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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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님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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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07-24 ㅣ No.57533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17 주일 - 주님의 기도

 

어떤 선교사가 있었는데 선교를 해야 할 곳은 많고 시간은 없고 해서 가는 곳마다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고 바로 세례를 주고 떠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 다시 자신이 선교했던 지역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한 섬마을로 배를 타고 들어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물 위를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처음에 너무 놀라 유령인 줄 알았다가 마을 사람들임을 확인하고 나서 어떻게 물 위를 걷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다 기억하진 못해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만 계속 반복해서 기도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이신데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물 위를 걸었더니 정말 빠지지 않고 걷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만 끊임없이 되묻다가 결국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우리들의 이런 원초적인 질문들을 간단하게 해결해줍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자녀이다.’

 

주님의 기도에선 이렇게 내가 누구이며 또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묻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하느님이 네 아버지가 되냐?”

“물론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안 계시지.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랑을 통해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거야. 혼인한다고 생각하면 돼. 만약 어떤 여자가 혼인을 하고도 시부모님을, 아저씨, 아줌마로 부른다면 당장 이혼사유가 될 거야. 우리는 말씀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그래서 비록 그 분의 아버지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니 우리 아버지라고도 부를 수 있는 거야.”

“그럼 네가 아버지라고 하는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한 번 나한테 보여줘 봐.”

역시 이 물음에 대한 답도 주님의 기도에 다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셔. 하늘은 깨끗함을 상징하고 땅은 죄를 상징하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땅도 저주 받게 된 거야. 그래서 마음을 하늘과 같이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볼 수 없어. 성경에서도 ‘마음이 깨끗한 이는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라고 하거든. 하느님은 영이신 분이라 눈으로는 볼 수 없어. 사랑을 할 수는 있어도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어린이와 같이 깨끗해지면 그 때서야 그 마음 안에 사시는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거야.”

“그럼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죄’란 것이 뭐야?”

“죄는 바로 우리 ‘자아’들이야. 아버지를 잊고 자신만 높이려고 하는 마음이지. 사랑은 자신을 잊고 가진 모든 것을 주는 것인데, 자신만 생각하여 나누지 못하는 것이 죄야.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영광을 찾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도록,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하도록 하신 거야.”

“그럼 세상에 하느님만 찾다가 죽으라고 태어난 거야?”

“아니,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는 거야. 아버지의 나라는 성경에 따르면,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라고 나와 있어. 정의로운 삶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평화, 즉 행복이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그 행복이 우리에게 오는 거야.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지. 다만 그 방법이 혼자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사랑을 통해서 행복해지려는 거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지? 우리의 행복은 바로 저 십자가의 모습을 본받는 것에 있어.”

“뭐? 저 고통스러운 모습이 행복이라고?”

“사랑하면 행복하지.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 무언지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랑을 보여주신 거야. 사랑은 자신이 가진 것을 주는 거야. 그런데 생명만큼 큰 것이 어디 있겠어.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신 것이고, 우리는 그 수난으로 구원받게 된 것이지. 하느님은 정의이시기에 우리 죗값이 필요하셨는데, 하느님 스스로 그 죗값을 치르신 거야. 바로 자비와 정의의 신비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행복 자체이신 분이셔서 사랑이 아니고 행복한 일이 아닌 것은 하지 않으셔. 하느님은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행복해하시는 거야. 그래서 저 십자가의 모습이 가장 행복하신 모습이야.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 자녀가 신장이식을 해야 한다고 할 때, 부모가 신장 하나를 떼어 주었다고 해서 고통스럽기만 하겠어? 자신의 그 아픔으로 자녀가 다시 살 수 있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하겠지. 그게 십자가의 고통 안에서 느끼는 행복인 거야.”

“뭐 조금은 알겠는데, 좀 전에 사랑은 자신을 잊고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하느님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뭐야?”

“좀 전에도 말했듯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며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하는 거야. 아이가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한다면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답을 드리는 일이지. 예수님도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고 그렇게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신 거야. 아버지는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잖아.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거야. 땅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지.”

“그래? 그럼 나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면 행복해지고 영원히 살겠네?”

“물론 그렇지.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차가 기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아버지의 뜻도 내 힘만으로는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야. 사람은 교만해서 사랑도 자기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사랑을 할 수 없어. 하느님이 사랑이시거든. 차가 스스로 기름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과 같아. 포도 열매가 줄기에서 수액을 받지 못하면 열리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도 성령님의 열매야. 먼저 성령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시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래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시는 거야. 양식이란 바로 성령님을 의미하지. 그리고 성령님을 받는 것을 ‘성사’라고 하고, 크게 말하면 ‘기도’라고도 해.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야. 예수님께서 해주신 비유말씀처럼 친구가 밤에 찾아와 빵을 꾸어달라고 청하면 들어주지 않더라도 자꾸 ‘반복’하여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빵을 주는 것처럼, 지치지 말고 꾸준히 청하면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신다는 거지. 야곱은 하느님과 정강이뼈가 부러져가면서까지 밤새 씨름을 해서 축복을 얻어냈어. 그렇게 끝까지 버티는 게 기도야.”

“그렇구나. 그런데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지?”

“아주 간단해.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면 돼. 하늘나라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가 바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거든. 죄만 용서되면 다시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도 내 죄를 용서하지 않으셔. 하느님은 정의시거든. 성경엔 이런 비유가 나와. 수십조 원의 빚을 방금 탕감 받은 하인이 자기가 몇 백만 원 꾸어준 사람의 멱살을 잡고 그 돈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쳐 넣는다는 이야기지. 임금님은 다시 그 못된 하인을 잡아다가 돈을 다 갚을 때까지 역시 감옥에 쳐 넣지. 마찬가지로 서로간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정의상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셔. 그래서 예수님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가르쳐주시는 거야.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서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면 내 죄도 다 용서 받은 것이니,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도 돼.”

“사람을 미워하지만 않으면 다른 죄들은 지어도 되겠네?”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서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핑계를 대지. 서로 미워지기 시작했다는 거야. 미워지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이야. 내 죄를 무마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는 거지. 죄가 없으면 미워할 수 없지만,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인 거야. 예수님과 성모님은 당신들을 미워하고 고통을 주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지. 그분들은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어. 왜냐하면 그 안에 죄가 없으신 분들이기 때문이지. 마찬가지로 내 안에 죄가 있는 것과 상대를 미워하는 것과는 동시에 일어나는 거야. 하이에나가 썩은 냄새를 잘 맡고, 상어가 피 냄새를 잘 맡는 것처럼 이미 그들이 하이에나나 상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야. 그래서 교만하게 유혹거리에 기웃거려서는 안 돼. 예수님은 아예 유혹에도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도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죄를 지어도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시겠지?”

“물론이지.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도 있다는 거야. 예수님은 악령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낸다고 모함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이 세상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어. 성령님은 사랑 자체이시지. 마찬가지로 자비를 거스르는 죄 중에, ‘하느님은 이것은 절대 용서하시지 않으실 거야!’라고 단정 짓는 죄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야. 사랑 자체를 거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비 자체를 거스르는 죄거든. 우리는 절대 아무리 큰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돼.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의심하여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도 예수님께 손을 내밀었듯이, 유다처럼 끝까지 손을 내밀지 않고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주님의 기도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끝맺는 거야. ‘악에서 구하소서.’”

 

이렇듯 주님의 기도엔 모든 교리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 기도만 정성껏 바쳐도 빗나갈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 기도를 통해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 교리를 설명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입으로만 되뇌며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잘 새기며 바치는 것이 선행되어야할 것입니다.

 

 

 
< 주님의 기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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