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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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영혼 [203.132.185.*]

2007-07-22 ㅣ No.5636

 
 
   † 스테파노 형제님, 마음이 많이 서글프시겠군요. 힘내십시오.
   천천히 스테파노 형제가 사랑하는 그 여인이 사랑하는 대상을 형제도 과연 사랑할 수 있는지 바라보십시오.
   사랑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때때로 고독한 것이며, 그 틈새를 타고 악마는 죽음의 유혹까지 보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스테파노 형제를 부르시는 신호라 생각해 두십시오.
   하느님께서 스테파노 형제가 장차 어느 여인과 가정을 꾸리던지 한 여인을 책임질 수 있는 힘을 주시고자
   부르시는 신호라 여겨두십시오.
 
   그 여인이 매정하게 스테파노 형제와 절교를 선언하였다면, 그에 대하여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열쇠는
   스테파노 형제가 갖고 있는 듯 합니다. 
 
   사람이 상대로부터 당황스러운 말을 들었을 때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참 많치요. 이에 참 잘한것 같습니다.
   성급한 것은 화를 자초하기 마련이고, 그 여인을 심판하기 보다는 먼저 들어준 형제의 미덕으로 그 여인이
   형제님으로 하여금 더욱 사랑 받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생각해 두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형제님의 경우처럼 '말한 사람과 들어준 사람'의 입지가 반복 역전 됨으로서
   보다 하늘과 가까워지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그것을 아픔을 통하여 감수해야 할 때의 고통은 당사자가
   아닌다음에야 실감하기가 어렵겠으나 주님께서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를 침묵 가운데 평화로 이끌어
   주시기에 새로운 복음을 나누라 하십니다.
 
   상처중일 때는 남자답게 대범하게 다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세히 기억하는 것은 사랑했던 그 여인에게
   일단 맡기십시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속에서 남자로서의 자신감은 비단 여성에 대한 매력뿐만이 아니라 악이 범람하는
   현대의 현상 속에서도 '노동'이 "상품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간성의 표현"이기에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 우리의
   에너지 또한 판매 상품화로서 현혹 받고 있는 수많은 구성원들의 경우 그것을 가치있고 만족스럽게 사용하기보다
   는 판매하는데 더욱 노력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능력과 재능이 '돈을 버는 것'에 종속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세속에서의 '돈'이 하느님 말씀 성경에서의 '달란트(직역=돈, 의역=재능, 탤런트)'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데
   젊은 스테파노 형제로 하여금 깨우쳐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에 대처할 때 형제님의 남다른 '신중함'을 장차 축
   복으로 만드십시오. 이성을 잘 모르는 나이대에 그 연민의 정으로부터의 아픔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형제님 마음속에 아직도 하느님과 사탄의 그것에 대한 식별력이 부족하다는 현상입니다.
 
   필자는 80년대말 한 여인을 깊이 외사랑한 경험이 있습니다. 연중 300일 가량을 그녀의 집을 지나야 했지요.
   그래서인지 작금은 가끔 길을 걸으며 기도할 때에 문득 지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그사람의 하루를 표현해
   주기도 합니다. 여자 이해하는 것과 하느님 이해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지 않나요? 아마 이것은 여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범 우주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니 여와 남도 그것을 즐겨 믿고, 닮고, 따를
   때에 이해의 폭이 넓고 깊어질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계속 베푸시면서 말씀이지요.
 
   아무튼 여자와 남자의 이해의 수단을 대충 정리해 보면 복음적 해석으로 여인은 '보호본능'을 남성은 '귀소본능'
   을 갖는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인은 '안정욕'을 자주 표지하며 남성 또한 '명예욕'에 스스로 시달리기도
   할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때때로 세속의 수도자로 돌아와 상기 거론된 교황 23세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에서의
   '노동'에 대하여 잠시 묵상하였는데, 우리의 그러한 능력과 재능을 '돈'을 버는데 얽매인다면 이것은 자연 질서에
   반하는 것이라 합니다.
 
