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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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바로보기 /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 3 (마르13,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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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7-07 ㅣ No.148130

 

(공동번역성서) 2021. 7. 7. 성경바로보기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먹을까 (3)

 

(마르13,28-37)

28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와진 것을 알게 된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30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3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34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35 집 주인이 돌아 올 시간이 저녁일지, 한 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혹은 이른 아침일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큰 일이다. 37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비유 마지막 시간입니다. 떡 하나 주면 정말 안 잡아 먹을까? 세 번째 이제 완결편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중요한 비유는 거의 샅샅히 다 훌튼 거 같은데, 드디어 비유 마지막 편에 이르렀습니다.

 

윤영선 교수가 쓴 키스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그 희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통의 부재라는 대 주제를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차분히 풀어가요. 작가는 그 소통의 부재라는 그 주제를 한마디로 축약을 해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반복하여 외치게 하는데 그 대사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입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작가 김태웅 씨가 윤영선 교수의 희곡을 읽다가 그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윤교수의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희곡에 그 대사를 그대로 옮겨 적어요.

그것을 영화감독 이준익 씨가 자신의 영화에 사용해서 공전의 히트를 친 거죠.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그 대사가 나올 때마다 극 중에는 두 명의 맹인이 등장해요. 두 맹인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그 확인 작업을 통하여 나 여기 있음의 상태. 즉 자신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그리고 자신이 부르고 있는 그 대상이 거기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너 거기 있음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표출하는 거예요.

그런데 둘은 맹인이라 상대가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두 맹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혹시 보신 분들 계세요? 너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하면서 서로 서로 부둥켜안으려고 하다가 휙 비켜가고, 획 비켜가고 결국에는 확 부둥켜안는 그런 장면이 나오죠.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게 바로 이런 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돼요. 모든 인간은 나 여기 있음이라는 그런 자기 존재의 그 실존 감각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아요. 나 여기 있음이라는 그 실존 감각을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아요. 내가 존재하는거 이거보다 더 확실한 진실은 없다는 것이죠.

신앙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는 전부 '나 여기 있음'에서부터 시작이 돼요. 그리고 실존 세계의 그 주인공인 나의 그 상대편에 예수가 있음을 가정하고 '너 거기 있는가'를 연신 외쳐대고 있는 거예요. 예수가 보이지 않거든요. 휘저으면서 '너 거기 있는가'라고 연신 외치고 있어요.

그래서 나 여기 있음의 그 자기 존재성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는 인간들은 그 불확실한 너 거기 있음의 그 현실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고 선한 일에 힘을 써보기도 하고 하는 거예요.

 

신앙은 '나 여기 있음'에서 출발하여 '너 거기 있음'을 확인하는게 아니라, 거기 있는 예수가 날 찾아오는 거라 말입니다.

나 여기 있음의 자리에서 너 거기 있음이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거기 있는 너라는 대상이 나를 불러주도록 이 사람들이 치성을 다해보는 거예요. 내가 부른다고 오는 게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그것을 신앙이라고 오도하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더욱 견고히 하고 자신의 그 나 여기 있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임을 확보하기 위해 부르는 신. 그 신을 우상이라 해요. 그리고 그러한 우상을 부르는 데에 사용되는 모든 행위를 죄라 그래요. 죄송하지만...

왜냐면 나 여기 있음의 그 가치와 의미를 확보하고자 하는게 바로 하느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피조물. 인간의 죄의 본질이며 나 여기 있음의 이 가치와 의미를 챙기기 위해서 내가 주관적으로 심리적으로 수용해 버린 신은 내가 수용한 신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에 의해 퇴출되어질 수 있는 우수꽝스럽고 무력한 가짜 신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 여기 있음의 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너 거기 있음의 예수를 찾아가는 그 행위가 기특한 행위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신은 언제든지 내가 뱉어낼 수 있는 신이 된다니깐요. 그걸 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바로 나 여기 있음의 자리를 공고히 확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불러요.

하느님은 전 역사를 통하여 바로 그걸 깨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죄기 때문에! 그게 우상 섬김이기 때문에! 그러니 성경에 여러가지 명령들이 그런걸 확보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는 명령일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그걸 지킴으로 말미암아 나 여기 있음을 계속해서 공고히 하거든요.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뭐냐? 오늘 결론이니까 잘 들어보란 말이에요.

 

피조물은 하느님의 창조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 비로소 존재일 수 있고 살아 있는 거예요.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은 스스로 살 수 없는 거죠. 창조주에 의해 창조가 돼야 피조물이에요. 따라서 피조물은 창조의 은혜 아래에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해요. 그리고 그때 살아있는 거예요.

바꾸어 말하면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서 죽은 자로 항복되어질 때 비로소 창조의 은혜 아래에서 가치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첫 번째 인간의 이름이 흙인 거예요. 아담이라는 단어 자체가 흙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 자체가 또 사람이구요.

그러니까 사람은 흙이다. 죽은 존재다라는 뜻을 아담이라는 이름 안에 담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죽은 흙이어야 비로소 존재일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살아있는 자이다라는 그 엄청난 진리를 그 아담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하느님의 창조의 은혜가 발산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뭐예요? 살아있는 거에 보태지는 행위는 개선이라고 하는 거라 말입니다. 창조는 반드시 죽어있는 상태. 없음의 상태. 혼돈과 공허 스트럭쳐도 없고 콘텐츠도 없는 무에서 창조가 발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피조물이 창조의 은혜 아래 있기 위해서는 그가 반드시 죽은 자로 폭로가 돼야 된다 말입니다. 죽은 자여야 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창조의 은혜가 발산될 수 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런데 나 여기 있음을 챙기는 자들에게 과연 그 창조의 은혜가 부어질 수 있겠냐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가 아닌 '나 예수 여기 있고 넌 죽었어!' '나 여기 있고 너 죽었음!'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라 말입니다. 그걸 아는 자만이 창조의 은혜 아래에서 비로소 산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 안에서 하느님처럼의 삶을 살죠. 하느님처럼 되겠다고 따 먹은 거니까. 자신들이 하느님이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그 단절이 진짜 죽음임을 모르는 거예요. 그게 죽은 건데 나는 하느님처럼 되었다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내가 하느님처럼 되었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단절이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그 하느님처럼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느님 절대 의존자의 자리에 앉을 때 원래의 아담 그 흙의 자리에 앉을 때

비로소 창조의 은혜 속에서 하느님나라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모두들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그게 진짜 죽음 속에 들어있는 가짜 살아있음 즉 좀비의 세상인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너희는 거기 있는게 아니야! 거기 있는게 아니야! 너희는 죽었어! 살았다고 우기지 마라! 살았다고 우기는 그게 바로 죽은 자의 행위인 거야! 너희의 죽었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붙들어라! 라고 외치셨어요. 그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잖아요.

