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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사도 축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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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7-03 ㅣ No.148038

 

2021년 7월 3일 토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요한20,24-29)

   

 

1독서<여러분은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입니다.>(에페2,19-22)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화답송 시편 117(116),1.2ㄱㄴ(◎ 마르 16,15 참조)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주님을 찬양하여라모든 민족들아주님을 찬미하여라모든 겨레들아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복음<저의 주님저의 하느님!>(요한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에페2,19~22)

 

"형제 여러분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이방인도 아닙니다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19~20)

 

'형제 여러분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이방인도 아닙니다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19)

에페소서의 주제는 교회의 일치의 당위성이다에페소서 2장 19~22절은 교회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된 절대 유일한 하나의 구원 공동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구원받기 이전의 이방인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였으나(에페2,11~12),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수평적 평화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에페2,13~15), 구원받은 성도들 모두가 하느님과 수직적 평화를 이루었다는(에페2,16~18사실에 근거를 두고 에페소서 2장 19절 이하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11~18절에서 갓 교회에 속하게 된 이방인 출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 공동체인 교회가 어떻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자기들 이방인들까지 포함시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제 에페소서 2장 19~22절 단락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을 대상으로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하여 형성된 단일 공동체라는 중요한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우케티'(uketi)는 '더 이상~이 아니다'(no more)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강조 부정어이다. '크세노이'(ksenoi)와 '파로이코이'(pharoikoi)는 '외국인혹은 '이방인' (나그네)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강조 부정어와 더불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를 반복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느님께 나아감을 얻는 특권을 받았으므로이제부터 이방 성도들 역시 더 이상 천국의 시민권과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절에서 영어의 'not ~ but'의 용법과 동일하게 앞선 부분의 부정을 통하여 뒷부분의 내용을 더욱 강조하는 '우케티알라'(uketi ~alla) 용법을 사용하여 이방 성도들이 '외국인'과 '이방인'이 아니며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고 '하느님의 한 가족'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갖는 신분의 변화는

첫째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성도'에 해당하는 '하기온'(haghion)은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사용되던 구약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다(다니7,18).

 

사도 바오로도 본문에서 성도를 구약적 개념으로서 사용하였다즉 유다인을 지칭하는 것이다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다인들과 동일하게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적지리적으로는 비록 외국인이지만한 성령 안에서 완전히 성도와 동일한 시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된다.

 

둘째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은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여기서 '가족'에 해당하는 '오이케이오이'(oikeioi)의 원형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족', '식구', '권속'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한 가족'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자신들이 하느님으로부터 간택받은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임을 자랑하며 유다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혈통을 뛰어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말이 적용되게 된 것이다그리고 '하느님의 한 가족'은 하느님을 가장으로 모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더 이상 이방인과 유다인의 구별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0)

 

에페소서 2장 20~22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다단순히 건물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이다.

이 성전 건물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위에 세워졌고그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에페2,20~21), 건물의 재료는 그로 말미암아 새로 난(거듭 난성도들이다(에페2,22; 1코린3,9).

여기서 '사도들'과 병행하여 쓰인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를 창설한 후에 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초대 교회시대에만 있었던 신약 교회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1코린12,10.28.29; 에페4,11).

 

한편,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란 표현은 다음의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코린토 1서 3장 11절에서는 성전 건물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바로 그 전절인 코린토 1서 3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 자신이 그 기초를 놓았다고 말하였다따라서 본문의 기초 역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라고 보고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놓여 있으며이러한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복음 전파에 의하여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가 된다.

 

둘째로본문의 '기초'를 건물의 '기초'라고 보지 않고, '시작'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이것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지어진 새 성전에 놓인 최초의 돌로서그 위에 계속해서 다른 성도들이 돌이 되어 세워질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기초'로 번역된 '테멜리오'(themelio)가 '기초', '토대', '뿐만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견해 모두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의 복음을 깨달은 자들이다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닦았고또한 친히 교회 구성원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모퉁잇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우'(akrogoniaiu)의 원형 '아크로고니아이오스'(akrogoniaios)는 ''(마태24,31), '머리'(히브11,21)를 의미하는 '아크론'(akron)과 '모퉁이'(마태21,42), '구석'(사도26,26)을 의미하는 '고니아'(gonia)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모퉁잇돌'(the chief corner stone), '구석머리'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서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들을 말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건물을 세우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바로 이 모퉁잇돌에 새겨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였다본문은 이사야 28장 16절의 말씀의 성취라고 볼 때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기초이실 뿐 아니라 교회가 그분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모퉁잇돌이시다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친히 자신이 직접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보라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품질이 입증된 돌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이사28,16)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 토마스 이름 앞에는 쌍둥이라는 수식어가 꼭 붙는다. 쌍둥이- 두 민족(창세기25,24) 두 마음의 모습을 보라는 것이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 동료들의 말을 왜 믿지 못했을까? 샘이 나서? 제자로써 자신만 못 뵈었다는 속상함 때문에?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믿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예전에 불교에서 개종한 어느 형제(자매)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지시고 죽으셔서 용서를 주신다. 하시는데 그것 왜 안믿어?’ 하면서 불교에서는 그 죄를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데 그 것이 안되거든’~~

그때 그 형제(자매)보다 성당을 더 열심히 다니면서도 그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지 못했던 나는 솔직히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분명 틀리 소린 아닌데 하면서~~

복음 말씀을 선악의 도덕과 윤리 그 두 법, 두 마음으로 보아~, 성사, 전례 등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면서도 죄에서의 자유가 없어 고민하고 힘들어 하던 때에 그 같은 예수님의 용서의 말을 들으니 한 대 얻어맞는 충격으로 다가 왔었습니다. 정말 부활하신 주님(말씀)을 만났다면 죄의식,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히브10,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여전히 숨어있는 그 제자들을 보며 미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주님의 말씀을 도덕과 윤리로 알려준다면 법으로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진리로 못 만난 자입니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도 따르고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그 두마음의 신앙을 살았기에 십자가의 대속이 주는 용서, , 안식. 그 예수님의 평화를 몰라 두려워 숨어있는 그 제자들에게 계속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 자신이 동료 제자들에게 한 말을 예수님이 똑같이 하시네요, 토마스 얼마나 놀랬을까?

이 부분에서 잠시 생각해 보자구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잠깐 나타나셨다가 어디 딴데 가셨다가 다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와 늘 동행하셨기에 다 아시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13,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죽으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 그 사랑은 완료, 완성까지의 사랑이신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심이~ 토마스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지 않고도 고백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스승)이 정말 부활하셨군요?가 아닌, 큐리오스-나의 주인, 믿음의 주님으로~~

 

(히브12,2)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자신들의 뜻, 욕망을 채워 줄 능력의 예수님(스승)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 영과 육 그 두마음의 주인이신 주님, 성자 하느님이심의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베드로 처럼이요~~

 

(마태16,16-17)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 베드로의 살과 피, 그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이지요.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토마스의 의심은 믿고 싶고, 알고 싶은 제자로서의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그 열정은 믿음의 눈으로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이끌어 준다는 것입니다.

반 컵의 물을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조금 남아 있음으로 보이는 것이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아직 반이나 남있네? 할 수 있듯이 토마스는 주님의 눈으로 주님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믿는 이가 복이다.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이미지 자세히보기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복음(요한20,24-29)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 (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와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각 단어들 앞에 각각 ''(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육체의 부활이며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요한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apistos; faithless)와 '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가 서로 대조 되었고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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