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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기간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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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4-18 ㅣ No.111529

 

애도 기간

 

- 윤경재 요셉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1~18)

 

 

 

 

인간은 자기 마음을 다 쏟았던 대상을 상실했을 때 온 세상과 자신을 잃어버린 듯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대상이 사랑하던 사람일 경우에는 그 충격이 좀 더 강하고 오래갑니다. 인간의 마음이 세상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감과 슬픔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막달레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교분이 깊었습니다. 병들어 죽었던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를 예수께서 무덤 속에서 소생시켜주셨으며 마리아도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마리아이니 예수께서 골고타 언덕에서 잔혹한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나 무덤에 장사지낼 때 줄곧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에 나가본 마리아는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치워졌고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그녀는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그냥 돌아가기엔 그 슬픔의 강도가 너무나 강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의 책 애도와 우울증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였을 때 흐느끼는 울음은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합니다. 지금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동안 슬퍼하면서 차근차근 정리단계를 거칠 것입니다.

 

슬픔을 겪는 사람은 흐르는 눈물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게 되고 맑아진 눈으로 그 대상을 재인식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 순서는 먼저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숨김없이 정서적으로 반응하고, 회상을 통해 재통합하며, 오래된 애착관계를 끊어 나갑니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재조정하며, 다시 일상 속에 들어가 삶의 에너지를 재투입하게 됩니다. 이렇게 애도의 단계는 6단계나 되는 감정적 변화를 거쳐야 하므로 이 기간은 상당히 오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너무나 조급합니다. 긴 이별 과정도 진중히 기다려 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합니다. 슬픔을 빨리 극복해야 쿨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경우가 많습니다. 자칫하다보면 이별을 부정하는 방어기제가 되고 맙니다.

 

이제 그는 이별을 자기 삶 안에서 배제시켰기에 이별이 올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 새로운 만남 자체를 기피하는 것입니다. 이별 단계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모든 대상과 피상적으로 접촉하게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혼술, 혼밥족, 비혼, 돌싱 등 세태가 경제적으로 힘든 이유도 있겠지만, 쉽고 편한 삶과 이별을 힘들어 하기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반동형성을 나타내어 어떤 대상에 중독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별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면 스토커 행태를 보이거나 의부증, 의처증,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등을 나타냅니다. 모든 중독증, 술과 담배, 도박, 섹스 중독 등은 정상적인 이별 체험이 결여되어 나타난다고 합니다. 건강한 이별 체험이 있어야 새로운 대상으로 사랑이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됩니다. 이별이 힘들어 한 대상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며 다른 대상에 대한 기쁨을 느끼는 것을 죄악시하게 됩니다.

 

슬픔이 정상적인 애도 방법이라면 우울은 심리적 질병에 빠지는 비정상적인 애도입니다. 우울증 역시 상실로 비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든 꿈, 건강, 이상 등 추상적인 대상을 잃었든 간에 낙심, 깊은 슬픔, 마음의 고통, 외부에 대한 관심의 중단 같은 증상이 동반되는 우울증은 애도와 흡사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우울증은 자아가 빈곤해 진다는 것입니다. 정상적 애도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공허해지고 빈곤해지는데 반해 우울증은 자애심과 자존감이 급격하게 몰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난하게 되고 욕설을 퍼붓고, 열등감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을 처벌하기를 원하게 되어 외톨이 되기, 불면이나 과수면, 식이장애를 수반합니다. 심하면 자살 충동에 빠집니다.

 

프로이트는 이 충동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생명에 귀속시키려는 본능적 욕구마저도 억누르려는 병적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다시 빈 무덤에 눈길을 돌립니다. 이 놀라운 상황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정리하고 싶은 심정을 나타냅니다. 그녀에게 상실감이 이중으로 다가왔습니다. 죽은 자와 육체적 결별뿐만이 아니라 심리적 붕괴까지 찾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정상적 애도를 수행하고 다음 단계로 나가는데 걸림돌이 되기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그녀는 천사에게까지 매달립니다. 유대인들에게 신적 존재와 대화한다는 건 죽음을 각오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잘못되는 걸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정상적 애도를 통하여 둘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길 바라셨습니다.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이 새로운 의미부여를 통한 재인식 과정을 수행하시길 바라셨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16,16)

 

마리아는 뒤를 돌아서 예수님을 뵈었으나 그분이 예수님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정원지기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평소에 듣던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알아보며 라뿌니!”하며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20,17)

 

예수께서는 건강하고 진정한 이별을 준비시키십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과 다음 세대를 위한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부재처럼 보이는 위기를 수도 없이 맞닥뜨릴 것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고통 받고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나, 제 욕심만 챙기며 호의호식하는 악인들이 도처에 활약하는 세태를 보면서 우리는 욥처럼 하느님께 항의하는 자가 되어버립니다.

 

아니, 이제는 누구 하나 욥처럼 하느님께 항의하려 들지 않는 세태로 바뀌었습니다. 상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의는 무너지고, 사회적 신뢰감이 사라졌으며 개인의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졌습니다. 젊은 세대일수록 더 심각합니다.

 

예수께서 빈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마리아를 찾아오신 것처럼, 교회도 이런 상실의 세대에게 찾아가 답을 내 놓아야 합니다. 우선 충분한 애도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듣기 싫은 쓴 소리를 자신 있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마음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주고, 그 대신 고난의 시간을 함께 나눌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소식을 전하라는 부탁을 듣고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이것이 진정 부활하신 주님의 뜻을 사는 길일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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