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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보기>내가 신앙하는 대상의 영광을 (사도 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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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6-09 ㅣ No.147455

 

 

(공동번역성서) 2021. 6. 9 <성경바로보기>

 

 내가 신앙하는 대상의 영광을 드러내는 게 예수 믿는 거에요.

 

(사도 7.9-10)

9 그런데 이 선조들은 그들의 동생 요셉을 시기한 나머지 에집트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10 모든 어려움에서 그를 건져내셨고 그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셔서 에집트 왕 파라오의 총애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왕은 요셉을 에집트의 총리로 세워 자기의 온 왕가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아멘

 

자 이제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스테파노 설교에서 요셉이 시기를 받아서 애굽에 팔려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저와 함께 계셔서 그 모든 환란에서 그를 건져 내셨고, 또 은혜와 지혜를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요셉이 애굽에 치리자(治理者)가 된 거죠. 그럼 여기에서 여러분이 잘 보면 이 내용 중의 주인공은 요셉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전부 주시고 끌어내시고, 시기를 당하게 하시고, 하신 분은 다 하느님이세요.

그 하느님께서 그를 애굽에 팔게 하셨고, 그거 우리 시편에서 봤죠. 먼저 그를 애굽으로 보내셨다 그러잖아요. 그거 하느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거에요.

인간의 모든 인간들의 그 죄악상을 사용하여 인제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팔려가게 만들었고, 그리고 어 그가 이제 처해 있는 모든 상황을 하느님이 조정을 하실 거에요. 조정을 하셔서 어 그 모든 환란 그가 당하고 있는 환란에서 그를 건져 내시고 또 은혜와 지혜를 주신 다음에 이제 애굽에 치리자가 되게 하신 거죠.

그러니까 애굽 왕이 애굽 왕은 사실은 그냥 왕 노릇만 하는 거지, 왕 노릇만 한 거에요, 노릇만, 그리고 결국 그 모든 치리권은 요셉이 다 갖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요셉이 왕이에요. 실질적인 왕. 그것을 치리를 해서 남은 유익을 왕에게 다 갖다 바쳐서 왕은 그걸 갖고 헬렐레 하면서 그냥 먹고 마시는데 힘을 쏱고 있었고, 요셉은 실질적인 치리자죠.

그렇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요셉도 마찬가지고, 전부 그들에 인생에 주도권은 다 하느님이 쥐고 계시는 거에요.

여러분이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 여러분은 이 땅에서 여러분이 지혜와 뭐 능력과 열심과 노력을 발휘해서 여러분이 하느님이 기뻐하실 만한 대단한 사람들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이 없으면 어떻게 할 뻔 했는가를 오히려 배우는 게 성도에 본무에요.

그래서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를 아는 이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죠?몇 가지 제가 예를 한번 들어드릴게요.

 

(디도서2,14)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바치셔서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건져 내시고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백성으로서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자 어떠세요?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뭐에요?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 여기에서 선한 일, 착한 일, 그러니까 도덕과 윤리에 근거한 착한 일이라고 번역을 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하느님이 하느님과 전혀 관계없는 이들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에 아들을 주셨다는 건 말이 안되죠? 불교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선한 일 많이 하잖아요? 도덕과 윤리적인 그런 관점에서의 선한 일 그렇다면 선한 일이라는 게 뭐겠어요? 다른데 한번 한군데 더 보죠.

 

(요한일서3,8-9) 8 언제나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실 죄는 처음부터 악마의 짓입니다.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키려고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어때요? 하느님으로부터 난 자들은 처음부터 범죄하지 않는데요. 이제 범죄를 할 수가 없다 그러는데 그렇습니까? 여러분 범죄 안 하세요? 그냥 사는 것 자체가 죄에요. 아니에요? 그러면 이런 말들이 도대체 무슨 말이냔 말이에요.

 

(고후6:14-16) 14 믿지 않는 사람들과 짝짓지 마십시오.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이 될 수 있으며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습니까? 15 그리스도가 어떻게 벨리아르와 마음을 합할 수 있으며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무엇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16 하느님의 성전에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멍에를 함께 매면 안 된다 이러고 있어요.

자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로 한번 먼저 가볼까요?