열심히 율법 지키고 제사 지냈던 그들에게 찾아와서 그거다 아니니까 '회개하고 나 믿어라' 라고 이야기했다 말이에요. 그게 복음이잖아요.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죠? 나 여기 있음의 그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일로 매진하고 있던 사람들이 너 죽었음을 가르치던 그 예수를 죽여버렸어요. 왜 너 죽었다고 외치는 그자를 죽이면 나 여기 있다라는 그 가치와 의미를 챙겨가질 수 있기 때문에 너 죽었다라고 외치는 그 자를 끊임없이 죽이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예언자들이 다 세상에게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살아나 버렸어요. 이제 인간들은 큰일 난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도 다스리시는 진짜 하느님을 살해한 죄인임이 거기서 들통이 나버린 겁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모든 인간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거라 그랬죠? 그때 당시에 구조가 유대인과 이방인 밖에 없었으니까.

바로 그걸 인정하는 자들. 자신이 하느님을 살해한 죽은 흙에 불과한 자임을 아는 자들. 그들 위로 하느님의 창조 은혜가 부어지는 거예요. 하느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바로 그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죽은 흙, 먼지가 풀풀나는 마른 뼈가 낸 헌금이나 봉사나 헌신이나 선행 등을 근거로 그들을 살려내는 게 아니라 죽은 자들이 내는 건 다 죽은 거라 말입니다. 죽어 있는 마른 뼈에, 죽어 있는 흙에 하느님의 창조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부어지는 것이 구원이에요. 그걸 아는 자를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내 행위는 쓰레기구나!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앞에서 선한 행위는 없는 거구나!' 이거 진짜 가슴 깊이 진심으로 깨달아 아는 자들 이게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나 여기 있고 하느님 거기 있죠? 라는 그런 개별자로서의 자신의 존재성과 가치와 의미를 챙기는 삶이 아니라, '나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내 안에 계신다'라는 나 여기 없음. 나의 존재가 예수 안에서의 존재이고 예수가 내 안에 들어옴으로써 내가 존재가 되는 거니까... 나 죽었음이잖아요. 그거는요.

나 죽었음의 나 여기 없음의 그 진리를 깨달아 가는 과정.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깨어 있음은,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내 안에 사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비로소 난 산자로 여겨짐이라는 갈라디아서 220절의 그 말씀을 깨달은 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깨어있다 라고 얘기해요.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어떻게 우리 성도의 죽은 자인식이 깨어 있음의 내용이라는 그 역설이 성립이 되는지에 관해서 사도 바울의 견해를 인용해서 제가 살펴보도록 할게요.

 

(로마8,10) 10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을 살아있습니다.

 

여기서 , 소마는 전인을 상징하는 거예요. 全人. 全人格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으며 몸은 곧 인간 자신이다 라는 이 명제를 여러분 기억하세요.

그러니까 로마서 810절을 이해하기 쉽게 풀이를 하면 이러해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聖徒잖아요. 성도는 성도라는 그 인간의 전인격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다. 그러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뜻이에요.

여기에서 너무 섣불리 우리의 영혼은 살아있는데 내 몸뚱아리만 죽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게 플라톤 철학이에요. 성경은 그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이게 성도에요.

성도는 그 인간의 전 인격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 로 말미암아 살았다란 뜻이에요. 지금 성도가 어떤 구조로 성도가 되고 존재가 되는지를 지금 설명하는 구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혼란스럽죠? 살았다는 거야? 죽었다는 거야? 바울로는 에페소서를 통해서 성도는 살아난 존재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에페2,1.4-5) 1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4 그러나 한없이 자비스러우신 하느님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5 잘못을 저지르고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분명히 살았어요. 그런데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있는 존재인가 하면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성령께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고린도전서에 나오죠. 예수님, 성령님,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요. 살아있는 예수님께서 죽은 성도 안에 들어가 계신 방식으로 살아있는 거예요.

고린도 후서 47절의 말로 바꾸면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겨 있는 구조로 살아있는 거예요. 그렇게 존재하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성도의 몸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소마 그건 죽었다 그러잖아요. 로마서 810절에서 죽은 거예요. 그건

몸이 살아있는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계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계심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로마서 810절의 그 산 것으로서의 그 영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에요. 로마서 810절의 그 주제를 설명하는 부분을 패러그래프(단락 [paragraph])으로 자르면, 로마서 8장을 단락으로 자르면 그 810절이 1절에서 17까지의 단락 안에 들어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1절에서 17절까지의 단락 안에 영이라는 단어가 열다섯 번 나와요. 그런데 그게 전부다 성령이란 말입니다따라서 로마서 810절의 그 영은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이제 풀어서 번역을 하면 이런 거예요.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면 성도들아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 몸은 죽은 건데 죽은 건데 너희 안에 성령이 살아계심으로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 살아계신 성령에 의해 너희는 산자로 여겨지는 것이다란 말이에요.

여러분 이건 바울로의 서신서, 바울신학을 이해하는데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내용이에요.

그러니 우리 성도가 살아있다고 하는 건 우리 성도 안에 살아계신 성령에 의해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럴 순 없지만 성령이 떠난 상태의 성도는 죽은 거라 말입니다. 죽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성령이 안 계시면!

그래서 성도는 죽은 질그릇 안에 산 보배이신 성령을 담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는 반드시 그 보배를 들어내는 삶을 살게 되어 있지, 질그릇에 금칠하는 삶을 못살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맥락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어요.

 

(요한6,63) 63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여기서 영은 분명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키는 거죠. 인간의 영혼이 뭐 살리고 이런 거 못하잖아요?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여기서의 영은 성령이에요.

그렇다면 그 영과 대척점에서 비교되고 있는 육이 무엇을 가리키는 거겠어요? 이 육. 고기. 육신 이것만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인간의 전인격. 전인!을 가리키는 거란 말이에요.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 그에게서 도출되는 그 어떤 사유나 행위도 인간의 살아있음에 무익한 것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니가 가진거 다 주라' 이게 '聖化 버려라'라는 말이죠. '니 성화 버려라'

그가 가진 재물이 '난 어려서부터 율법 다 지켰습니다'와 비교되고 있잖아요. 그가 가진 재물은 뭐예요? 그의 성화에요.

