 상호간에 차이가 있기에 서로 보고 들을 것이 있습니다의사소통이 원활한 사회는 인간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존중하며살리는 사회이고그것은 다채로우면서 풍요로운 사회입니다반면한 가지 말을 강요하는 통제된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킵니다강요와 통제는 생명을 죽입니다성령은 인간을 살리십니다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다양하게 의사소통하며풍요롭게 살도록 하십니다풍요로움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때가능합니다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자비와 용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성령을 받으시오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창세기는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오늘 우리가 화답송에서 함께 읊은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30). 예수님이 체포되자 도망친 제자들이었습니다그들이 다시 모여들고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교하면서 그들이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다시 소생한 것이고그들의 모습이 새로워진 것’입니다예수님의 입김인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개인고백 고해성사에서 사제가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용서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현행 고해성사가 교회 안에 생긴 것은 1215(4차 라테란 공의회), 13세기의 일입니다그때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형태의 참회 절차가 있었습니다현행 개인고백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던 그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면엄청남 보속곧 고행(苦行)을 하였습니다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실히 심어 주기 위한 개인고백 고해성사입니다.

오늘 복음이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입니다한 번은 긍정적으로 말하고 또 한 번은 부정적으로 반복하는 화법입니다. ‘용서받지 못한다.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사용하지 못할 말입니다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말입니다그것에 반발한 예수님이었습니다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습니다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도버리지도 않으신다고 믿은 예수님이었습니다원수까지 사랑하고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 36)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성서 안에 있는 부정적 표현들은 하느님 앞에 책임질 수 있게 행동하자는 공동체의 마음다짐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쳤습니다사람이 자기 척도(尺度)로써 사람을 판단하고통제하는 것이 죄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서 8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당신네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그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44) 단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며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이해하고용서하고살리는 데에 있습니다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이웃을 봅니다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획일성을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하느님은 다양함을 풍요로움으로 보시는 광활한 시야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시면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요한 15, 26)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질 것입니다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자는 것입니다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하느님의 시야를 우리 앞에 열자는 것입니다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숨결로 살자는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7060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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