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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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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9주일 2010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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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0-08-06 ㅣ No.57828

연중 제19주일      2010년 8월 8일.


루가 12, 32-48.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가르치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지극히 높고 엄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율법을 주고, 그것을 철저히 지킬 것을 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멀리서 우리의 율법 준수를 지켜보고 계시며, 장차 우리를 심판하실 두려운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인권이 소중하고 사회는 민주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로마제국과 중세 봉건사회에서 사용하던 신앙언어를 우리가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기에,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으로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계명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제물을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은총을 얻어 우리가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신앙인이라면, 오늘 복음의 말씀,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말씀이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대조되는, 엄하신 하느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베푸셨고, 우리가 당신의 삶을 배워 당신의 자녀 되어 살도록 배려하신다는 뜻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너무 사랑스러워, 나는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11,1). 자상하게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우리의 생명을 베푸신 분,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 분,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베푸심과 돌보심을 배워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 안에 또 우리와 함께 지금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우리가 만나는 내세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함께 계심을 받아들여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을 높고 두려운 분이라 믿으면,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불편하게 또 불안하게 만드는 분입니다. 군복무를 하는 사람에게 군 지휘관은 높고 두렵습니다.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선 사람에게 재판장도 높고 두렵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예수님은 그분을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는 하느님이라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편견을 넘어 그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우리는 그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그분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러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질서를 배워 그것을 실현하며 살 때, 그 질서의 원천으로 확인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은혜롭게 베풀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자기도 주변에 베풀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을 기다리며 서있는 종의 모습입니다. 종은 주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주인이 원하는 질서를 삽니다. 하느님의 질서, 곧 섬김의 질서를 실현하기 위해 준비된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이 일을 맡긴 관리인에 신앙인을 비유하면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재물이나 지위를 얻으면,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 앞에서 우월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서는 다릅니다. 재물과 지위는 그것을 가진 사람이 마음껏 누리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자기에게 그것을 베푸셨기에 다른 형제자매들을 위해 자기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물은 이웃을 위해 베풀어야 하고, 지위는 이웃에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하느님과 교섭하여 자기 한 사람 잘 될 길을 찾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녀 된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기에게 잘 바치는 자를 잘 되게 해 주는 이 세상의 탐관오리가 아닙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받고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해준 심청전의 용왕도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듯이, 대가 없이 당신의 나라를 기꺼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인과응보의 원리 따라 베풀지 않습니다. 성공한 자녀를 더 사랑하고 실패한 자녀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 모두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며, 자녀 모두가 훌륭히 살 것을 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모두 당신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서, 은혜로우신 당신의 자녀 되어 살 것을 원하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여 삽니다. 부모의 모습을 역사 안에 지속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역사 안에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현합니다. 가진 것을 베풀면서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이 높고 두려워서 지킬 것 지키며 그분께 빌고 바치는 노예가 아닙니다. ‘기꺼이 베푸시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으로 말미암은 질서를 당당하게 실현하면서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그분의 질서가 자기 주변에 실현된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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