지금까지 착하게 잘 산 율법 잘 지킨 성화, 그런데 그걸 줘라 그러니 못 주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거와 하느님을 동시에 못 섬긴다그러죠?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세요?

우리 인간들은 근데 전부 자기가 챙겨 가져요. 그리고는 그걸 차곡차곡 쌓으면 하느님이 기뻐 받으실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사유나 행위도 인간의 살아있음 존재됨에 무익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을 살게 하는 살리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가시는 성령 때문인 것이지, 육의 그 어떤 부분도 인간의 살아있음에 전혀 기여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육은 다 무익하다.” 밖에서 들어가는 게 마음을 깨끗하게도 못하고 더럽게도 못한다가 그 말이에요.

'살리는 것은 영이다. ' 너희를 살리는 건 성령이야. 은 다 無益하다는 거예요. 그것을 바울로가 로마서에서 여겨주심이라는 단어로 잘 표현해 놨어요.

 

(로마6,11)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앞에서 너희는 죽은 자다는 선언이에요. 근데 산 자로 여길 찌어다 에요. 우리는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산자가 될 수 없어요.

 

동시에 산자로 여겨질 수 있어요 내 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 안에서 산자로 여겨지는 거지. 우리의 소마가 살아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로가 그의 모든 서신서 안에서 입버릇처럼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걸 반복하여 정말 입버릇 처럼 그 하느님 나라의 구조, 성전의 구조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이게 하느님 나라의 구조라 그랬죠.

하느님은 늘 우리를 용서하는 자리에 있고 시은좌. 증거궤 위 속죄소. 우리는 밑에서 항상 용서받는 자로! 그런데 어떻게 용서를 받느냐하면 하느님이 피를 뿌려서. 내 아들의 피만 보겠다는 거죠. 너희들이 한 행위는 안 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구조란 말입니다. 지성소의 구조잖아요. 법궤의 구조.

 

(갈라2,20)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아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느님에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어요.

어떻게 그런 논리가 성립이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지인 그 죽음이라는 운명을 만 천하에 공포해버린 사건이에요. '너희는 이렇게 다 죽어야 돼'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거든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요렇게만 이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거기 안에는 엄청난 진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너희는 모두 죽은 자들이다.’ .너희들은 죽은 자들이고 죽어야 할 자들이다. 그게 십자가의 죽음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거죠.

스스로 살아있다 라고 하는 모든 존재는 다 죽은 거고, 그렇게 죽어 있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곳이 영원한 죽음의 장소인 지옥인 거예요.

인간들이 인간들의 그 자발적 살아있음이, 하느님처럼 된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된 인간들의 그 자발적 살아있음이

하느님에 의해 공격당하여 영원한 죽음으로 내 몰리고 있는 곳! 그리고 계속하여 그들의 살아있음을 공격받는 곳을 지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세상이 지금 그렇게 돌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다 나 여기 있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신의 이름까지 부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가 지옥인 거예요. 피조물은 하느님에 의해 살아있어야 하는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창조주의 은혜 아래 있어야 피조물이고 그때 그게 존재가 되고 그게 살아있음이 되는 거예요.

하느님은 그렇게 모두 지옥에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져야 할 자들 중에 얼마를 창세전에 선택을 해두셨죠. 하느님은 그들을 지옥이 아닌 십자가 위의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는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살려 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몸은 죽고, 죽은 자임을 인정하게 만든다 뜻이에요. 성도의 몸은 죽고 예수의 몸으로써 다시 살게하는 거예요. 내 몸으로 살아난게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머리를 위에 두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다른 몸으로 살아난 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개별적으로 자기의 몸을 주장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이들은 개별적인 자아를 챙겨낼 수가 없어요.

? 이제는 내가 아니라 예수의 몸으로 살아났단 말입니다. 그게 예수의 몸의 개념이에요. 바울로가 말하는 예수의 몸의 개념이 그거란 말입니다.

 

우리의 소마()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예수의 몸으로써 집단적으로 건져지는 거예요. 우리가 뭘 해서 예수의 몸으로 자라가는게 아니라니깐요. 성도는 반드시 귀가 열려 있어요. 반드시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한번 잘 들어 보시란 말이에요.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를 예수의 몸으로서 다시 살게 만드셨어요. 그리하여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이제 두 부류로 갈라지는 거예요. 십자가로...

한 부류는 여전히 나 여기 있음의 그 산 자 행세를 하는 자들이고요. 그리고 그것만을 위해서 사는 자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린 예수 안의 성도. 이렇게 두 부류로 갈라져요.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죽은 흙이며 티끌임을 알게 돼요. 그리고 그걸 아는 자리로 계속 몰려가요. 끌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자들의 삶 속에서도 똑같이 좀비 같은 나 여기 있음의 삶이 쏟아져 나온다는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제가 순환논리로 한번 설명을 해볼게요.

성도가 살아났다는 건 우리가 에페소서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죄와 허물에서 살아났다는 거죠. 죄와 허물에서.

그 죄와 허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요구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게 율법이잖아요. 근데 인간은 도저히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낼 수 없는 그런 자에요. 그렇게 도저히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낼 수 없는 성도가 죄와 허물에서 살아났다라고 성경이 선언해 버린다 말이에요.

그러면 율법의 요구를 죄와 허물의 대가를 요구하는 그 율법의 요구를 성취해 낼 수 없는 인간이 살아났다라는 건 군가가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그에게 거저 전가시켜줬다는 거죠?

어떠한 방법으로 그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버렸는가 하면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어버리는 방식으로 사별을 한 거예요. 로마서에 나오죠. 바울로가 아주 거기에 대해서 분명히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잖아요. 사별을 해버리신 거예요. 율법에 대해 죽어버리셨어요.

그렇게 율법에 대해서 진짜 죽으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어요. 인간은 죽음조차 사유할 수 없는 존재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한 번도 인간은 살아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은 죽음이 뭔지 몰라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죽음은 죽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죽음은 예수의 죽음이에요. 그 죽음은 우리에게 포착이 안 되는 그런 죽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죽음에 정체조차도 포착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죽음도 사유할 수 없어요

자기가 목매달아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그게 자기 목숨을 자기가 사유한게 아니에요. 그 죽음을 자기가 사유한게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은 살아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율법에 대해서 죄와 허물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율법에 대해서 죽으신 분이 한분이에요. 그러면 살아나신 분은 누구? 예수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만 살아난 거예요. 삶과 죽음은 하느님만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티끌이란 말이에요. 쓰레기가 무슨 삶과 죽음을 사유합니까?

