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도반신부님의 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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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화 [bak1816] 쪽지 캡슐

2004-07-23 ㅣ No.10792

자기 과시란 하느님보다 자신의 능력에

더 많이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걸 식별하는게 중요합니다.

복음서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나오는 것이 마리아와 마르타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라자로의 누이들이였지요.
예수님은 무덤에 묻혔던 라자로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그 집을 방문하십니다.

당신 혼자서 방문하신게 아니라 제자들을 다 데리고
그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열두 제자에다 제자들을 따라다니며 시중들던 사람들까지 하면
대략 40~50명 정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겁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라자로의 은인이셨구요.

집 식구들이 총 동원이 되어 접대를 했습니다.
마르타는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정신없이 바빴지요.
그런데 마리아가 부엌에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마르타가 마리아를 찾아보니 예수님 옆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것을 본 마르타가 말을 합니다.

마리아한테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한테 하지요.
마리아더러 나를 좀 거들어 주라고 하라고.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마리아가 더 좋은 몫을 택했다."

마리아가 언니를 안 도와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마리아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그걸 봅니다. 그럼,

'내 동생이 그동안 예수님 말씀이 많이 듣고 싶었구나.
그래, 너는 말씀을 들어라. 내가 대신 일할께.'

이럴수도 있거든요. 언니니까.
그런데 그게 안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마리아에 대해서 화가 났을까요?
무엇때문에 화가 났을까요?
그게 중요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마르타보고
"너도 손놓고 여기 와서 같이 있어라."하고 말씀하셨다면
마르타가 화를 냈을까요?
안 냈을 겁니다.

'왜 마리아만 앉혀 놨어.'

그게 화가 난겁니다.
어떤 상황이건 내가 그 상황에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내 안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뭔가 걸려있습니다.
내 안에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것이 피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본당에서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걸 보면서 열받는게 있다면
그 사람들보다 내 자신이 문제가 많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지 자꾸 들여다봐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삶이
하느님 중심인가 사람 중심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하느님 중심인가 아니면 자기 중심인가 하는 관점으로
마리아와 마르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리아의 자리에 있을 수 있고
마르타의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자리와 마르타의 자리가 어떻게 다른지
여러분은 어디에서 살고 계신가 보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사람들의 특징은
첫째,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또 설령 남을 변화시킬 기회가 있다 하더라고
그것에 관심을 안 가집니다.
나 자신이 변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전국을 다니며 수많은 신부님들의 강의를 듣고
성령체험을 하고 기도를 하고 그렇게 수십년을 했어도
그렇게 하기 전과 그렇게 하고 난 후의 마음 상태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별로 안 달라집니다.

성질이 더러운 사람은 여전히 성질이 더럽습니다.
보는 눈은 넓어졌지요. 하지만 마음은 잘 안 변합니다.
걸레를 아무리 열심히 빨아도 행주가 되지 않지요.
걸레는 걸레로 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걸레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난 행주가 되고 싶어!
그러면 그때부터 우울증에 빠집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람들은
자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변하지 않는 자신을 하느님이 주셨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삽니다.
주신대로 받고 삽니다.

하지만 자기 중심의 사람들은 늘 뭔가 바꾸려고 하고 없애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요구를 합니다. 변하라고.

두번째, 하느님 중심의 사람들은 비교를 잘 안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잘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를 안하면 질투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의 사람은 끊임없이 비교를 합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더 가진것에 대해서 비교를 하고
또 나보다 못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교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질투도 심하고
또 못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에너지도 강합니다.

세번째, 하느님 중심의 사람들은 행복은
남이 주는게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의 사람들은 행복을 남이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선택을 해서 예수님 옆 자리에 가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타는 예수님께 잔소리를 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해줘야,
당신이 마리아를 내보내 줘야지 내가 행복할텐데,
당신이 그렇게 안 해줘서 내가 지금 불행합니다...

고해 성사 때나 상담할때 이런 말들을 많이 하십니다.
남편 때문에 속상해요. 자식 때문에 속상해요.
물론 속이 상하시죠.
하지만 그 얘기 뒤에는
남편이 나를 행복하게 안 만들어 줬어요.
자식이 나를 행복하게 안 만들어 줬어요.

이 얘기가 있는 거지요.
더 밑에 있는 얘기는 이것입니다.
나는 내 행복을 만들줄 몰라.
남편이, 자식이 이렇게 움직여 줘야지만 내가 행복해.
나는 내 행복도 만들 줄 모르는 바보야.

마르타가 그랬습니다.
아주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그것을 보고는 견디지를 못했지요.

그걸 흔들어서 마리아를 밖으로 끌어내야지만 된다는 분노에 시달렸고
또 마리아만 보고 있는 예수님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당신은 왜 나는 안 쳐다봐 줘.
자기 말만 듣는 마리아는 예쁘고
왜 일 하고 있는 나는 안 예뻐해주는 거야.
이런 생각을 했고
그래서 예수님한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마리아를 내보내야지 뭐하는 짓이냐고.
마르타가 그랬던 건 마르타의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기도생활을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칭찬을 듣는 것에 너무나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마르타를 칭찬했다면
그래-- 네가 정말 수고가 많구나-- 라고 했다면
마르타는 군말없이 돌아갔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하셨지요.

