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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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단상] 호스피스 병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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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kimhh1478] 쪽지 캡슐

2015-07-20 ㅣ No.8529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앙단상] 호스피스 병동에서 

 

김선동 루카(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CJPA/Seoul) 회장)

 

지난겨울 예전에 다니던 본당에서 물심양면으로 저를 도와주시던 자매님이

보름 정도밖에 못 산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매우 속상해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일흔을 한참 앞둔 분이어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새벽 생미사를 봉헌하고 한달음에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작년 가을 부산교구에서 있었던 한국평협 상임위원회 때

황철수 주교님께 받은 치유의 십자가를 손에 쥐여 주며

쾌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사 기도드리니 그분은

"우리 어디 다시 한 번 뛰어 봅시다" 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그분의 눈망울이 그리워 다시 찾았을 땐 호스피스 병동에 계셨습니다.

병실 여기저기서 "나 죽기 정말 싫어요" "더 살고 싶어요" 하는

기운이 전혀 없는 목소리들이 들려옵니다.

 

헤어지는 게 너무나 서러워 그 후 몇 번 더 찾아갔지만

저는 그분의 두 손만 부여잡을 수 있을 뿐 어떠한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죽은 오빠 라자로를 보며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존재론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슬픈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분과 저는 구원의 희망을 간직한 채

떠나고 떠나보냈습니다. 이제 저도 나이를 먹었는지

올봄에는 비슷한 사례가 연이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한 사람에게는 배은망덕을 느꼈고

다른 한 사람은 폭력 성향이 있어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멀리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간 무심했던 게 미안하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느낀 게 있어 무조건 달려갔습니다.

예전 그들의 위풍당당함은 오간 데 없이 초췌한 모습을 보니 왈칵 눈물이 솟았습니다.

 

요즘 같은 백 세 수명 시대에 예순도 안 돼 시한부 삶을 선고받아

기약 없이 헤어져야 한다는 게 애달팠던 거지요.

하느님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게 끝 모를 심연으로 빠져드는 두려움을

줄 것 같아 신앙과 입교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지만 깊은 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는 신앙과 내세의 문제도 정성껏 간병하는 배우자의 몫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희미해질 때마다 새겨보는 정신물리학자

구스타프 페히너의 통찰을 소개합니다.

"사람은 세 번 산다. 첫 삶은 끊임없이 잠만 자는 태중의 삶이다.

둘째 삶은 자고 깨기를 반복하는 현세이다. 셋째 삶은 늘 깨어 있는 내세이다.

첫 삶에서는 그곳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지만 다음 삶에서 사용할

눈 코 귀 입 등을 만든다. 둘째 삶에서도 다음 삶에 필요한 것을 만든다.

 

태아는 현세의 찬란한 광채와 문화를 절대 모르므로 현세로 옮아감을

일종의 죽음으로 여겨 울면서 태어나겠지만 현세에서 볼 때

그 옮아옴은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출생이므로 모두들 웃으면서 반긴다.

 

제한된 육체 속에 갇혀 있는 우리는 셋째 삶의 무한한 자유와 평화에

대해 전혀 모른다. 셋째 삶으로 인도하는 좁고 캄캄한 통로를

우리는 죽음으로 여기겠지만 셋째 삶에서 본다면 영원한 생명의 탄생이다."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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