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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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위선자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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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estherlove] 쪽지 캡슐

2010-06-16 ㅣ No.56614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11주간 수요일 - 위선자의 영혼

 


 

프랑스 작가 알퐁소 도데는 그의 책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책에서 신앙인의 위선이란 어떤 것인지 정곡을 짚어 보여줍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으로 다른 수도원처럼 종을 살 돈이 없어 나무로 된 딱따기를 사용하여 기도시간을 알릴 정도였습니다. 보통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데 이 수도원은 가난한데다 마지막 남은 재정까지 바닥나서 이젠 끼니를 잇기도 힘들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에 젖소를 돌보는 일을 맡았던 고셰 신부는 불로장생주를 만들어 재정난을 해결하자고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술들이 대부분 수도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가만하면 이런 일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주조기술을 육 개월 동안의 노력으로 되살려내고 불로장생주를 만드는데 성공합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그 술은 불티나게 팔렸고 수도원은 재정의 회복을 넘어서서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고셰 수사는 그 덕으로 사제 서품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술맛을 보느라 어느새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비틀거리며 흥청거리는 수사를 본 신부들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그를 내쫓았습니다. 어느 날 고셰 수사가 미사 중에 또 술주정을 하게 되었고 정말로 귀신들렸다고 여겨져서 감금되게 되었고 그날부터는 혼자 기도하며 술을 빚게 되었습니다.

고셰 수사가 이제는 자신의 영혼까지 걱정되어 수도원장에게 다시 예전처럼 젖소를 돌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원장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니 걱정할 것 없다. 술을 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니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를 빚으라. 주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그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순진한 고셰 수사는 원장의 말에 순종하여 계속 술을 빚었고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신부나 수도사들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 그것을 운반하느라 마사까지 거르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녁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는 고셰의 영혼을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권고합니다. 그 때 술을 빚고 있는 고셰 수사의 슬픈 노래와 고함소리가 낡은 건물 저편에서 들려옵니다. 이때 신부들은 염려하며 말합니다.

“이를 어쩌나! 교구의 신자들이 저 소리를 들으면 큰일인데...”

 

수도원 전체를 한 사람으로 생각해 보세요. 겉은 멀쩡해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영혼인, 고셰 수사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렇게 겉과 속의 분열을 이루어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셰 수사가 다시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진실 되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고쳐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은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행동으로 거짓이 없는 사람의 영혼은 살게 되고 위선자의 영혼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위선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선행을 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면서부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부터 저절로 위선적이 되고 그렇게 영혼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칭찬받으려고 하고 내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하면서부터, 즉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면서부터 위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선행은 숨기고 자신의 단점은 드러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심판하게 될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도 하느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위선자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시들게 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집시다.

 

<<짧은 묵상>>

논문을 쓰다보면 가장 힘들 때가 교수님과 생각이 맞지 않을 때입니다. 아무리 나의 확신이 옳다고 생각해도 지도교수와 의견이 다르면 괜히 더 나쁜 감정 생기지 않도록 내 의견을 잠시 접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의 신학을 가장 잘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까지 온전히는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누가 거짓말이라도 다 이해해주는 것처럼 말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주위에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이해받을 수는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가족도 친구도 나를 어느 정도까지만 이해해 줄 수 있지 완전히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 마음을 몰라준다고 섭섭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자녀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판 받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물론 나를 이해해 줄 유일한 사람이라 믿었던 이에게 비판 받으면 살아갈 힘마저 잃게 됩니다.

등록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선생님에게 심하게 모욕을 당한 한 아이가 연쇄 살인범이 되기도 하였고, 또 미국으로 이민 온 한 아이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총기를 난사 하였습니다. 이해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큰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관계 맺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받지 못하면 사람의 행동도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행히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까지 다 아시고 이해해 주시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며, 기도를 하던, 자선을 하던, 단식을 하던 오로지 ‘숨은 비밀까지도 다 아시는 아버지께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이해받고 싶어 하면서 서서히 유일하게 우리를 이해해 주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며 세상에 무인도처럼 동떨어져 혼자 남게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단 둘이 나누는 대화 시간, 즉 기도시간은 꼭 가져야합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주님과 대화를 나눕시다. 그러면 세상 누구에게서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던 예수님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나가셨던 그 분처럼,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 기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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