마리아가 너보다 더 좋은 몫을 택했다--
라고 마르타의 속을 뒤집었습니다.

본당에서 일을 할때 여러분들의 마음을 잘 보십시오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칭찬을 하건 말건
나는 이 일을 하느님 위해서 하는 거야--
하고 담담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면 꼭 칭찬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요.
칭찬을 안 해주면 난리가 납니다.

왜 내가 하는 일을 보고 칭찬을 안 해주는 거야-- 이렇게 말을 안하고
왜 너희들은 일을 안해-- 라고 합니다.
마르타의 표현방식이지요.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일을 안해--
이렇게 말하면 속보이니까
당신들은 왜 일을 안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지금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마리아의 자리에 있습니까. 마르타의 자리에 있습니까.

다른 관점에서는 마리아와 마르타를
기도와 활동으로 보기도 하지요.
기도와 활동.
두가지 다 영성 생활에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 더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핵심이고 그 다음이 활동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세운 수녀원이 있지요.
그곳 수녀님들은 아무리 바빠도 꼭 시간을 내서
하루에 한 시간씩은 기도를 합니다.

수녀님들 말씀이
열시간의 활동을 해낼 힘이 바로 한시간의 기도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제가 본당을 지은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자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일을 했지요.
그때는 제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성전건축기금을 모으려면
남자들과 술자리를 늘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자리가 늘다보니 기도시간이 점점 줄었습니다.

에이-- 피곤한데 뭐-- 하고 넘어갔지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활동이 기도야--
술먹는게 기도야-- 하고 합리화를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생기는 마음이
누군가 제가 하는 일을 보고 비난을 하면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겁니다.

나중에 지도신부님께 분석을 받아보니 간단하더군요.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본당에서 활동하면서
일을 통해서 칭찬을 못 받았을때 분노가 일어나면
여러분 마음이 하느님 옆에 가까이 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도 계세요.
난 묵주기도 무지 많이 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그건 묵주기도를 양으로 바쳐서 그렇습니다.
양으로 때우는 식으로.
내가 오늘 묵주기도 100단했다-- 몇십단 했다--
그건 사실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하느님께 내 마음이 가까이 가 있는 상태 그것입니다.
그걸 잘 봐야합니다.
내가 하느님께 얼마나 가까이 가 있는가.
얼마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가.

마리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었고
마르타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행동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도 몸은 성당에 와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있지 않으신지요.

심리치료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지치료이고 다른 하나는 통찰치료입니다.
지지치료란 한마디로 하면 칭찬을 해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성당에 오시고 기도도 열심히 하시고
정말 괜찮은 분들이네요. "

반면에 통찰치료란 현실과 직면시키는 거지요.

"자매님 말을 들어보니 형편없습니다.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자매님한테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통찰치료는 보통 신부들이 잘 안합니다.
냉담자 늘어날까봐.
저나 여러분이 다 걸려있는 문제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라고 그걸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얘기를 안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얘기를 안하고 넘어가게 되면 다른데서 걸리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자매가 저한테 와서 상담을 합니다.

애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요.
일년내내 애 때문에 속상하다고 하고,
이년이 지나도 여전히 애 때문에
속상하다고 말하는 자매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걸 들으면서 제가 끝까지
"아! 애한테 관심이 많으시군요. 참 괜찮은 엄마예요."
이렇게 얘기를 한다면 그 자매가 변하겠습니까?
문제는 애한테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엔 자매님이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자매님 자식이라도 가출할 것 같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얘기를 해줘야 합니다.

참 지겨운 여자라고.
그래야 자기를 고치지요.
그런데 그 얘기를 안하는 겁니다.
상처받을까봐.
사랑에 어긋날까봐.

그런데 내가 상대방에게 갖고 있는 느낌을
말해서 고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딴데가서도 그 짓을 해서 또 욕을 먹을 텐데
그것을 막아주지 않고 내가 피해버리는 겁니다.
그게 죄입니다.

남이 죄짓는걸 막아주지 않는것
사실은 그게 대죄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상처를 주기 싫어서 얘기 안했어요.." 그러죠.
하지만 진심은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할까봐
나를 공격할까봐 그게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해주고 싶은 말이 목까지 올라와있는데도 참습니다.
그리고 뒤에 가서 욕을 합니다.
자기가 저 모양이니까 저러고 산다고.
그게 대죄입니다.

앞에서 얘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을 해주려면
자기 자신이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매일 들여다 봐야지만

나도 그러니까.. 나도 그런데.. 하면서 얘기를 해줄수가 있습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충고'라는 겁니다.
나는 안 그런데 너는 왜 그래.. 이건 충고가 아닙니다.

나도 그런 문제가 있어..
근데 내 문제 해결 방법이 너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하면서
하나의 제안을 하는것
이게 충고입니다.

그 충고를 듣는가 안 듣는가 하는 것은 너의 선택이지 라고 생각하는것,
그게 충고입니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충고를 하면 막 몰아부치거나
아니면 아예 얘기를 안해버리지요.
둘중에 하나를 선택을 하는데 둘다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계속 밖으로만 도는 사람들은
힘이 안 생깁니다.
힘이 없다는 가장 큰 징표는
분노입니다.

내가 마음이 아주 불편해...
그건 힘이 없다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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