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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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하느님은 안계신가?에 대한 나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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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3 ㅣ No.4996

죄지은 자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세상이 얼마간은 스스로 당신 뜻을 찾도록 기다리신다는 해석은... 한편에서는 분명 자애롭고 은총으로 들립니다.

 

그 죄지은 자들이 평생의 반을 악행을 일삼으며 살았다 할지라도, 남은 반평생을 뉘우침과 보속하는 마음가짐으로 선행하면서 마지막 순간에는 구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기다리심이란 걸 막연하게나마 지금껏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나나 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이 그 악행의 희생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이나 조건을 전제로 그렇단 생각이 드네요.

 

입장을 바꾸어, 그 뉘우친 죄인의 악행에 의해, 억울하게 단지, 사기나 신체적 상해에 그치는 것이 아닌, 삶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기회마저도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 억울한 희생양이, 차라리,  종교 박해 시대에 하느님을 증거하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순교자들이라거나, 또는, 이미 신앙심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전혀 예상치 못한 허무하고 억울한 죽음 앞에서조차도 기꺼이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극소수의 종교인이 아닌 다음에야...다음의 세 가지 경우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첫 번째,  아직 세상살이에 때묻지 않은 어린 생명으로, 신앙심도 없지만,  원죄 아닌 죄를 저지른 적 또한  없는 순수한 인간... 그 자체로 완벽해 하늘 나라에 가서 천국에 간다 한들...(불교적으로 인간 삶 자체가 고난이고 벗어버릴 수록 좋은 윤회의 굴레라고 전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한번 당신 뜻대로 예쁘게 살아보라고 내리신 생명 아니었습니까?

 

두 번째,  그 또한 회개해야 할 죄를 지었으나,  준비없이 당한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오히려 자기를 죽인 사람에게는 주어졌던,  회개하며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도록 노력할 수 있는 제2의 삶의 기회를 하느님의 기다리심 없이 박탈당한 것 아닌가요?   그렇게 어떨결에 죽은 영혼 앞에서, 하느님은 또 뭐라 하실까요?  네가 비록 죄를 지었으나,  그 죄의 댓가에 비해서는 너무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그 죄인이 회개한다면 결국 네가 희생해 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것이니, 그를 감안하여 네가 뉘우치지 못한 죄를 사하여 주겠노라 하실까요?  그랬다가 그 살인자가 결국 뉘우치지 않으면 헛된 죽음으로 몰리게 될까요?  그리고, 다행스런 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인간의 구원받음을 위해서는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죄를 저지르고 난 후에 이를 뉘우친 후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진단 말입니까?  물론,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로 하느님 잣대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죄를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고, 그 죄에 대해서는 살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최소한 불이익을 당했거나 심신의 상처를 입었을 거란 조건이 따르기는 하겠죠.  그렇더라도, 그 모두가 살아 있을 때에 의미있는 해석입니다. 내가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싶어도 살아 있을 때 가능하고, 처절하리만큼 절망적 상황이라할지라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겠기에 용서를  하든,  보이지 않는 이면의 하느님 은총을 찾든 할 것입니다.  예견되지 않은 급작스런 죽음 앞에서 누가 누굴 용서하며, 누가 하느님의 뜻을 섭리로 받아들이고 죽을까요? 

 

세 번째,  두 번 째의 경우와 비슷할 지 모르겠는데... 죽음 직전의 삶까지는 하느님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좀 더 살았더라면 대부분의 다른 모든 신자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기꺼이 하느님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수준의 비신앙인에겐....또 삶이 무슨 기회가 된단건지? 왜 유독 그에게만 그 선택과 받아들임의 기회를 짧게 주신 건지...

 

제 글을 읽으면서, 심히 극단적인 경우만 생각한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그 것이 내 가까운 주위가 된다거나, 나 자신이 된다면 나에겐 100%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대부분의 인간이 신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왜, 시련 속에서 도리어 신앙의 은총이 싹튼다고 할까요?  신앙의 은총이 싹트는 시련에 있어서 예외가 있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그런 예외적인 상황은 어느 불쌍하고 딱한 이웃이 아니라 바로 내게 닥칠 가능성이 늘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두려워하면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도 그런 예외적 상황이 내게 닥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나약하고 불완전하기에 두렵고, 그런 두려움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느님이 현존하심에도 공백이 있으시다면...허탈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순간에도 제 이해와 생각에 공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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