그런데 자꾸 우리가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성경을 보면서 소마 육은 죽은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살았냐면 죽은 내 안에 예수가 뚫고 들어오는 방식으로, 내가 죄와 허물로부터 살아난 거예요. 죄와 허물에서 살아난 분은 그분 한 분밖에 없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장악해서 나를 살려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살아있다가 뭔지 아시겠어요? 성경이 말하는 살아있다는 그런 살아있음 이예요. 그런데 그걸 아는 자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이 말을 어떻게 압니까? '나 여기 없어요. 나는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걸 복음이라 그래요.

그러한 연유에서 성도는 예수의 공로에 의해 산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어있는 몸을 소유하고 있는 관계로 구원받기 이전의 행사를 그대로 쏟아 놓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도 왜 이 모양이지?' 그동안 얼마나 고민하셨어요. 그래도 조금 개선은 된 거 같은데 개선은 개뿔이나 무슨 개선이 돼요? 착각하고 있는 거지.

여전히 자기만을 위해서 선택을 하고 여전히 자기의 인기와 위상과 평판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해요. 그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난 성도들도 몸을 입고 있는 한 여전히 전 인격적인 타락성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본질이 변했으면 우리 안에서 로마서 1장의 그 추악한 것들이 하나라도 나오면 안 돼요. 본질이 변한 거니까...

그런데 그게 변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산자라 불릴 수 있냐 말이에요? 내 안에 예수가 들어왔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실패와 실수를 경험하면서 바로 그 예수를 붙드는 자예요.

불신자는 실패와 실수를 다른 근사한 것으로 계속 포장하고 위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어떤 구조 속으로 들어가서 그 구조에 의해 하늘의 존재로 여겨짐을 받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거예요.

하느님 나라의 구조가 이 땅에 내려와서 쫙 펼쳐진게 성막에 구조이고, 그것이 이 역사 속에 펼쳐진 하느님 나라의 모형인 거라 말입니다. 인간의 죄로 죽은 몸은 현상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생래적이며 끝까지 가는 구조적인 문제인 거예요.

그러한 구조적이며 본질적인 죄의 총체인 인간이 하느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 아래에서 면목없이 손을 벌려서 하늘의 풍요를 그냥 덥석 거저 선물 받는 그 상태가 천국의 구조인 거예요.

그러니 이런 걸로 지금 고민해야 될 교회가 성도가 신비주의, 기복주의 이딴 걸로 시간을 허비하고 앉아 있으니 우리한테 그게 맞고 틀리고가 무슨 상관있어요? 그냥 원래부터 무당 잡교인데 그건 왜 그걸 갖고 고민을 해요? 그걸 갖고 또 논쟁을 하고 그럽니까?

 

(에페2,8-9)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더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까? 여기에 인간의 공로와 행위와 의와 노력과 애씀과 자격 뭐가 하나 들어갈 틈이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에 조금도 기여를 하지 못해요.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구원받은 성도들의 죽은 몸 안에 살아계신 성령이 하시는 방법으로 성도를 살아있는 자 되게 만드시는가? 이 역사 속에서도 몸까지 살려내셔서 좀 폼 나게...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멋지게 살 수 있다를 세상에게 보여주는 게 더 통쾌하지 않아요?

그런데 돈도 못 벌어. 그렇다고 남보다 착하지도 못해. 다른 거는 주일날 어떻게 일어나갖고 성당에 가서 앉아 있다가고 졸던지 잡 생각하던지 그거 이외에는 다른 거 하나도 없어. 나쁘다는게 아니라 다 그렇다는 얘기에요.

 

왜 하느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살아있음 살아있는 방법으로 이 땅에 보내시냐 말이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서 멋진 행위를 내어 놓아서 그렇게 우리는 '살아있는 자예요'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서 드러나는 것이 백 퍼센트 사람의 이름만 드러나요. 백 퍼센트. 그런데 하느님은 그걸 죄라 그러거든요.

내 백성 죄 못 짓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게 죄에요.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이런 것만을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자기들이 규정해 놓은 그런 어떤 사건화 되고 개별적인 어떤 것만을 우리가 죄로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성경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일천(溢賤)한 거예요.

그게 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의 자랑 챙겨갖는 거. 자기의 살아있음 챙겨갖는 거. 이게 무서운 죄라 말입니다. 하느님이 가장 미워하는거. 그런데 인간은 착한 일 선한 일 해놓고도 항상 자기를 칭찬하게 되어 있어요. 하느님이 그거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은 몸으로 오직 성령의 살아있음에 의해서만 '너는 살아있는 자야'라는 것을 계속 체휼케 해줌으로 말미암아,

'그래 나는 하느님 놓치면 쓰레기구나' 이걸 깨닫고 가게 하는 거예요. 원래 성도는 자신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일하심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가 된 존재에요.

예수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예수를 위하여 창조된다 그러잖아요. 성경이...

그래서 성도의 삶 속에서는 항상 예수가 커지시고 성도 자신은 죽은 흙으로 작아지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성도의 이름을 절대 하게 안 만드세요. 여러분 제발 착각하지 마세요. 그거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여러분에 이름 하게 해달라고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마귀는 그거 들어줍니다.

멀리 돌아가라 그게 바로 깨어 있는 자들의 삶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살다 가셨단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전부 하느님께 차압당했습니다. , 행위를 차압당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준 것만 말하고, 하느님이 시키는 일만 하는 그 삶... 그게 죽은 흙의 삶이란 말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 백성의 모형이란 말이에요. 우리를 그 자리로 밀고 내려가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예수의 몸으로서의 그 성도의 삶 속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지 성경에서 한사람을 발췌해서 예로 들어 설명을 해드릴게요. 분명히 이해하고 가야 돼요. 여러분 깨어 있으라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붙어있는지 한번 잘 보세요.

바로 고 다음에 이 깨어있음이 뭔지를 내가 예로 들어줄게 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나 붙이는데, 그 이야기가 뭐냐면 예수님께 향유 부은 여인의 이야기예요. 그 이야기 안에 깨어 있는 자. 진짜 살아있는 자와 죽어있는 자가 두 부류로 명확하게 구별되어 나타나 있어요. 보세요.