 

(1베드2:11-12) 11 사랑하는 형제들, 낯선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체적인 욕정을 멀리하십시오. 12 그리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던 그들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고 하느님께서 찾아 오시는 그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도 또 선한 일이 나오죠. 여러분 안 되는 일 아니에요? 이거? 무슨 선한 일을 해요, 우리가.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를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런 이게 그런 이야기라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칭찬을 받아야 된다라는 뜻인데 자 칭찬을 많이 받는 게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거에요?. 우리가 칭찬을 많이 받는 건, 우리에게 영광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하느님께 영광이 된 다는 걸 뭘까요?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은 어떻게 저 인간은 저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느님의 능력으로 저를 구원해 내실까, 이게 베드로전서 2장의 이 이야기는 너희들이 선한 일을 해서 나중에 하느님이 너희를 찾아왔을 때 믿지 않는 자들이 야 참 하느님은 참 좋은 훌륭한 좋은 분이셔서 저들을 저렇게 훌륭하게 키워내셨구나, 이런 영광을 받게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쭉 몇 군데를 찾아봤는데 그 내용들이 다 뭐냐 하면, 이 세상의 정욕과 이 마귀의 행사, 그걸 등지고 어떤 선한 일을 하라고 자꾸 권하고 있어요. 성경의 모든 하라의 명령에 대해서 지금 말씀을 드리는 거에요. 하라의 명령, 선한 일이라는 게 뭐냐 하면 우리 속에서 나타나는 선한 그 하느님의 선한 일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마태복음으로 한번 가보세요. 3장 지금 여러분이 성경에서 말하는 수많은 하라의 명령을 저랑 같이 한번 읽어 봤단 말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마음에 지금 부담이 생기고 있죠? 요한일서에서 그거 아니면 니네는 가짜야 라고 까지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선한 일이 뭐겠냐 말이에요. 그걸 한번 찾아보자 말이에요.

 

(마태3,5-12)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제가 왜 굳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 요한, 요셉에 이야기를 그 본문을 갖고 이 이야기를 끌어 들였냐 하면, 그러니 강도새끼들이에요. 만나보니까. 설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자를 강도사라고 하거든요. 이제 찾아와가지고 요한묵시록 강해를 이제 다 들었대요. 백 몇 개를 다 들었으니 열심이 대단한 거죠. 자기들끼리 성경공부를 한 거에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디서 못 벗어나냐 하면 성화에 대해서, 거기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구원을 받으면 우리가 그 그만큼 삶, 우리 안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열심히 착한 일을 하여, 우리를 계속해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이렇게 성숙시켜 가야 된다 라는 데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거에요.

요한묵시록을 너무 은혜롭게 이제 공부를 했는데 자기들이 너무 낙심이 된다는 거에요. 할 수 있을 줄 알고 열심히 자기들은 해 왔는데, 몇 년을 이렇게 공부를 해왔는데, 그런데 요새 와서 자꾸 안 된다 그러니까, 왜 안되냐는 거에요. 그래서 저를 찾아온 거에요. 제가 한번 물어봤어요. 그러면은 되더냐?

그래 수년간 공부를 해서,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진짜 다른 사람, 옆에 있는 사람들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이 인간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본인 자신들에 대한 대답 해보라 그랬어요. 되더냐? 아무 말도 못하죠.

여러분 한번 보세요. 우리 안에 선을 행할 능력이 생겼다라는 건, 악을 제어할 능력이 생겼다는 말과 똑같은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마음속에 드러나는 그 욕정이나 악이나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갖고 있다는 선한, 선을 행하는 능력, 행 할 능력에 의해 제어가 되냐 말이에요? 아 그래도 그 횟수가 많이 줄었는데요. 그런 거 따지지 마세요.

그건 불교인들도 다 하는 성숙이고, 남묘 호랑개교 믿는 사람들도 다 하는 성숙이에요. 철들면 다 줄어들게 되어 있는 거니까, 그런 거 말씀하지 마시고, 내 안에 일어나는 악이 진짜 내 안에 있는 선을 행하는 능력이 있는 게 제어가 되요? 늘 항상? 안되죠?

그러면 선을 행할 능력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 말이에요? 우리 안에 들어있는 선을 행할 능력이라는 게 뭐냐 말이에요? 성경은 분명 100개중에 99개를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너는 다 어긴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게 하느님의 기준이에요. 그러면 뭐가 선이냐 말이에요?