   형제님의 재능을 주님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효과적인 일과 생산적인 일로써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
   로서 매우 인간적이며 만족감을 주는 활동이고, 정당한 댓가로서 가족을 부양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
   의 몇몇 근본적인 심리적,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주님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어떤 사람에게 일을 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난데없이 '돈을 줄 생각
   이 미온적일 때 형제님처럼 당황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혼신의 힘을 다하게 해 준것이 무언가와 비례
   함으로써 상기 노동의 그것을 머리로나마 다시 되새길 것이며, 비록 그 사람이 연락을 주지 않더라도 그 돈 또는
   달란트를 언제가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숙성된 빵과 술의 봉헌으로 발전시킬 자유를 얻습니다.
 
   요는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것을 가슴으로 내리는 것이 문제인데 사랑은 내리사랑이니 내적인 그것과 남아로서
   싸워 이겨나가는 슬기로서 기다려보세요. 결국은 시간이 아무리 지날수록 불멸하지 않는 복이 될 것이며 이 또한
   고통과 비례되는 은총인것이며 그 단축 또한 형제님이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정리하여 신앙도 사랑도 필연적인 댓가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며 형제님은 지금 큰 은총을 받고 있지요.
 
   무질서한 사회적 상황하에서 형제님이 남아로서 '한 여자를 사랑한것이 죄가 된다면, 그것을 당연히 받겠습니다'로
   선포할 수 있었던 중대한 이유는 노동 또한 우리의 이러한 집착, 애착등의 현상으로 인하여 자칫 근본적이고 건강한
   특징을 잃어버리고 절망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수호천사의 부름같은 기도인 것입니
   다. 기도 또한 고통속에서 더욱 빛나는 것도 같은 순리인것입니다.
 
   인생이 내가 주인공인데 내가 안 그랬으면 그만이지, 사람들이 형제님을 비난, 비판 하였다는 그녀의 평가에 연연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시 그 사람에 대한 칭찬이나 악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 아닌가요?
   사람들의 쓸데없는 내적인 비밀법정이 양산한 유언비어라면 그것에 속지 마세요.
   그리고 그녀를 훈계해주면 그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훈계의 첩경은 머리로 빠르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 가슴
   으로 부드럽고 온화하게 해주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더 나아가 나의 내적인 비밀법정부터
   다시 경계해 나가면 그만입니다.
 
   형제님은 그 공격적인 절교 선언에 잘 대처한 경우입니다. 하느님의 복이지요. 요즘의 일부 신심 단체에서도 구태
   의연하게 사람들 모집시 여전히 까다로운 서류를 준비하라 하고는 지원자들에게 죽은 침묵을 대하려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습니다. 이 또한 거듭 낙방감을 당해본 평신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책임이 결여된 경우와 능히 절교
   선언할 수 있고 화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나라 명동의 제일 비싼 땅도 많이 밟혀야 더욱 비싸지는 법이며 나부터
   주님을 왕따시키고 자주 기복 신앙을 표출 했슴을 반성할 수 있기에 이 또한 은총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튼 깨
   달음이란 것도 공짜가 없습니다. 신앙도 공짜가 없는 것입니다.
 
   요 며칠 메스컴에서 졸속으로 일을 처리하는 어떤 공무원의 불찰로 인하여 실종된 어머니가 치매 환자로 발견되어
   가족이 분노하는 모습 보셨나요? 필자의 경우도 형제님과 비슷한 시기에 먼동이 트이는 어느 새벽길에서
   오토바이 사고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도무지 이런 모습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필자가 차를 세우자 구경꾼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중 한 사람의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필자는
   졸지에 가해 용의자가 되어 사고 처리반에 이첩 된 사건이 기억났습니다. 이것을 잘못 처리한 공무원이나 치매
   어머니로 방관한 공무원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이지요.
 