 

(마르13,37-14,1-9) 37 늘 깨어 있어라.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또한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1 과월절 이틀 전 곧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하였다. 2 그러면서도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축제 기간만은 피하자' 고 하였다. 3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예수께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셨는데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4 그러자 거기 같이 있던 몇 사람이 매우 분개하여 '왜 향유를 이렇게 낭비하는가? 5 이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도 더 받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터인데!' 하고 투덜거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6 그러자 예수께서는 '참견하지 말아라.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 7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 곁에 있으니 도우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도울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8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 9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이에요.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죠. 학자들에 의하면 이 베다니 문둥이가 지금 현재 문둥이가 아니라 그의 별명이라고 추측을 해요. 왜냐하면 문둥이 집에 사람들이 초청받아 갈 수 없거든요. 그리고 이 문둥이는 아마 나자로나 나자로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왜냐면 거기 마리아와 마르타가 등장하거든요. 그렇게 추측을 합니다. 그건 중요한거 아닙니다.

한 여자가 마리아라고 나오는데 딴 곳에는 한 여자가 매우 값비싼 향유를 갖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어요.

루가복음 7장에서는 발에 붓죠. 둘은 이제 다른 사건이라고 이게 4복음서에 다 나오는 이야긴데 루가복음 7장의 이야기만 조금 달라요. 그리고 나머지 세 복음서의 이야기도 조금씩 다른 점이 있는데 그런거 갖고 시비 걸지 말자고요.

그 두 이야기 안에 전부 깨어 있는 자와 죽어있는 자가 명확히 드러나 있다는 거.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한 부류는 충분히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죽음에 부어 버리는 부류고요. 충분히 일상에 쓸 수 있는 기름을 신랑 기다린다고 꽁꽁 싸고 있고... 그 미련한 다섯 처녀 같은 삶이죠. 이게. 그렇잖아요 충분히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기름을 예수님의 발에 부어서 허비해버린 거 아닙니까? 일상에 쓸 수 있는걸. 기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이게...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가리웃 유다와 바리새인 시몬으로 대표되는 인본주의와 실용주의에 빠진 자들의 무리에요. '야 이거 갖고 좋은 일에 쓰자. 가난한 사람 돕자' 이 부류와 그냥 그걸 예수님의 발 앞에 허비해 버리는 이 부류 두 부류가 등장하는데, 오늘날 문자로 성경을 보는 인본주의자들은 유다의 편을 다 들어버린단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유다의 편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돕자, 착한 일하자, 좋은 일 하자. 예수님은 그거 아니라 그러잖아요. 성도의 신앙의 본질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근데 그거 해 놓고 난 괜찮은 삶 살았다고 자기를 칭찬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요. 교회가... 나는 다른 이들과 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여러분 그게 죽은 겁니다.

 

먼저 9절을 보면 주님께서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정말 그래요? 여러분 복음 들으실 때 이 여자 이야기 같이 들었어요? 그럼 예수님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예수님이 행하신 복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면 이 여인의 이야기가 같이 전해지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품고 있는지 보잔 말이에요. 5절을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부은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 비싼 것이래요.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 년치 월급입니다. 굉장히 큰 돈이었어요.

당시 유대 여인들은 향유를 조금씩 모아서 병에 넣어두고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걸 팔아서 쓰거나,

굉장히 값비싼 거였어요. 보물이었단 말입니다. 집의 보물.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데 아주 조금 덜어서 쓰는 그런 거였어요. 그렇게 여인들에게 있어서 향유란 아주 소중한 거였어요.

그 여인이 삼백 데나리온이나 가는 향유를 모으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세월이 필요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여인이 그 소중한 향유를 예수님께 전부 다 부어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그 여인이 당신의 葬禮를 미리 준비한 거다 이래요.

시편 23편 하고 같이 연결해서 설명해 드려야 되는데 거기까지 가면 너무 길어지니까...

자 나의 가장 소중한게 예수님의 죽음에 부어지는 거예요. 일반 사람들의 상식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걸 죽을 사람에게 쏟아붓는 게 이게 이해가 갑니까? 이게 효율성 경제성 어느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미련한 거예요. 이거는요.

왜 죽을 사람에게 자기의 가장 소중한 걸 투자를 합니까? 그러나 그게 바로 신앙인 거예요. 나랑 옆에 같이 달려서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떤 이에게 내 미래를 맡겨 버리는 그 행위. 그게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가는 신앙이란 말입니다. 그 강도의 이야기인 거예요. 이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세상적 관점으로 봤을 때 전혀 무가치한 것에 쏟아붓는 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어요.

여러분 교회에 헌금이 보람되게 좋은 일에 착한 일에 잘 쓰였으면 좋겠다라는 그딴 말하지 마세요. 교회 헌금은 버려지는 거예요. 그게 좋은 곳에 쓰였으면 좋겠다라는 발상 자체게 그거에 가치를 부여해준 거거든요. '가치있는게 쓸데없는데 쓰이면 안 되잖아' 이거 아닙니까?

우리는 그 헌금과 함께 나를 버리는 거거든요. 하느님 앞에 자꾸 버리는 게 헌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치 있는데 쓰여졌으면 좋겠다가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가. 여러분이 버린 쓰레기가 똥이 어떻게 하면 가치있게 쓰여요? 거름은 거름이지. 그걸로 장식을 할 수 있어요? 먹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그런 발상에서 엉뚱한 도덕과 윤리를 교회 안에서 가르치려고 한다 말입니다. 그렇다고 막 쓰이는게 좋다는 건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쓰여야죠.

 

 

자 값비싼 향유가 희생당함으로 어떤 가치 있는 일이 벌어진다 말이에요. 진짜 가치 있는 일이 그게 예수의 십자가였단 말입니다. 희생되어지는 거예요. 없어지는 거예.요 가치 있는게. 거기에서 하느님의 일이 일어난다니깐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그려놓은 그림대로 교회를 이끌어 갈려 그래요. 교회를 운영하려 그래. 어떻게 교회에 사목운영위원회가 뭘 운영하겠다는 건데요?

 

여인은 향유와 동일시되어서 무가치해 보이는 예수의 죽음에 부어지고요. 향유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져서 가치 없는 것이 되어버리잖아요. 여인이 거기에 동일시 되어지는 거예요. 금방 조롱거리가 되잖아요. '저거 미쳤잖아' 금방 조롱거리가 된다 말입니다.

향유와 여인이 동일시가 되어서 예수님의 죽음에 부어지고 얘네들은 사라지는 거예요. 죽은 흙으로요. 그리고 그 여인에게서 하느님이 혼자 몰래 영광을 취해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다 칭찬해주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만이 챙겨가는 영광 그게 성도에게서 나와야 되는 거라 말입니다. 이 세상 티브이 일간지까지 다 칭찬해주는 그런 영광 하느님이 안 챙겨가요.