그래 너는 98개 하고 왔으니까, 너는 이만한 상을 받아라. 아 너는 40개 밖에 못했네, 너는 요만한 상을 받아라. 너는 두 개가 뭐니? 이 원수야, 너는 저 개털모자. 이거 이게 천국에서의 상급일까요? 천국에서 그런 상급 없어요 여러분. 그러면 선한 일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 거에요?

 

하느님 나라에 가면. 여러분의 선함이라는 게 어디에 쓰이냐고요? 그 모든 건 공력이 어떻게 되요? 고린도전서 3장에서 불에 타는 거에요. 그거는 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거에요. 야 이거는 도대체가 우리의 최고의 선이라는 것도 프리티 렉이니, 이거 다 불타버릴 것이니,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린 안 되는 구나를 알기 위해 선을 행하는 거에요.

그런 면에서 여러분의 본전, 본 처음 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분이 겪는 여러분의 악함 있죠? 모자람.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를 더욱 더 꼭 붙들게 되는 데에 필요한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는 그런 모자람이나 부족함, 그게 선입니다. 이거를 이해 못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본주의에 빠져서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니까.... 자꾸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줄을 알아요. 착각을 해요.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어야 되고, 믿음을 갖고 있어야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려야 된다는 거에요. 그렇게 배웠잖아요. 우리는 어려서부터 구원의 확신을 내가 가져야 되고, 믿음도 내가 가져야 되고, 그로 말미암아 나는 자유함을 이 땅에서 누리면서 살아야 된대요.

그래서 자유가 뭐냐? 그랬더니 뭐 주일날 교회에 꼭 가도 가지 않아도 뭐 되고, 흐흐 헌금을 대단하게 안 해도 되고, 뭐 이런 걸 그냥 그 속에서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그런 걸 안 해도 자유함을 느끼는, 뭐 마음 편안함을 느끼는, 뭐 이런식으로 얘기를 하더라고요. 뭐 완전히 다 틀린 건 아니지만,

여러분 자유라는 건 내 것을 완전히 모두 다 빼앗긴 상태를 자유라 그래요. 내가 이루고자 하는 희망이 요만큼이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그거에 묶여 있는 거에요. 그걸 구속이라 그래요.

사람들이, 남자들이 왜 군대가면 살이 찌느냐 하면, 거기서는 자기 의견을 요만큼 내놓으면 그냥 영창이에요. 위에 뜻에 반하여 어 내 뜻은 이런데 이게 하극상이거든요. 명령 불복종. 군대에서는 바로 영창이에요. 그러니 나중에 그냥 내가 생각하기 좀 불합리한 거 같아요. 군대에는 일이 없으면요, 사람들이 이렇게 나태해 지고 그러니까,

일이 없어지면 항상 문제를 일으키게 되니까, 산에 전부 데리고 올라가요 훈련기간이 아닌데도, 그 다음에 땅을 파라 그래요. 그러면은 뭔가 목적이 있을 줄 알고 열심히 판다고요. 그런데 오후 되면 밥 먹이고 다시 묻으래요. 여러분 그게 효율성으로 봤을 때,

그게 건강한 20대 남자들 모아다가 할 짓입니까? 그게. 괜히 땅을 왜 파게 하고, 괜히 또 왜 묻으라 그래요? 거기다가 무슨 뭐 군수 뭐 검열 같은 거 나오면 훈련을 평소에 했어야 되는데 잘 안 해요. 지휘관들부터 게으르니까.

그러면 실탄이 왕창 남아요. 그런데 그 위에서 그 검열이 나왔을 때 실탄이 남아있으면 안되요. 훈련 안 한 증거가 되니까. 그러면 전부 끌고 올라가서 산에다 대놓고 막 쏘게 해요. 그리고는 탄피만 수거해서 내려오거든요. 그게 효율성이에요? 경제적입니까? 헛지랄 하는 거에요. . 그런데 명령에 복종해야 되요. 안 그러면 영창가요.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는 이건 아닌 거 같은데 라는 내 주장이 있는데 그걸 펼칠 수 없는 상태, 그때는 이제는 완전히 자유로워져요. 그냥 시키는 거 하기만 하면 되거든요. 짬밥을 먹으면서도, 얼마나 그 이 짬밥은 들어서 후 불면 막 날라 다녀요. 그런데 그걸 먹고도 살이 쪄요. 자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존재....그 존재가 선 ,선의 극치이며 선의 정수에요. 그분이 이끄는 삶은 쫓아가기만 하면 선이요, 그냥 의에요.. 그분에게 내걸 다 맡겨 버리고,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왜 나는 이 상태에서 이렇게 가난해야 되, 왜 나는 이 상태에서 이렇게 못 배워야 되, 왜나는 이렇게 명예가 없지,