   형제님도 민원인을 많이 접한다 하였지요? 포청천이 되시고 포청천이 되기 위하여 외유내강의 하느님의 사랑을
   풍성히 접하라는 그 은총에 감사드리십시오. 상기 공무원 담담자들의 경우 필자가 화를 내자 더 관료적으로 필자를
   애 먹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피해자 가족 또한 추후 감사의 통화 하나 없이 필자를 의심하였습니다.
  
   왜들 그리 복잡하게들 살까요? 필자가 혹 사례비라도 달랄까봐서일까요?
   혹자들도 혹 그 마당에서 삼분의 일인 그 사람들처럼, 아니 그 순간 마지막으로 지나던 택시 운전사의 선의(?)처럼
   '그거 신고하면 큰일나요! 그냥 가세요'하실겁니까? 미사 참례의 방관이나 그 무엇에 대한 방관은 태초로부터의 하
   느님의 상선벌악(선행은 상을 악행은 벌을)의 진행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스테파노 형제님,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스테파노 형제님이 현명한 것이고, 그것이 주님의 사랑에 보다 가까운 것
   입니다.
 
   필자도 그 순간 세상 물정과 이해 타산에 빨라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면 30분만 늦었어도 한 생명이 죽었을 것이
   라는 의사의 통고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생명이 수술대에 들어가기전 잠시 깨어나 타이탄 트럭의 뺑소니 사
   고였노라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 며칠전의 남산터널 첫 유료화 날에 선그라스끼고 그저 돈에 속아 과속을 방관하던
   필자의 무지로 차가 반파 된 그 상황에서 충분히 누명 쓰고도 남을 일인것입니다. 하느님께선 이처럼 살아있는 묵
   주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를 쉬어가면 실컷 도망가게 냅두고도 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선 우
   리를 애타게 기다려주십니다. 형제님도 심연의 깊으신 하느님과 함께 그녀를 기다려보십시오. 그리고 형제님 또한
   그녀의 성모님과 대화(기도)를 시도하면 그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10년간 240만의 증가된 그리스도인들중
   220만이 가톨릭 신자들이기에 개신교 목회자들이 야단났다는 그것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필자가 글을 쓰지만 참 웃기네요. 나중에 하도 건널목의 행인들이 웃어서 장안평으로 가서 차를 고쳤던 일화였으니
   까요. 아무튼 필자가 형제님처럼 순진한 때가 아닌 지금의 입장이라면 그 공무원 일벌백계로 경찰서장에게 분노의
   서한을 보내 엄중한 징계를 추진하였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작은 실수들로 비롯된 사건인데 왜 이 사건이 되살
   아나고 있을까요?
 
   형제님, 그 여인이 왜 형제님 곁을 떠나고 싶어하는지 알고싶다 하였지요?
   상기 교통사고와 같은 현상이고 전화위복의 계기를 베푸시는 예방주사라 생각하면 의외로 일이 잘 풀릴것입니다.
   형제님이 상기 교통사고의 신고자인지, 피해자인지, 구경꾼 1~3인지, 졸속 공무원 1,2인지는 형제님이
   선택해 보세요.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의 이정표아래 주인공으로 초대받는 형제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도 악은 영성체 때에도 초대받습니다. 유다가 영성체를 하자 사탄이 그의 속으로 들어간 것도 한 예입니다.
   자살자를 이해하는 것은 좋치만 자살한 사람도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있기에 불 지옥에서 받을 형벌을 예견한
   다면 자살이야말로 어리석은 발상이란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살한 어느 가수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야 
   라는 패배자의 궤변에도 속지 마시고 사랑은 아플수록 참 사람에 가까운 진리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히딩크처럼 자신감을 잃치 마시고 당시 냄비언론들의 비난을 즐기듯이 인생이란 무대위를 서는 주인공으로서 우
   유부단함이 아닌 자신감을 배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언직, 왕직, 사제직은 세례성사의 삼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유의 폭을 넓히고 나의 성찰을 더욱 즐길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마련하십시오.
 