그거 하자고 한게 유다라니깐요. '팔아서 좋은 일 하자.' 그런데 하느님이 그를 야단쳤단 말입니다. 팔아서 좋은 일해서 누구 이름 내려고? 니 이름 내려고 하는거 아니야? 예수님이 정확히 짚어낸 거예요. 팔아서 좋은 일해서 누구 이름 내려고 하는 거냐? 진짜 예수 이름 내려고 하는 거냐? 아니잖아.

어떻게 알아요? 요한복음으로 가면 그 말을한 자가 가리옷 유다와 제자들로 그려져 있는데 '그 유다는 돈을 좋아하는 자라'라고 쓰여있어요. 그러면 돈을 좋아하는 놈이 목적은 예수님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주어지는 어떤 반대 급부를 노리고 다 희생한 거거든요.

인간은 그런 희생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해서 고런 목적으로 예수님을 쫓은 놈이 '야 그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줘야지. 그걸 왜 거기다 부어?'라고 이야기했다는 건 뭐예요? '그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 나눠주어 거기에서 오는 영광을 내가 챙겨야 될 텐데 왜 니가 그걸 헛되게 예수님의 죽음에다가 갖다 부어버리니?' 유다가 그 이야기한 거란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 이름 챙기려고 착한 일 선한 일 열심히 해서 예수의 이름은 간 곳 없고 지 이름만 드높아지는 그런 일 해놓고 '하느님 잘했죠' 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게 죄인데. 그게 죄의 본질인데 그걸 행해놓고 '하느님 저 잘했죠' 이러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런 일하는 사람들이 다 나쁘다는거 아니에요. 그 안에서 하느님이 그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일을 토해내 놓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절대 자기자랑으로 그거 안 가져요.

 

信者는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여 살게 됨을 그 여인이 지금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쉬운말로 신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삶이 지금 반복되어 나오는 거예요.

루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러죠. 그 말은 구원을 받은 자의 삶 속에서는 이 삶이 나온다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 여자가 그거 해서 구원받은게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는 이 여인의 이야기. 십자가에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가 실제화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다란 이야기예요. 그래서 복음이 전파될 때 이 여인의 이야기가 같이 전파된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 여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이야기거든요.

반면에 그 반대편 사람들은 어때요? 진짜 가치가 뭔지를 모르는 자들은 세상의 힘으로 세상이 정의한 가치 있는 일을 할려 그러죠. 자기들의 인식 속에서 자신들이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한번 보고 가죠.

 

(요한12,4-6) 4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5 '이 향유를 팔았더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 6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이 도둑놈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이걸 팔아서 그들을 돕자라고 이야기한건 하느님께 돌아갈 영광 지가 도둑질해갈려고 했던 것이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직접.

생각해보세요. 향유 삼백 데나리온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게 폼나요? 아니면은 죽을 사람 머리와 발에 부어서 낭비하는게 폼나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욕만 먹을 일인데, 그건 폼 나게 팔아서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게 멋지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게 폼나냐고 聖化論에 근거하여 대답해 보세요. 성화론이 뭐예요? 뭐하라는 거예요? 팔아서 돕자라는 거 아닙니까! 사회 개혁하자(사회교리)는거 아니에요. 불쌍한 사람들 돕자는거 아닙니까.

그건 인간이면 신자든 불신자든 그냥 인지상정으로 하는 거고 신앙의 본질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하는게 나쁜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면 당연히 하는 거고 그걸 신앙의 본질인양 착각해서 그거 해 놓고 자기 영광 챙겨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유다의 정체를 이렇게 폭로해 버려요.

세상의 선함은 자기 유익, 자기만족, 자기 영광, 자기 인기, 자기 자랑, 자기 가치 챙기기일 뿐이에요. 그건 하느님 나라 생활기록부에 단 한줄도 기록 안됩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어찌되었든 좋은 일만 하면 되는거 아니냐'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까봐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여러분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다 죽은 자예요.

산 자 흉내 내는 죽은 자. 죽은 자임을 폭로당하고 그 폭로에 수긍하는 죽은 자 그건 성도죠.

그런데 다 죽은 자예요. 몸은 다 죽었어요. 인간이 인간의 영혼에게 뭘 해줄 수 있는건 없어요. 인간이 이웃에게 해줄 수 있는건 고작 몸()에게 해줄 수 있는 건데, 시체한테 순대국 사준다고 고마워할까요? 그거 가치 있는 일입니까? 시체한테 좋은 금은 보석 바리바리 싸다가 채워주면 그거 가치 있는 일입니까?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다들 자기가 살아있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 살아있음 자체를 모든 인간은 선으로 규정해 버려요. 살아있는게 선이다 말이에요. 그래서 죽으면 두려워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거예요. 왜 살아있는게 선이기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살아있는게 선이에요. 그 살아있음을 공고히 하는데에 내가 뭘 일조를 하는걸 선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구제 선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뭘 하면 그의 살아있음에 내가 일조를 했기 때문에 나는 선을 행했다라고 오해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다 죽었다고 한다 말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존재에요. 그런데 그 하느님이 드러나기 위해선 질그릇인 내가 깨져야 보배가 드러난다 말입니다. 중요한건 우리 인간은 그렇게 남을 돕는 것으로도 자신의 만족과 가치만을 챙겨갖는 그런 유다같은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은 성도의 자발적 선행을 기다리지 않으시구요.

언제 착한 일 하나 이렇게 자발적 선행을 기다렸다가 하나하나 생활기록부에 기록하는게 아니라, 성도를 예수님의 삶으로 몰아가세요. 밀어내 버리신다 말입니다. 선행의 주체를 인간으로 삼아서 인간이 내여 놓는 행위를 근거로 그를 평가하는게 아니라, 선의 주체이신 하느님이 인간을 선으로 몰아가세요. 어떻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선으로 몰아가세요. 하느님이 몰아가세요.

근데 이라는게 뭐라 그랬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에서 선. 바울로가 어디서 인용한거라 그랬죠? 창세기 보시기에 좋았더라, 토브란 단어가 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창조가 완료가 되고,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선이에요. 토브.