이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내 삶을 주장하고 주관하신다 라는 믿음 아래 끌려가는 상태 그걸 자유라 그래요. 내가 갖고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도 뭐라 그랬어요. 아버지의 믿음이라 그랬잖아요. 아빠가 너 믿는다 라는 그 믿음, 그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며 우리를 우리에게서 주관적 믿음을 격발해 내는 거라 그랬죠. 아버지에 대한 주관적 믿음. ‘이 아버지만 쫓아가면 우리는 땡잡은 거구나라는 걸 깨닫는 걸 믿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 되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믿음이 나를 끌고 가는 거 구나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

마찬가지로 구원의 확신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된다 말이에요. 구원의 확신이라는 건 하느님이 행하신 객관적인 어떤 역사, 그거에 대한 지식은 나한테 있어야 되요. 그 앎은 나한테 있어야 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은 게 확실해가 아니라,

나는 늘 이렇게 어떨 때보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 아닌 것처럼 행동 할 때가 더 많다 말이에요. 내가. 그럴 때 나는 흔들려요. ‘나는 흔들리는데 주님이 하신 객관적인 사역이 나를 구원하실 수밖에 없다 라는 그것이 구원에 확신이에요.

나는 아니구나, 그런데 하느님이 행하신 일이 나를 끌고 가야 하는 거구나 가 구원에 확신이어야지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나는 반드시 구원받아야 마땅해. 그런데 니가 뭔데, 라고 물으시면 어떡할 거에요? 니가 뭔데? 만약에 너 착각하고 있는 거면 어떡할 거야? 이 질문을 안 한다니까요 사람들이요.

우리는 매번 그냥 하느님 앞에 납작 엎드려 져서, 하느님 저는 하느님이 오늘 지옥 보내셔도 아무 할 말 없는 존재입니다. 이 상태로 있어야 되요. 그게 구원에 확신이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그 상태로 그냥 낮아져 있는 상태인데 그런데 하느님이 덮는 거에요.

그래서 노아의 방주 사건이 뻘거벗은 노아를 샘이 그냥 뒷걸음질 쳐서 덮는 것으로 끝나는 거에요. 구원이란 바로 이 이야기를 하는 거다라는 뜻이죠.

그래서 무지개 언약이, 너희들은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내가 다시는 홍수로 너희를 멸하지 않고, 내 방법으로 구할 거야. 너희들은 아무리 위협을 가하고 온 세상의 숨쉬는 게 다 죽어도 너희는 여전히 악하잖아, 금방 벌게 벗고 누워 있어요.

언제 포도농사 져서 술을 만들었을까요? 방주에 탈 때 갖고 탄 거 같아요. 인간은 그렇다니까요. 다 죽여버린다 그러는데 술을 챙기는 게 인간들이란 말입니다. 그리고는 아직 시체 썩는 냄새가 가시지도 않았는데 술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있는 존재가 인간인 거에요. 그 상태로 폭로 당하는 거에요. 그걸 예수가 와서 의에 흰 옷으로 덮는 걸 경험하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여기에서, 지금 세례 요한의 이 이야기에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회개를 하기 위하여 물세례를 받도록 오는 사람들한테 아이구 그래도 말 듣고 잘 왔네. 어서 와, 어서 와, 세례 받아, 그래야 옳아요. 이 독사의 새끼들아 누가 너희들 보고 임박할 진노를 피하라 했느냐? 도끼가 니네 뿌리에 이미 놓여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옳아요. 자기가 오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왔는데 왜 욕을 하냐고요.

 

우리 교회랑 똑같죠. 들으러 왔는데 저 인간은 왜 맨날 그렇게 야단만 치고, 막 나가라 그러고 응!. 아니 불렀으면 세례 주면 되잖아요? 뭔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 거에요.