   우리는 방관이라는 명제속에서 때때로 승자인 무대위의 주인공이거나 패자인 관객에 머물기도 합니다.
   이 때에 조건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보다 조건없고자 이 혼돈의 고심위에 미사의 은총을 섞도록
   신부님이 물(생명)과 피(죽음)의 비유로서 성찬예식을 섞고 준비하는 영성체 예식을 바라보십시오.
   말씀의 예식도 이 곳 굿뉴스의 매일성경 필타로서 그녀를 더욱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길러보십시오.
 
   여인에게 자신감이 안 드시나요? 무서워 보인다구요? 절교의 충격의 여파로 능히 그럴수 있지요.
   오만이 들 수 있는 넘치는 자신감,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망각하는 것들을 예방해 주시는 특은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형제님의 신원과 사명감을 혼동시키려고 죽음의 유혹을 하는것입니다.
   고통의 특은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려보세요. 어둠의 세력이 도망가려 할 것입니다.
   그 어둠의 세력을 모두 포박하여 그리스도 제대위에 봉헌하는 것은 어떨까요?
 
   일상에서 민원인들에게 보다 따듯한 미소와 조건없는 선행, 계산없는 선행으로의 주님과 형제님의 사랑이
   더욱 회심으로 진화할 것입니다. 남자는 여인을 무서워하는 것도 좋습니다. 더 무서워하는 방법을 구체화 하는것도
   좋아요.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대화에서도 관계를 중시하고 남자들은 목적을 중시하기에 크고 작은 문제와 숙제의
   물타기를 합니다. 형제님이 그 모든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서 그야말로 남자답게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아닌것은 아니다라고 선포하면 그만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도 기도는 필수입니다.
 
   형제님 또한 오늘날 침묵으로 많은 것이 파괴 되어가고 있는 부부들의 문제점을 미리 공부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 기회에 보다 부드럽고 현명하게 나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계기로 삼으십시오. 상기 열거한 바데로 집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그것을 적용하면 됩니다.
  
   형제님이 그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 하였는데, 일단 우울증이라는 것이 무언가에 1. 지나친 억제의 결과이고
   2. 의학적인 용어로 '내적으로 전환된 분노'라 하였으며 3. 부정적인 사고로의 변질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AD33년 이후 수많은 관련 치유방법을 기록하여 준 성경과 성전, 신앙서적의 힘을 빌어보세요.
 
   무엇이든지 떠나던지, 말던지를 그분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교양있고 겸손력을 회복하여 상대와 이야기 할 때
   평화가 따르는 법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악화된 부부도 내가 주인공임을 잃치 않는다면 내가 남중 내편(남편)이요,
   안의 해(아내)가 됨을 누릴 수 있으며 아내 또한 가정의 왕비가 되어 왕을 섬기고 보필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얻게
   되는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죽겠다는 말도 주님의 마음을 참으로 아프게 하는 것이니 고해성사 받으세요.
 
   그 여인을 주님품으로 기꺼이 놓아주세요. 우리에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용서와 자애를 주시는 주님께 작
   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여인도 용서의 하늘, 화해의 바다를 가로지으신 주님따라 세상속을 헤엄쳐 나갈
   것이고 형제님을 주님께 놓아줄 것입니다. 남녀의 달란트가 워낙 각별하기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받들어 어느
   성직자가 왜 세상에서의 가장 큰 행복은 '모르는 남남이 만나 서로 포옹하는 것'이라 하였으며, 이분들은 이 행복을
   위하여 먼저 희생과 봉사의 삶으로의 수련을 행하고 있는가를 바라보는 계기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
 
   그 여인을 놓아주기 싫타면 성당으로 데리고 가는 작전계획을 수립해보세요. 본시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 신자와
   혼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내가 가톨릭 신자이길 원하면 내가 먼저 가톨릭 신자이어야 한다는 간디의 충고와
   상통합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이지만 뿌리가 있습니다. 미사중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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