그러면 피조물이 선한 상태로 가기 위해선 창조주 아래에 은혜를 받는 자로 죽은 자로 드러나야 된다 말입니다. 하느님이 그 자리로 끌고 가는 거예요. 우리를 선으로. 모든 걸 합력시켜서. 여인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인 거예요. 만일 그 여인이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면 그녀의 행위에서는 그녀의 이름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래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 거기서 주인공은 누구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다'예요. 거기에 무슨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까? 그 여인의 행함이 칭찬을 받고 그 여인의 이름이 높임을 받아요.

그 여인이 자기 영광, 자기 이름, 자기 가치, 자기 평판을 챙기는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향유를 그렇게 허비해 버리면 안돼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일상에 쓸 수 있는 기름을 그렇게 허비해 버리면 안돼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 여인에게 이 세상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하세요. 값비싼 향유가 그냥 허비되어 버린 거예요. 이게 깨어 있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란 말입니다.

여인의 이름은 묵사발이 되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만이 살짝 그 여인에게서 영광을 챙겨가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아이 고때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게 해주시지' 요게 인간인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이 영광을 챙겨 가시는 과정 속에서 그 여인은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요.

마치 노아가, 바울로가,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 하느님의 뜻 안에서 죽은 흙의 자리로 열심히 끌려갔던 것처럼... 그렇게 끌려가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삶인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노력해야 된다는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어떤 공식도 없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당신 백성들의 삶에 개입을 하셔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을 박아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가 소유한 여러가지 종류의 향유를 우리를 치장하는 데에 못쓰게 하세요. 예수님께 붓게 하세요. 다 털어버리신다 말입니다. . 소유. 심지어 생각까지. 가족까지. 나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게 하느님의 열심이에요.

그건 예수님이 욕심이 많으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향유를 나라는 우상의 치장에 사용하게 되면 진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를 놓치게 되기 때문에 예수에게 나의 향유를 빼앗기게 만들어 버리시는 거예요. 나 여기 있음의 자리에서 나 십자가에서 죽었음의 자리로 몰아내시는게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은 무익하고 살리는건 오직 성령이라는 진리를 몸소 체휼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육은 무익한 거구나' 성도는 그래야 창조의 은혜 아래에서 진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향유는 우리가 자의에 의해서 예수님께 붓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뺏어가는 거예요. 그 여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서, 여자에게서 예수님이 향유를 뺏어가는 거예요. 어디로? '발에 다 부어라'

그럼 다시 주워서 못쓰는데요? '그래 버려' '너는 너를 그 값비싼 향유로 생각하고 살고 있었잖아' '나 여기 있음. 살아있음. 내 존재성. 가치. 의미. 이런 거 챙기고 있었잖아' '내 발에 부어라! 그거 아니란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자리로 끌고 가요.

그런데 예수의 힘을 이용해서 내 향유병 채우겠다는 놈들이 있잖아요. 그게 제 정신입니까? 그게 진짜 예수를 아는 사람들일까요? 예수의 힘을 이용해서 내 향유병을 채우겠다고 하는 인간들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 맞을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리스도교인의 90프로 이상은 다 그러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90프로 이상은 다 그렇게 살고 있어요. 목적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헌신을 하고 희생을 하고 선한 일에 힘쓴다고 해도 결국 다 가리옷유다일 뿐이에요.

가리옷 유다도 가족들 떠났죠. 일 버렸습니다. 생업을 버렸단 말이에요. 재산도 두고 쫓았어요. 예수님을 위해서 올인 한 거예요. 다 희생했어요. 헌신했어요. 근데 무엇 때문에? 보상 받을라고! 그게 물질적인 거든, 명예, 정신적인 거든

어찌되었든 나는 보상받아야 되겠다라는 그 목적으로 내것을 버리는게 가리옷 유다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그런 봉사 그런 헌신 그런 헌금 하지 말라고 그러는 거예요. ? 그게 가리옷 유다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가리옷 유다보고 뭐라 그랬어요? '그 자는 마귀다' 아니 성당에 마귀새끼들이 그냥 넘처나는 거죠.

성도는 어떤 행위를 하고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 세상 역사 속에서도 계속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자임을 아는 자여야 돼요. 그렇게 다 털리고 털리다가 결국에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주님을 위해 나의 생명을 차압당한다 할지라도 괜찮다라는 하느님 절대 의존자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게 목적지에요.

나의 이름과 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는 자로 내몰리는 거. 그게 성도의 삶이고, 그 속에서 예수님 은혜의 필연성이 심장에 새겨지게 되는 거고 그러한 과정을 사는 자들이 깨어 있는 자인 거예요.

 

 

'아이 잘됐다. 이제 막 살아야지' 막 살아도 돼요. 제가 단언하건대 여러분은 제가 아무리 막 살라 그래도 막 못살아요. 두 가지 의미에서 한 종류는 '그렇게 해서 막 살아버리면 내 가치와 나의 평판과 인기에 흠이 갈텐데... 에이 그래서 난 막 못살아' 요런 악당들 있죠. 고거까지도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챙겨가는 거예요. 막 못살아요. 한 부류는 성령이 막 못살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은 그냥 막 사는 거예요. 처음부터 막 사는 사람들. 우리는 막 살라 그래도 막 못살아요. 그렇게 악당이라니깐요. 내 인기와 영광을 챙겨야 되는데 어떻게 막살아요.

 

(로마6,1-2) 1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절대 죄 가운데서 살 수 없는 자라고 이해를 해서는 안돼요. 그건 뭐 실존적 경험상 아니라는 거 여러분이 더 잘아니까. 그리고 성경에서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요.

 

(1요한1,8-10) 8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는 자가 '나는 죄 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하죠. 그의 말씀이 그의 안에 있다라는 건 성도란 뜻이에요. 그런데 그 놈이 '나는 죄 없어요. 죄 안지을 수 있어요'라고 하면 하느님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거래요. 여러분 죄 짓죠.

 

(로마3,9-12) 9 그러면 우리 유다인이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10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이건 단지 구원받기 전의 인간들만을 지칭하는게 아니에요. 우리가 서두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몸을 입고 있는한 죽는 날까지 만 쏟아 놓게 되어 있어요. 은 하나도 못 내놔요. '어 그런데 가끔 나오던데요?' 그게 하느님이 하시는 선이란 말입니다.

깨닫는 자도 없어요. '그런데 가끔 깨닫게 되는데요?'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거저주시는 하느님의 가 필요한 거예요.