여러분 그 물세례가 뭡니까? 회개의 세례라 그랬어요. 그럼 그 회개의 세례, 물세례 받으면 구원 받아요? 못 받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돌아다니면서 물세례 밖에 모르는 자들에게 성령세례를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시적으로 성령이 내려온 모습들이 몇 차례 그려져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럼 이건 왜 받아요. 도대체? 물세례라는 건 회개의 세례라는 게 게 뭐냐 말이에요? 그리고 세례 요한도 그 뒤에 뭐라 그러냐 하면. 물세례를 주면서 내 뒤에 오실 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거래요. 그리고 자기는 그분에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치 못할 존재래요.

옛날에는 노예 중에 가장 천박한 노예가 신발을 담당하는 노예였어요. 그때는 센달 신고 다녔으니까. 주인이나 손님이 밖에서 돌아오면 얼른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겨 주는 게 그 아주 가장 천한 노예였거든요. 그래서 유대인 노예는 그 일도 안 시켰어요. 어디서 포로로 잡혀 온 그런 아주 천박한 노예만 그 일을 했다고요.

그러니까 나는 그분 앞에서 그런 존재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물을 거 아니에요? 너는 지금 그러면 뭐하고 있는 거야, 나는 지금 왜 이걸 받아야 되는 거야? 여러분이 그 질문을 하셔야 되요.

그런데 예수님은 또 뭐라 그러냐 하면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그러죠. 그러면 물세례는 꼭 필요한 거라 말이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물세례로는 구원 못 받으니까, ‘너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돼라고 이야기한다고요.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된다고 그러고. 그런데 거기에서 지금 그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우리는 구원을 받는데 거듭나는데 이 물세례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지금 설명을 어떻게 해주냐 하면, 세례를 받으러 오는 자들,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 를 인정하는 게 세례를 받으러 그 회개의 세례거든요. 그러니 죄인과 연합된 거에요. 나는 죄인이 맞아요. 그게 그래서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은 거에요. 세례 요한한테. ? 우리 죄인과 연합되기 위해서.

그러니 나는 죄인이 맞아요. 이게 물세례인데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반드시 물세례를 전제하게 되어 있는 거에요. 성령세례라는 건 어느 시점에 우리에게 내리는 게 아니라, 우리 인생의 완료 지점에서 그때 완료되는 게 성령세례에요. 지금은 진행 중이에요. 그죠? 그런데 이게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이미 완료 될 수밖에 없다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이미 영원 속에서는 완료되어 있다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세례를 받았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지만, 지금은 여러분 땅속의 여러분은 죄인이란 말입니다. 지금 상태에서 여러분을 쪼개보면. 지금은 이 역사 속에서 가시적 인생 속에서는 완료가 안 된 거에요. 그런데 영원 속에서 완료가 되어 있기에 우리는 구원 받았다 성령세례 받았다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뭘 하는 거냐 물세례 받는 거에요. 어떻게 홍수가 쏟아져서 이 악에 세상을 점령하여 죽여 버리는 경험을 여러분이 하는 거에요. 그래서 물은 세례니 이렇게 베드로가 이야기하면서 노아의 사건을 끌어다 드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물세례는 보세요.

우리는 바리세인과 율법사의 그 죄인 된 속성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바리세인과 율법사의 죄인 된 속성이 뭐냐 면 유대주의에요, 율법주의. 그러니까 인간의 가능성을 놓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 세례 요한이 뭐라 그러냐 하면, 니들이 왜 세례를 받으러 오냐 그러면서 너희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된다, 그런데 그 열매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 사고부터 버려야 된다 그래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의 용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른 방법이 있다라는 것을 여전히 갖고 있는 자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이미 선민사상을 갖고 있는 거에요. 이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은혜` 예수의 십자가 공로, 그 성령의 세례 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다라는 걸 인정 안 한다 말이에요.

 

그러면 그들이 지금 그 상태에서 물 물세례를 받으러 왔다라는 건 뭐에요. 내 구원, 내 회개, 내 천국 챙기러 오는 거에요. 여러분 그거 굉장히 기특한 거 같죠?

