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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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하느님은 왜 고통을 묵인하는가?----- 전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수상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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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3 ㅣ No.10575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문) 어떤이들은 이른바 '세상안의 고통과 악'은 진정 직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 안에 존재하는 고통'을 왜 제거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왜 그런 입장을 계속 고수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들의 신앙에 심각하게 문제를 느끼고는 있지만 여전히 종교적으로 신실한 사람들 마저 제기하는,

 일종의 `신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수상집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능한`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셨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닮은 모습으로" (창세 1:26 참조)지으신 인간들에게 부여한 그 위대한 선물에 대가를 지불하

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선물이 인간에게 부여되기 이전에도 하느님은 항구적으로 존

재하는 분이셨으며, 인간의 심판이 있기 이전에도, "그렇다면 네가 왕이냐(요한 18: 37)라는 도발적

인 질문을 그분에게 던졌던 부당한 재판이 있기 이전에도, 하느님은 존재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왕이냐?"라는 이 도발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물음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모든 민족들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너에게 달려 있단 말이냐?"

 

  빌라도의 법정에서 행해진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 18:37),  빌라도가 묻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요한 18:38)

인간 역사의 법정에 하느님을 고소한 이 비극적인 재판은, 결국 진리에 순응하지 않는 쪽으로 판결

이 내려지면서 막을 내립니다,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요한 18:38)고 말하고, 이어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 그러면 데려다가 너희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라,"(요한 19:6) 이런식으로 그는 그

문제에 관한 손을 씻었고, 성난 군중들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이런 단죄는,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오만과 비열한 음모에 바탕을 두

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 대한 진실이고, 우리들의 시대에 대한 진실이 아닐까요?

우리시대에도 똑같은 단죄가, 억압적인 전체주의 정권의 법정에서 숱하게 되풀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에서도 이런 단죄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인간 생명에게 죽음의 선고(낙태)를 내려도 좋다는 법을 통과시키는 것이 그러한 사례의 하나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고통당하는 이들의 편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당신이 고통을 자유로이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심을 보여 주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제안도

받기도 했습니다,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는가?" (마르 15:32)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까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 고통받는 다른 모든 이들이 다 그렇듯이,,,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 15:34)라고 외치셨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상의 고난이 없었다면,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진리는 설 자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내주시어,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랑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셨습

니다, 여기서 "끝까지" 라는 것은 최후의 숨을 거두실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를 받아들이셔서 그것을 당신이 짊어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께서 하신 말씀 중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났지만

    주께서 우리 모든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이사 53:5~6)

 

 고통 받은 인자는 "모든 것을 끝까지 참으시는"(I 고린13:7) 사랑의 계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사랑

이시라는 계시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을 부어 주시는" (로마 5:5)분이시라

는 계시이기도 합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앞에서 구원을 나누어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인간성 안에서 하느님이 하신 일들에 대해 계속해서 완고하게 판단

하는 사람에 비하면 그 이익이 비할 수 없이 풍성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사의 중심점에 서 있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심판은 곧 인간 자신에

대한 심판이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신적인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고, 겹치는 것

을 보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멈추어 서야만 합니다,

 산상설교부터 시작된 복음의 길은, 타볼 산(변모의 산)을 지나 해골산에 이릅니다, 해골산의 십자가 사건을 이

해하는 데 겪는 어려움과 도전은 너무 커서, 하느님은 스스스로 사도들에게 경고하기를 원하셨습니다,성(聖) 금

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일어나야 할 모든 일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성 금요일의 명백한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심판한 우리들, 우리 자신들의 법정에 세워 놓고 그분더러 자신을 정당화시켜보라고 명령한 우리 자신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단죄받은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해 우리 자신들은 과연 책임이 없는 것인지, 하느님에 대한 그 심판이 사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심판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심판과 그 결과가 -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 우리 자신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대천사 가브리엘은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날 것을 알리면서,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루가 1:33)이라고 계시하였습니다, 그러한 말들이 사실은 장차 일어날 미래의 일들에 대한 예고임을 알아차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다스림이 반드시 그러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 모든 인간들에 대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사실은 그런 순서를 밝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을 어찌 알아차릴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 시점부터 그렇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태초부터 그렇다는 말인가요? 해골산의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건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이사건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태초에까지 이릅니다, 하여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미래를 향해 문을 엽니다, 이 사건은 모든 장소와 시간과 전인류를 망라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기다림이며, 동시에 그 완성입니다,

 

  "이분을 힘 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사도 4:12)

 

 

 그리스도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구원론적인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은 파스카 신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희망을 위해,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멈추어 서야 합니다, 그러고나서 안식일 다음날 빈 무덤 앞에 서서, 예루살렘의 여인처럼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 28:6)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는,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십자가와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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