 

(로마3,21-28)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27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 인간은 도저히 하느님의 요구사항인 율법을 지켜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에 이를 수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하느님의 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死亡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좀 전에 읽었던 로마서 61절과 2절이 바로 그 율법의 이야기에 이어져 있는 진술이란 말입니다,

 

(로마3,21-24) 21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22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로마5,20-21) 20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 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21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요 이야기 바로 다음에 로마서 61 2절이 붙어있는 거라 말입니다.

재미있는 말이 나오는데요. 율법이 가입한건, 율법이 주어진건... 범죄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해서래요. 무슨 말이에요. 이게? 우리에게 율법이 주어진건 죄를 더 짓게 하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하지 마' 그랬더니 인간들이 죄를 짓더라는 거예요. 그건 단순히 길가다가 어떤 벽에 구멍 뚫어 놓고 '절대 쳐다보지 마시오' 그러면 다 들여다 보고 가는 것처럼, 고런 식으로 죄를 진다는거 고런 의미도 있어요.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본질부터 한번 추적해 보자구요.

 

죄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살아있는자 흉내내는게 죄라 그랬잖아요.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자기의 살아있음. 자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데 쓰는거 이게 죄잖아요.

안식일을 지켜라 라는 율법이 가입되기 전에 인간들이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죠. 법이 없는데 왜 지켜요. 그거를?

살인하지 말아라라는 법이 있기 전에 살인하면 안돼요? 법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거짓말하지 말아라라는 법이 없으면 거짓말 해도 됩니다. 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법이 주어져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은 모두가 아담 안에서, 자기,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로 살아요. 그런데 그걸 감추며 살아요. 하느님을 섬기는 흉내도 잘내구요. 겸손한 척도 잘하고, 착한 일 하는 척도 잘해요. 감추고 살아요.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안식일 지켜라 그러면 인간들이 올타꾸나 하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지켜서 그걸 어떻게 해요? 나 지켰다 하고 고걸 내 자랑에 끌어 당긴다구요. 고게 진짜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한 건 인간을 범죄하게 하려 함이다라는 건, 인간이 감추고 있는 죄성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단 뜻이에요. 그런데 그게 이제 죄의 종노릇 하는 자에요. 죄가 왕노릇 하는 자의 삶.

그런데 바로 밑에 보면 은혜가 왕노릇 하여 끌고 가는 자들이 있대요.

그들은 죄의 경중 가볍고 무거움을 스스로가 재어서 요걸 하면은 괜찮은 사람, 요걸 안하면 나쁜 사람. 이렇게 자기들이 정의하고 자기들이 거기서 가치를 챙겨 갖는다 말이에요. 고게 죄인이잖아요. 그런데 은혜가 왕노릇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놓고 갑자기 61절에서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을 끼워놓는다 말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죄인들은 그 죄를 자기가 행하고 안하고에 의해서 자기의 의를 챙겨갖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 그러면 내가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내가 죄를 더 지어도 되겠네?' 이렇게 간다는 거예요.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가 행한 행위에 의해서 의로워지고 아니면 죄인으로 이렇게 분별이 되고 이런 걸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면 내가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행위를 더하면 되겠네?' 라는 말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죄인은 그 행위에 의해서 자기가 죄인이다 의인이다가 구별된다라고 여전히 그 행위의 법칙, 힘의 원리 아래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있고 복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은혜의 의해 끌려가는 자들은, 율법 앞에 서면 '아 나는 율법을 절대 지켜낼 수 없는 자예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 율법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제가 이렇게 산자네요' '하느님 저는 십자가에서 죽은 잡니다. 맞습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저를 끌고 가주지 않으면 저는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이리로 가야 되는데,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는 '어 그러면 내가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겠네?'로 간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로가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은혜가 끌고 가는 놈이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하냐? 라는 거예요. 은혜가 끌고 가는 놈은 자기가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자인데 여전히 자기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뭘 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가 '그럴 수 없다'란 말입니다.

聖徒는 하느님의 恩惠가 끌고가는 자들이에요. 그들의 삶 속에서 실패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성도의 삶 속에서 하느님은 반드시 선을 완성해 내요. 그런 사건화되고 개별화된 그런 각각의 실수와 실패 그건 하느님 앞에서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은요.

우리가 정말 깨닫고 가야 하는 것은, '왜 내가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고 그 자리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가!'를 배우고 가는 거예요. 거기에 여러분의 그 행위가 선으로 합력하여 선으로 사용되어지는 거라 말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기도 하고, 악한 일을 하기도 하고, 실수를 하기도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하면서 그 은혜의 이끄심에 의해 하느님 앞에 시체로 죽은 흙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독교는 너무 유치해졌잖아요.

아니 생각해 보자구요. 술 들어간 몸과, 술 안들어간 몸과...시험들지 마세요. 아무나 지적하는 거니까... 하느님 앞에서 뭐 별달라요? 이 몸뚱어리 하고, 저 몸뚱어리가 하느님 앞에서 다르게 취급 받을까요?

거짓말 한 몸뚱이, 거짓말 안 한 몸뚱이 다 죽은 거라 말입니다. 술 들어간 몸뚱이, 안 들어간 몸뚱이 다 죽은 거라 말입니다. 그 죽은 자들에게 성령이 들어가서 그를 살려내는 거예요. 우리는 그거 깨닫고 가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 나라 입장할 때 입장권을 꼭 들고 가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그 십자가의 공로 믿는 믿음. 그게 입장권이거든요. 그거 말고 딴거 없어요. 고게 입장권이에요.

여러분 극장갈 때 직원들이 극장 앞에서 입장권 내세요. 그럴 때. '아 입장권은 없는데, 나 어저께 착한 일 열 개 했는데 들여보내 줄래요?' 들여보내줘요? 여러분 동네 극장에서 '나 육년동안 거짓말 한 번도 안했는데 아저씨 내 극장 한번만 들어갑시다' 이거 돼요? 안됩니다. 입장권이 있어야 들어가요.

여러분의 행위는 천국에 입장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영광 챙겨가시느라 착한 일, 선한 일 성실한 일 많이많이 열매 맺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여러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로가 자랑할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 그러는 거예요. 그거 안되면 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마지막 결론으로 고린도전서 720절 이하를 읽고 마치죠.

(1코린7,20-24) 20 그러므로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십시오. 21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였다 하더라도 조금도 마음 쓸 것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이용하십시오. 22 노예라도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의 자유인이 되고 자유인이라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23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인간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24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각각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 가십시오.

 

그냥 살래는 거예요. 사람들 눈 의식해서 쇼하지 말고, 그냥 살어 이러는 거예요.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을 반드시 선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살아계신 예수 때문에 산자인 거예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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