여러분 예수 왜 믿으십니까? 그랬을 때, 천국 가기 위해서요, 회개하기 위해서요, 구원받기 위해서요. 자 그러면 고 대답에 주인공이 누구에요? 나잖아요? 여전히. 내 구원 내 천국 내 회개의 주인공은 나란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건 뭐냐 말이에요? 내가 신앙하는 대상의 영광을 드러내는 게 예수 믿는 거에요. 내 구원 내 회개 내 천국 챙기는 거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바리세인들과 유대인들은요, 굉장히 착한 일을 했고, 굉장히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했고, 율법 지킴을 수행했던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전부 그 기특한 행위의 주인공이 누구였냐면 였어요. . 너희들은 그거부터 잘라내야 된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물세례는 뭐냐 하면은 바로 고 사상을 잘라내는 거에요.

그래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라는 건, 물세례 인생을 통하여 받아야 하는 물세례가 뭐냐면, 내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도끼에 의해.... 내 그 옛 자아가 찢기는 거에요. 그걸 물세례라 그래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지금 바리세인들과 율법사들에게 저주에 욕을 해보고 해버리면서 니네는 안 돼가 아니라, ‘얘들아 세례라는 게 바로 이런 거란다라고 설명해 주는 거에요.

 

그러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에 후손이라는 그 사고를 버려라 라고 하는 건 너희들이 그 어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아무리 착한 일을 수만 개를 내 놓는다 할지라도 너희들은 너희에 구원을 챙길 수 없다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거에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가 착한 일을 많이 해라 라는 건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에게 그 말 하면 안 되요. 그들이 가장 열심히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거든요. 그 때 당시 사람들 중에.

그런데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건, 돌아서서 착한 일을 많이 해라, 악한 일 많이 하던 자들아 착한 일 많이 해라 가 아니라, 하느님이 ...하느님의 그 은혜의 전적인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꼭 붙들게 되는 상태가 회개인 거에요. 돌아서는 거. 이거를 이해 못하는 거에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그래서 제가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다 이단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리스도교 자체가 이단이에요. 천주교든 개신교든 전부 그냥 뭔가를 하겠다고 들 나서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뿌리에 이미 도끼가 놓여있다라는 건 나의 옛 사람, 옛 자아, 그리고 옛 자아에서 출발하는 게 뭐에요? 나의 과거 ...옛 자아에서 출발하여 나의 미래에 내가 되고자 하는 어떤 희망의 지점을 희망이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바람의 지적.

그러니까 물 세례라는 건 여러분의 옛 자아와 거기서 격발되는 희망이 하느님의 도끼에 의해 찍히는 거에요.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옛 자아와 희망이 도끼에 찍히는 인생이 되야 되요. 그런데 그 희망을 성취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나는 이런 존재가 될 거야, 이런 착한 사람이 될 거야, 이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 될 거야, 이것도 희망입니다. 그게 도끼에게 찍히는 거에요.

그리고 그러한 찍힘을 당할 때 인간들이 가장 고통스러울 때가 그 때에요. 나의 자존감, 자존심, 이게 하느님의 도끼에 찍힐 때 너는 이런 인간 밖에 안 되니 라는 게 내 자신에게 폭로될 때 적어도 성도는 가장 고통스러워요. 그걸 고난이라고 하는 거에요. 사업이 망하고 병이 걸리고 그게 무슨 고난입니까?

소크라테스는, 예수를 안 믿었지만 누명을 쓰고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요, 독을 마셨는데 그 독을 마신 상태에서 야 내가 옛날에 그 누구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는데 제자들아 닭 좀 갚아주라.’ 멋있지 않아요? 그리고는 독이 빨리 퍼지라고 걸어 다녔습니다. 빨리 죽겠다고.

여러분 인간의 자기 영광 자기 가치 챙기기의 모습은 그렇게 참 집요하고 교활해요. 엄청납니다. 인간은 자기 영광과 자기 가치를 챙기기 위해 순교도 불사해요. 그래서 저는 모든 순교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순교 같은 것도 별로, 살아있는게 더 힘들어요. 아니 총살당하고 뭐 단두대에서 모가지 잘리고 하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게 힘들게 있어요. 여러분 진짜 힘든 건 그게 아니라니까요.

요한묵시록에 딴 건 다 이해가 가는데, 아니 7년 대 환란에 대한 부분, 문자적인 해석을 자기들이 해야 되는데 말이죠. 너무 영적으로 해석하는 거 아닙니까? 더 들어봐라 열심히, 다니엘서 9장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70 이래(주간)가 뭔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요한묵시록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삼년반)로 쓰인 건지, 연구 좀 공부 좀 해 제발.

