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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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인집에 없는 세례명을 받을려구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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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58.141.79.*]

2007-01-13 ㅣ No.4779

개신교에서 회심한 예비신자구요 곧 세레받게 되는데 세례명에 대해여 여쭤보고자 합니다
성인집에 있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많이 들 정하시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성인집에 없는 이름을

세례명으로 쓰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성인집에 없어도 가톨릭의 발전이나 크게 공헌 하신분의 이름을 사용해도 괜챦다고

들었는데요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한 저로서는 음악의 수호성인분이 많이 없으시길레 ㅠㅠ,....

세실리아도 있는데 순교한 성녀로서 남자인 제가 쓰기엔 좀 그렇고 ㅠㅠ

 

검색해보니 로마노나 필레몬도 있지만 필레몬의 경우에는 다른 동일인물들이 있어서

좀 그렇고 그래서 수많은 미사 성가곡을 작곡한 '팔레스트리나' 이분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갖고 싶은데 괜챦을런지요?

 

여기저기 검색하다가 그나마 자세히 그분의 생애에 나온게 이게 전부입니다만

이정도면 세례명으로 이분의 '팔레스트리나' 라는 이름을 쓰기에 적당할런지요?

특히 성직자도 아닌 음악가로서 성베드로 성당에 시신이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분도 주보성인으로 모시기엔 부족함이 없을것 같다는 판단이 서는데요

 

별다른 공헌도 훌류한 신앙의 소유자라는 근거도 없는 동방박사 세분도 성인집에

등록이 되어있는데 이분이 없다는게 조금은 이상하네요

 

 

 

지오반니 피에르 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


 르네상스 후기를 결산하는 최대의 작곡가로 이른바 로마악파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현존하는 약 850여곡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종교음악으로 이 분야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 특히 그가 남긴 뛰어난 걸작 미사곡 들은 후세 작곡가들의 미사곡 작곡의 규범이 되고 있다.

그는 로마 동남쪽 근교인 팔레스트리나란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지오반니 피레르 루이지이지만 성은 마을 이름 팔레스트리나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고향인 산타 가피타 대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을 지냈고, 그의 후원자인 팔레스트리나 주교를 따라 1537년 로마에 진출. 그 유명한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이 되었다. 팔레스트리나는 이 교회의 2인의 악장으로부터 작곡을 배운 후 고향으로 귀향하여 1544년 팔레스트리나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1547년 루크레지아 고리와 결혼하였다. 1550년 우연히도 팔레스트리나 주교이자 추기경이었던 죠반니 텔 몬테가 교황 율리우스 3세로 선임되자 1554년 미사곡집 제 1권을 출판하여 율리유스 3세에게 헌정하였다. 율리우스 3세 교황의 추천에 의하여 1555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무시험으로 교회 음악가의 최고 영예인 정 베드로 대성당에 부속된 소년 성가대의(Cappella Giulia) 악장이 되었다. 이때 브뤼멜, 조스캥 데 프레, 라뤼의 음악을 연주를 통해 배웠다. 불행하게도 율리우스 3세는 몇 주 후 사망하였고, 후계자인 바오로 4세 기혼이자 세속음악 작곡가를 시스틴 예배당의 가수로 적합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를 해고하여 팔레스트리나의 급성장도 끝나고 말았다. 그 뒤 그는 라테란 교회 부속 예배당의 지휘자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1560년까지 체제 했다. 1561년부터 10년간 산타 마죠레 성당의 악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571년 다시 팔레스트리나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부속 소년 성가대의 악장이 되어 1594년 사망할 때까지 20년간 그 지위에 머물렀다. 1572년부터 1580년 사이에 2아이를 전염병으로 잃고 마지막에는 그의 아내 루크레지아 마저 잃게 되어 낙심하여 작곡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육친을 잃은 비운을 맞은 팔레스트리나는 한대 성직자가 될 결심을 하였지만, 그 후 부유한 모피상의 미망인과 재혼하였다. 이 결혼에 의해 팔레스트리나는 교황청어용 모피상의 소유자가 되고, 또 곡집을 출판하는 재원을 획득하였다. 창작력도 다시 회복하여 1581년이래 다수의 작품을 간행하였다. 만년에 팔레스트리나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바티칸은 그에게 “바티칸의 악장”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기도 했다. 기이하게도 라수스와 같은 해 1594년 68세로 위대한 생애를 마친 팔레스트리나는 성직자가 아닌 일반 음악가로서 극히 드물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베드로 묘역 옆에 안장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장례에는 로마의 전성가대가 참가하였으며 대표적인 작곡가들이 1곡식 조가를 봉헌했다고 한다. 이곳에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음악의 왕”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먼저 1563년에 4성의 모테트집, 푸가에 의한 미사, 그리고 그의 유명한 일화를 낳은[교황 마르첼루스의 미사]를 포함한 미사곡 제 1권(1569), 샹송미사[무장한 사람], 미사 우트 레미파솔라를 포함한 미사곡집 제 3권(1570)등이 있다. 팔레스트리나는 음악기법에 있어 새로운 기법을 추구 개발한 사람은 아니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ahms 음악적 기법을 종합하여 훌륭한 교회음악을 작곡했다.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은 정선율을 테노르에 두고 엄격하게 다성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서 후세에 와서도 대위법 공부의 기초가 되고 있다.

현존하는 약 850여 곡의 작품들은 거의가 종교음악이며 특히 105곡의 미사곡 가운데[교황마르첼루스 미사]와[성모승천 미사]가 유명하며 외에도 200곡에 가까운 모테트, 봉헌문, 찬가, 마니피카트,[스타바트 마터], 그밖의 시편가, 마드리갈 등이 있다. 패로디 미사(Parody mass)즐겨 작곡하였는데 (그의 미사곡 거의 반수인 52곡) 자신의 모테트 작품이나 다른 사람의 모테트를 자신의 미사곡의 키리에 등에 사용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은 무반주 합창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4-5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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