성경 몇 시간씩 읽냐 하루에? 제가 그랬어요. 성경 몇 시간 읽어? 니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를 해야지.

 

여러분 고통이라는 게 뭐에요? 저는요, 예전에 안기부 같은데 끌려가갔고, 커다란 김장독 항아리에 뱀들을 풀어놓고요, 물론 독사는 아니지만, 빨가벗겨서 거기다가 넣어 놓고 뚜껑 덮어도 비명 한번 안 질렀어요. 그거 무슨 고통이에요?

아니 옛날에 초대교회 교인들이 무슨 사자 굴에 들어가고, 뭐 또 뭐 뱀 굴에 들어가 갔고 막 물려서 죽으면서, 야 저렇게 고통을 당했는데 그런 고통이 또다시 7년 대 환난 중에 올지도 몰라. 뭐 이런 식으로 세대주의자들이 해석을 하는데, 저는 그때도요, 온몸이 새카맣게 아무데나 찔러도 다 멍이었을 만큼 뚜들겨 맞았어도 비명 한마디 안 질렀어요. 참을 수 있었어요. 명분을 위해서.

그런데 성경을 통하여 제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가 폭로될 때는 통곡을 하면서 굴러다닙니다. 뭐가 고통이고, 뭐가 진짜 고난이에요? 인간들이 고작 그런 육체적 고난을 고난이라고 생각한다 말이에요. 그러니 영적 전쟁이 뭔지를 아직도 모르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기 위해서는요, 순교도 불사해요.

제가 그때 안 무서웠을까요? 여러분 저는 벌레 곤충 이런 거 제일 싫어해요. 개구리 이런 거, 미끈미끈한 거. 그런데 미끄덩하고 밟히는 게 전부 뱀이에요. 그리고 뚜껑을 위에서 닫고 거기 깔고 앉아 있으면요, 그 뱀과 거기에서 몇 시간을 있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독은 없지만 물어요. 그게 안 아파요. 공포로 다가와요. 그렇지만 내 영광과 내 평판, 내 명성을 챙기기 위해선 그게 참아 지더라니까요.

어떻게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몽둥이를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발바닥까지 때리는데 안 아프겠어요? 그런데 이를 딱 악무니까 비명이 안 나와요. 안 아파서가 아니에요. 그러나 영혼의 고통은 견딜 수가 없는 거에요. 그걸 성도가 이 이 시간 속에서 겪어야 되요. 그게 7년 대 환란이에요.

성경에 어디 7년이란 말이 나와요?. 지들이 만든 거지. 성경에 7년 대환난이라는 말이 나와요? 없어요. 그런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그냥 생각하는 어떤 시나리오에 성경을 짜서 자꾸 그렇게 맞춰가요.

 

여러분은 이 세 상속에서 바로 그 고통, 그게 도끼로 뿌리를 찍히는 고통인 거에요, 그게 물세례인 거에요,

그게 홍수에 의해 빠져 죽는 내 기식(氣息,호흡의 기운)하는 옛 자아가 빠져 죽고 내가 예수 안에서 내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물위로 둥둥 뜨는 거에요. 그걸 경험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빠져 죽어야 할 존재 구나를 절실히 깨닫는 걸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 그래요.

그리고 우리가 앞에 찾아 읽었던 모든 선한 일, 정의로 제어하다 이게 다 뭐냐고요? 나의 옛 사람의 희망 아닙니까? 그것 제어되어야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하겠다는 거에요?

베드로서에서도 선한 일에 힘쓰도록 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선한 일에 힘쓰도록 하여 하느님 다시 오실 때에 하느님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그 위에 뭐라고 하냐 하면 신령한 젖, 하느님의 말씀을 사모하라그래요.

그러면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뭐에요? 말씀은 우리를 항상 폭격하게 되어 있는 거거든요. 나와 나의 일상을 폭격한 거에요. 나의 희망을 폭격하는 거에요. 말씀은요. 그 말씀이 폭격 당하고, 그 말씀에게 폭격 당하게 되면 우리는 그냥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로 폭로 당해요.

그런데 그 자체가 선한 일이란 말이에요. 내가 무장해제당하는 그일 자체가. 그런데 하느님은 그 좌표를 타고 내려와요. 그 미련하고 연약한 좌표를.

밤에 예수님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신랑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비효율적으로 비경제적으로 미련하게 등불을 계속 키고 있는 여자들, 그 여자들은 세상들이 세상이 바라봤을 때 저런 비효율적인 비경제적인 어리석은 인간이 있나 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니까 그 밤 어두움인 상태에서 그 미련한 불빛을 들고 있는 그 다섯 처녀와 120년 동안 그 미련한 등불을 들고 있던 노아, 그 미친놈이 산 위에다가 왜 배를 짓고 지랄이야, 그런데 하느님이 그 정확한 좌표를 보고 하늘에서 그 좌표를 타고 내려오는 거에요.

그들이 바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명성 평판 인기 희망을 도끼로 찍힌 거에요. 세상 사람들에게 그 그들에 관점에 의해서. 런데 하느님이 그 미련한 좌표를 위에서 보고 정확하게 거기에 이륙하신단 말입니다. 그때에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겠어요. 저 약함이 강함이었구나.

하느님을 저 약함 속에 자기의 강함을 채우기 위해 세상에서 그들을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만들었구나 가 이방인들이 그들의 선한 일을 보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간디는 지금 하느님께 무지하게 큰 영광을 돌리고 간 거네요. 착하게 살다 갔으니까. 맞아요? 슈바이처는 하느님께 큰 영광 돌리고 간 거 맞아요?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잖아요? 세상이 여러분을 칭찬하게 되면 그 영광을 여러분이 가지는 거에요. 여러분은 세상이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덮으신 하느님이 칭찬을 받는 삶을 살아야 된다 말이에요.

미련하고 악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세상에게 절대 칭찬 못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는 그 하느님의 은혜, 그것이 나중에 종말의 때에 들어난다 말이에요. 그걸 바라보면서 오늘을 잘 그냥 이기고 살면 되요.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하느님의 은혜만 잘 배우세요.

 

거기에 무슨 은 이빨이 금 이빨로 바뀌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금가루가 요즘 떨어진다면서요, 그것도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가지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더라고요. 그것 좀 모아 갖고 오세요. 건축헌금 좀 하세요. 교회다가. 그거 다 어디 갔어요? 요즘 막 떨어진다면서요.

금가루가 아니라 다이아몬드가 바가지로 쏟아진다고 해도 그게 여러분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신비한 현상이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여러분은 믿음이 아닌 가짜 믿음, 인식이라는 걸로 돌아가게 되는 거에요. 나는 일어난 현실만 보고 믿을 거야 라는. 그런 거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살아있으면 되요. 그런데 여러분은 반드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어 가게 되어 있어요. 그걸 진짜 성화라고 하는 거에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거기까지를 못 보는 것입니다. 하여튼 최선을 다해서 사세요. 성실하게 사세요. 그 속에서 여러분의 연약함과 무력함이 폭로 되야 되요.

그러니까 성도는 실패하기 위해 열심히 사는 거에요. 그런데 밖에서 보면 내 안에 있는 예수가 성공하는 모습을 내 성공으로 보기 때문에 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니까 진짜 변하는구나, 이렇게 평가는 하는 거지만, 결국 나는 계속 내 자신의 실패를 바라보는 거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성공하시는 하느님이 드러나는 거에요.

모세는 사람 죽이고 도망갔지만 하느님은 그의 일기를 지우개로 벅벅 지우시고,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에 모든 재화보다 보화보다 낫게 여겼다 라고 각색을 해서 우리 일기를 써가시는 거에요. 하느님이.

사라는 하느님이 이사악을 약속했을 때 그땐 뒤에서 비웃었지만, 사라는 믿음으로 라고 우리 하느님이 일기를 다시 써주는 거에요. 그걸 덮어줌 이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리는 거에요. 몇 명이나 천국 갈지 모르겠다. 열심히 종교행위하고, 열심히 착한 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있는데..... 예수의 은혜를 아는 이들은 참 없다. 그거 아주 그냥 사람을 많이 만나보면 만나볼수록, 그거는 더 선명하게 들어나요.

이 인간들의 자기 가치 챙기기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하느님 나라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하느님을 높여야 돼요. 그들의 영광을 들어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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